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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6장. 속죄일과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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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6장. 속죄일과 그리스도

레위기 16장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9-04-12

말씀내용
16장 속죄일과 그리스도 (찬 283)

1. 본문은 속죄일의 규정을 담고 있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차례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이 바로 속죄일이다(2,34). “속죄일은 이스라엘의 정결신학의 절정이자 면류관이었다(J.L.Mays).” 사람들은 일상적인 속죄제사를 통해서 죄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양심에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둔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 제사장, 예배 장소를 위한 포괄적인 속죄를 이룰 기회가 필요했다. 속죄일은 유대력으로 7월 10일이고(29) 큰 안식일로 여겨졌다(29,31). 대제사장은 이날 에봇을 벗고 세마포 속옷을 입고 지성소에 들어간다. 이것은 화려한 에봇을 벗고 정결하고 겸비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함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인간의 모든 위엄은 벗겨진다. 그는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제물로 수송아지를 드리고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물로 수염소 둘(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는 용도로, 7~10절)과 자기를 위한 번제물로 수양을, 온 회중을 위한 번제물로 역시 수양 하나를 드린다(3~10절). 먼저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때, 향로에 단위의 불로 피운 향 숯을 담고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분향함으로써, 속죄소를 그 연기로 가린 후에 지성소에 들어가 그 피를 속죄소 위(동편)에 뿌리고 그 앞에 일곱 번 뿌린다(12~13). 분향의 연기가 가득해서 대제사장은 언약궤를 선명하게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 다시 수염소의 피로 동일하게 행한다(14~15절). 이때 아무도 회막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17절). 속죄소에 피를 뿌림으로써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한(16)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나와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손가락으로 단 위에 일곱 번 뿌림으로써 제단을 성결하게 해야 한다(18~19절). 이렇게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성소를 정결하게 해야 했다(33). 그 후 산 염소에게 대제사장이 두 손으로 안수하고 죄를 고백함으로써 모든 죄를 다 전가하고 미리 지정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내 무인지경에서 놓는다(20~22절). 피를 흘리고 죽은 염소의 제사가 오염의 제거에 관한 것이라면, 광야로 보내는 염소의 의식은 잘못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온 백성의 죄가 그들의 눈 앞에서 사라져 없어져버림 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도말하셨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시 103:12). 여기서 죄는 단지 율법의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의미한다. 그 후 대제사장은 옷을 갈아입고(세마포 속옷은 벗는다)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로 수양을 드리고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 위에 불사르고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가죽과 고기와 똥은 진 밖에 나가 불사른다(23~28절). 이 일 역시 죄와 더러움을 성소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상징한다.

2.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닫혀있었다(2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 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기 위해 성막을 명하셨지만, 아직 그 영광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길은 완전히 열리지 않아서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 그것도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길이 완전하게 열리기 위해서는 더 나은 제물이 요구되었다. 바로 그리스도다. 이 뿐 아니라 대제사장 자신도 역시 이렇게 나아가기에는 연약한 존재였다. 제물도, 제사장도 다 부족한 존재였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피뿌림을 받는 길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율법은 가르쳐준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3. 이 날에 제물로 사용된 두 염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이중적 면을 제시한다. 한 염소에게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유지되는 것을 보고, 다른 한 염소에게서는 죄들이 제거되는 것을 본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가 속죄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전자의 역할,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후자의 역할이다.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첫째요, 우리의 구원은 둘째다. 그리스도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는 것이 구원 사역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아사셀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 이 본문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문자적 의미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칠십인역은 ‘떠나보내기 위한 염소’로, 라틴어 벌게이트역은 ‘떠나는 염소’로 이해했다. 그러나 유대 전승에서 아사셀은 모든 불의를 가르치는 사탄의 부하로서,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죄값을 사탄에게 지불하였다는 해석이 나오게 되었지만, 이 해석은 결코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4. 이토록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길은 멀고도 두려운 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년에 한 차례씩 피를 가지고 들어가도록 ‘은혜’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는 그들의 모든 죄가 속하여졌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심으로써 그들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증시켜주시고자 함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완전하게 열렸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날마다, 원하는 순간마다 제한 없이 들어가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그 새롭고 산 길로 나아가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속죄제물로 드려지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사셀의 염소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광야-죄의 곳, 성문 밖(히 13:12)?로 나가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임을 기억하자.

5.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고 또한 온전한 제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은혜의 길을 활짝 열어주심을 감사하옵니다. 이 길로 나아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순간마다 뵈옵고 사는 복된 인생들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