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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하나님을 아는 지식 (1) - 지식없는 신앙은 위험하다 (민수기 강해 25)

민수기 14:11-4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06-22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시간에, 민수기 13~14장에 기록된 가데스의 대반역 사건에서 이스라엘의 대다수 지도자들과 회중 전체를 사로잡고 있던 한 가지 문제, 두려움이라는 우상을 살펴보았습니다. 두려움의 문제는 인간 실존이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문제는 이 두려움이 하나님을 신뢰함 앞에서 빛을 잃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우상이 되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와 소망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정탐군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에 근거한 주장에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내렸고,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을 거절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대반역 사건에서 주목할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죄 용서와 징계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두 가지 회개, 즉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1. 죄 용서와 징계(14:20~37)
먼저 죄 용서와 징계의 주제를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시고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11~12). 출애굽기 32~33장에서 본 것처럼(특별히 32:9~10), 하나님의 이 결정에 대하여 이번에도 모세는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13~19; 출 32:11~13).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고 백성의 죄를 용서하십니다(20; 출 32:14). 하지만 어떤 조건을 붙이십니다(21~25). 하나님의 영광과 이적들을 보고서도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청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멸시한 사람들은 그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 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22~23). 한 마디로 그들이 거절한 그 땅을 주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 세대가 모두 광야에서 죽은 후에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32,35). 정탐군들이 가나안을 정탐했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그 기간이 40년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34). 다만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갈렙과 여호수아만은 제외될 것입니다(24,30,38). 또 그들의 자식 세대들은 1세대가 말한 것처럼 사로잡히는 대신, 하나님께서 주실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31).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에 대하여 악평을 함으로써 이 모든 반역의 단초를 제공한 10명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재앙으로 죽이셨습니다(36~37).
하나님의 조치는 그들이 말한 대로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모든 악평과 불평을 들으셨고, 들으신 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말했습니다(2). 더 나아가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칼에 죽게 하고 자기들의 처자들은 사로잡히게 하려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한 것으로 몰아갔습니다(3). 우리가 39절 이하에서 보듯이, 정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칼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녀 세대들을 사로잡히게 하지 않으시고 가나안 땅에 들이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셨고 그들의 말이 귀에 들린 대로 하셨으나 전부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A. 죄를 용서하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20절에서 분명히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라고 말씀하셨는데, 21절에 ‘그러나’로 시작하는 말씀을 보면, 결국 용서하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이 질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주는 질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용서에 대한 우리의 오해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용서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용서를 이 상황에 적용해보십시오. 죄를 사한다고 말씀하셨다면, 그 다음 21절 이하에 있는 모든 말씀은 나오면 안 됩니다. 용서하면 그걸로 다 끝나야 합니다. 일반적 개념에서 용서와 벌, 용서와 징계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용서면 용서이고 벌이면 벌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님께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도 이런 방식으로 용서를 하셔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용서입니까, 벌입니까? 아니면 부분적인 용서입니까?
이 질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 근거한다고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금송아지 숭배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성품을 선포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4:6~7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이심은 분명합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시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천대와 삼사대라고 한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보응하심에 비해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지만, 벌을 면제하지는 않으신다”고 한 부분입니다. 분명히 용서하십니다. 모든 종류의 죄악을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못할 만큼 큰 죄악은 없습니다. 그런데 또한 ‘벌을 면제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을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하나님의 성품은 크게 두 가지, 사랑과 공의입니다. 사랑은 조건없이 용서하고, 공의는 벌을 면제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성품 대로 행하신 일입니다. 모세가 기도한 대로,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은 죄를 사하셨습니다(20).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는 드러납니다.
아직도 “이게 무슨 용서냐?”라고 말씀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이 제시하는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달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백성이 받아야 하고 당해야 할 율법의 저주와 형벌이 주님께 남김 없이 부어졌습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께 쏟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벌을 면제하시지 않으십니다. 이 근거에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를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받은 것이 용서요, 죄사함이며, 칭의이며 구원입니다.
“이것도 용서라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깨달을 때 우리는 복음을 아는 것이고, 그 복음을 알 때 우리는 복음의 은혜 아래서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고, 그렇게 오해된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은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는 천대까지 이른다고 한 것처럼, 이 심판 중에도 하나님의 인자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모두를 다 죽이신 것이 아니라, 이 반역을 초래한 지도자들 10명만을 재앙으로 죽이셨고, 악한 일을 행한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기까지 광야를 방황할 것이라고 하신 것에서 나타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1세대가 다 심판을 받아 죽었고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경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들의 자녀 세대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누리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은혜입니다. 진노 중에도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14:39~45)
두번째로 우리가 주목할 주제로 가보겠습니다. 그것은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개의 회개의 유형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모세의 기도이고(13~19), 둘째는 백성들의 태도입니다(39~45).

A. 백성들의 태도: 율법적 회개
백성들의 태도를 먼저 보지요. 그들은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크게 슬퍼했습니다(39). 백성들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자체가 곧 참된 회개의 표시는 아닙니다. 1절에서 그들은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했지만, 그것은 회개와는 상관없는 그들의 감정적 반응일 뿐이었습니다. 감정은 그 자체로, 회개의 참됨에 대한 여부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들의 반응에서 그것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40).” 그리고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여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범죄했다고 하나님께 자백합니다. 이것도 그들이 참으로 회개하고 있다는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고 약속하신 곳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죽이시려고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여기 가나안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악평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울며 불며 들어가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제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해야 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악평한 1세대가 단 두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모두 다 죽을 때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주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25)”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이 정말 회개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돌이켜 광야로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모세가 기도했듯이, 그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사유하시는 은혜를 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금하신 데로 가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우기며 나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그 산지로 올라가지 말라는 모세의 무서운 경고의 말을 들으면서도(41~43) 순종치 않고 올라갔습니다. 믿음은 무모함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개의치 않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자기들이 범죄했다고 고백은 하고 있지만, 그 범죄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어떤 의미인지를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편한 것, 잘 되는 것, 좋은 길입니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참담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대로 광야로 돌아가면 40년 동안, 자기들이 다 죽을 때까지 지금 눈 앞에 있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나은 길, 하나님이 막으신 길로 간다고 우깁니다. “어떻게 하면 편한 길로 내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가 그들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무서운 경고를 뒤로 하고, 산지로 올라갔고 그 결과는, 4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않았다는 44절도 그들의 무모한 도전을 고발하는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율법적 회개의 전형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당할 죄의 결과를 피하는데 모든 관심이 있는 회개입니다. 죄 자체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그들이 당할 결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율법적 회개는 회개 이후의 삶에서 여전히 불순종과 무모함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회개의 많은 모양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여전히 비참합니다. 이런 회개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 근거합니다. 그 무지는 결정적으로 ‘벌을 면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없는 구원입니다.

B. 모세의 기도: 복음적 회개
이제 모세의 기도를 보십시오. 백성의 태도와 어떻게 다릅니까? 모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했던 것처럼(출 32:11~13), 모세는 하나님의 명성을 근거로 용서를 구합니다. 모세가 가진 관심의 초점은 어떻게 해서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한 길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그가 표명하는 관심은 하나님의 이름이고, 하나님의 영예입니다.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15~16).”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초점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의 최우선 관심사가 될 것을 가르치실 뿐 아니라, 기도의 우선순위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그가 용서를 구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18~19).” 모세는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4장에서 계시하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그 성품을 따라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는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복음적 회개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그는 백성들의 죄가 하나님의 영예에 관한 것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 백성을 멸하시면 하나님의 영예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죄의 결과를 피하는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는 죄 자체를 인하여 슬퍼합니다. 이것이 복음적 회개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백성,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깨뜨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복음적 회개입니다. 복음적 회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백성들이 보여준 것과 다르지 않은 율법적 회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3. 교훈과 적용: 지식 없는 신앙은 위험하다
A. 지식 없는 신앙은 위험하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본 내용을 정리하면한다면, 지식 없는 신앙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신앙은 함께 갑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용서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처럼 무모한 도발을 할 것입니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성경은 이것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온전한 회개, 복음적 회개의 전제입니다. 지식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바른 지식은 우리 인생이라는 세월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기도하게 하시는 은혜를 통해서 참된 지식, 가슴의 지식, 하나님을 참으로 경험하는 지식이 됩니다. 그리고 이 지식이 빛에서 죄를 이해하고 느끼고 반응하게 되며 그것이 복음적 회개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B. 구주 그리스도
그러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를 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벌을 면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죄의 벌을 감당하게 하는 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랑하시는 독생 성자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우리가 감당할 벌을 대신 감당케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시되, 율법의 저주와 형벌로부터도 자유하게 하셨으니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이 은혜가 오늘 우리를 방황하는 인생이 아니라, 목적지를 알고 확신하며 그 길로 걸어가게 하는 복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송을 돌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