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새신자 양육 - 직분 - 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주님이 세우시는 직분

데살로니가전서 5:11-14, 디모데전서 5:12, 갈라디아서 6: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8-18

말씀내용
약 3년 전쯤 교회의 집사, 권사 선출에 즈음하여 [교회와 직분]이라는 주제로 네 차례 직분에 대한 설교를 했고 지난 4월에도 장로 선출에 맞추어 장로 직분에 관한 설교를 한 차례 했습니다. 다음 주일, 집사와 권사 선출을 앞두고 다시 직분에 대한 설교를 두 차례 전하려고 합니다.


1.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하는 세 가지 이유
제가 왜 직분자 선출을 할 때마다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3년 전 직분에 관한 시리즈 설교를 할 때, 그 설교를 들으신 분들이 소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다수는 그 이후에 벧샬롬교회의 교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에 대한 설교는 오늘도 필요합니다. 제가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하는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듣고 배워서 이해한 것 보다는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에 이끌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무리 배워도 실제로 삶에서 경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직분에 대한 이해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직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각자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의 지난 교회 생활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배우고 이해한 것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이해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서 교정되어야 하고, 우리 모두가 벧샬롬교회의 교인으로서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오해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직분에 대한 이해입니다. 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셨던 하도례(Theodore Hard, 1925~2009)선교사님은 1981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모든 장점과 활기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집사들이 대부분이 거의 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필자는 크게 실망하고 있다. 그들에게 집사란 흔히 하나의 명예적 직분일 뿐이고 장로가 되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에 불과하고 있다.”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하는 세번째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는 큰 교회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큰 교회가 되지 않겠다거나 큰 교회는 잘못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큰 교회가 되는 것은 교회가 추구해야 할 합당한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크기가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우리가 요새 상고하는 요한계시록이 그것을 놀랍게 가르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큰 성 바벨론이 아니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 성경적인 교회가 되려면,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를 깨닫고 잘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직분입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항존직(恒存職)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 항상 존재하는 직분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이 직분이 존재해야 바르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직분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목사와 장로 직분(이 둘은 크게 장로 직분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집사 직분을 온 교회가 바르게 이해하고,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성경이 가르치는 기준에 따라 선출되며, 그들 각자가 자기 직분을 바르게 행사할 때, 교회는 바르게 세워지고 복을 누리게 됩니다. 반대로, 직분자를 잘못 선출하면, 온 교회는 그로 말미암아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직분이 (성경적으로) 개혁되면, 교회가 개혁된다”는 말을 합니다. 직분은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직분자 선출을 할 때마다 저는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함으로써 모든 교우들이 성경에 합당한 기준으로 직분자들을 선출할 수 있도록 성경적 직분론을 다시 기억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 직분에 대한 설교를 하는 세 가지 주요한 이유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시고 주님께 지혜를 구하는 가운데, 다음 주일 교회의 집사와 권사를 선출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라 선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는 교회에 직분을 세워주시는지를 중심으로, 성도들이 교회에서 가지는 책임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특별히 집사직분과 관련해서(권사직분을 포함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주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2. 성도의 소명: 교회를 세워라!
본문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를 마무리하면서 주는 마지막 권면입니다. 11절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합니다. 결론을 말하겠다는 것이지요. 11절을 보지요.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서로 덕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건축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집이나 구약 성전에 비유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순종과 거룩함으로 교회 공동체를 건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서로’라는 말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도가 된 모든 교인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덕을 세우는 것, 즉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돈 주고 일군을 사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자기 역할을 감당하고 서로를 돌아봄으로써 세워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 언급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의 앞 부분에서 한 말씀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1:7-8).”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많은 환난 중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사람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2:13) 들었을 뿐만 아니라 주를 본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전해짐으로써, 믿음의 선한 본을 보이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는 특징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1:3).” 이들의 믿음은 삶과 일로써 드러나는 살아있는 믿음이었고, 이들의 사랑은 형제를 섬기는 수고를 만들어냈으며, 이들의 소망은 모든 환난 중에 그들을 인내하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말로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아니라, 살아있는 참된 실재였습니다. 이것이 11절에서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했을 때, 바울 사도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 11절에서 ‘피차 권면하고’라는 말을 듣습니다. 권면한다는 말은 보혜사를 의미하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의 동사형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곁에서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듯이, 모든 성도는 서로의 곁에서 서로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면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는 목사나 장로가 아닌, 모든 성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교회, 거룩하고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직분자들은 누구인가?
하지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하는 일이지만, 특별히 이 일을 위해 직분자들을 세우십니다. 12-13절을 보지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여기서 바울 사도는 직분자들을 언급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 직분자들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장로들만을 언급한 것인지, 아니면 집사 직분을 포함시킨 것인지, 이것도 아니라면, 사도가 특정 직분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에서 특별한 수고를 감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 것인지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규명하려면, 이들이 하는 일을 묘사하는 세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이 그것입니다. 이 세 단어는 이들이 하는 일을 묘사하는데, 맨 앞에 있는 ‘수고하는’이라는 단어는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총칭하는 역할을 합니다(찰스 워너메이커). 본래 ‘수고하다’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육체적 수고를 가리키는데 쓰이는 말인데(살후 3:8; 고전 4:12), 바울 사도는 복음을 위한 자신의 수고에 이 단어를 종종 사용하곤 했습니다(고전 15:10; 갈 4:11; 빌 2:16; 골 1:29).
두번째로 ‘다스리며’라는 단어는 주로 장로의 직무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직역하면 ‘선두에 선다’는 말인데, 앞장서서 본이 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령, 디모데전서 5:12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라고 할 때,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고, 장로와 집사 직분의 자격을 묘사하는 디모데전서 3장에서도, 집(가정)과 자녀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딤전 3:4,12). 다스림은 장로 직분의 가장 기본적이고 특징적인 직무입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에서의 다스림과는 달라서, 힘으로 누르거나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섬기며 삶의 모범이 되어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으로, ‘권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훈계, 가르침, 충고, 경고’ 심지어 ‘책망’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주 안에서 누가 누구를 훈계하고 심지어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가하다고 생각하지만, 교회에서도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분명히 성경은 그 일을 하도록 구별된 사람들이 있으며(그들이 직분자들—장로—입니다) 그들을 알아주고 가장 귀히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의 모든 성도를 향한 일이기도 합니다. 14절에서 바울 사도가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라고 할 때, 권계한다는 말이 ‘권하는’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라는 점을 볼 때, 이것은 비단 장로나 사도 같은 지도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장로들의 훈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에베소 장로들을 향해서 자신이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면서,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고 말합니다(행 20:31). 같은 말입니다. 이 일은 목양의 직분인 장로들이 어렵지만 힘써 감당해야 할 직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의 훈계는 실로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단어들의 의미와 정황을 고려하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장로들에 대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아마 데살로니가교회 안에 리더십과 관련하여 어떤 어려움이 발생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편지를 마치기 전에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그들을 알아주고 가장 귀히 여기라’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서신의 일차적 독자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누구를 가리켜 이 말씀을 하는지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까지 알 수는 없을지라도 이것이 장로 직분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4. 우리의 약함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면 되는데, 왜 주님께서는 직분자들을 구별하여 세우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셔서 믿는 무리들이 한평생 함께 천로역정을 걷게 하심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홀로 설 수 없기에, 함께 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붙들어주고 권면하는 가운데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의 약함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이론상으로는 모든 성도가 모든 성도를 책임져야 하지만, 과연 우리의 현실이 그러합니까? 우리 교회의 교인(멤버십)이 되려면, 6주 동안 주일 오후의 새가족 코이노니아에 참여한 뒤에, 목사와의 만남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은 등록카드만 작성하면 교인이 되는 보편적 관례에 비하면, 까다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그저 주일 오전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교인됨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서로를 돌볼 책임을 가지도록 부름 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불가피한 경우만을 제외하고, 교회의 모든 공적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교인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를 알고, 서로와 사귐을 가지며,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고 때로는 책망을 하기도 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서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인됨의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약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직장에 매이고, 혹은 건강과 기타 여러 불가피한 이유, 또는 우리의 약한 믿음으로 인해, 서로를 향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물론 이런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교인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애써야 하겠습니다마는, 이 빈 자리를 채우도록 주님께서는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워주셨습니다. 그것이 장로와 집사입니다. 장로는 말씀과 심방으로 모든 교인들의 영적 돌봄을 책임진다면, 집사(권사를 포함)는 모든 교인의 육적 돌봄을 책임지는 직분입니다. 교회라는 하나님의 가족이 영적 돌봄만이 아니라 육적 돌봄까지도 책임지게 하셨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이를 위해 누군가는 배나 수고하고 애씀으로써 모든 성도의 책임 가운데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직분자들은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2)”고 말씀한 것도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사도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그들을 ‘알고’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은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의미를 넘어, 존경하라는 의미까지 내포합니다. 종종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갈등을 경험합니다. 존경할 수 없는 목사와 장로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참된 마음에서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 안에서 귀하게 여기기 위해서, 우리는 목사를 청빙할 때 보다 신중해야 하고 장로를 선출할 때 더욱 분명한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선출해야 합니다. 존경할 수 없는 목사와 장로를 결정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교인들 자신입니다. 존경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외적 스펙을 보고 목사를 청빙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장로를 선출할 때도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선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 장로가 된다고 해서 그를 존경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우리는 이 일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성경은 합당하지 않은 자를 존경하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도, ‘너희 가운에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고 권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직분자들은 존경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 역시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이런 수고를 감당하는 자들이기에 존경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한삼서에서 사도 요한이 언급하는 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요삼 9-11)는 아마 교회의 장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그를 존경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의)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요삼 11). 하지만, 여러분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고 까다로워서 그들이 말씀에 서서 참된 마음으로 교회의 지체들을 섬기지만, 그들이 가진 어떤 약점들 때문에 그들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 행하는 일이며, 피차 덕을 세우는 일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한 그릇이지만,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불러 직분자로 세우시는 우리의 형제들 역시 연약한 그릇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직분에 대한 존중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세우신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사도가 직분자들을 향해서 취해야 할 성도들의 마땅한 태도로 언급하는 것은,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멀리서 존경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도들이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라는 말이고 특별하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단서가 있습니다.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하는 현저한 수고들과 열매들을 인하여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격이나 인품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하십시오. 부족할지라도, 그들이 하는 수고와 그 일을 인하여 성도들은 그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 의미를 곰곰히 묵상해본다면, 교회의 지도자들 때문에 고심하는 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저는 자신이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로서 이런 구절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럽고 곤혹스럽습니다. “나한테 잘하라”는 이야기로 듣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피할 수 만은 없습니다. 이 원리를 조금 확대하여 실질적 예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들은 성경에서 언급된 직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의 교사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자원함으로 감당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오후 교리 공부에 참석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성도들이고 교인들임에도 불구하고 배나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매 주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수고를 알아주고 사랑 안에서 귀히 여겨야 합니다. 가령, 지난 주간에 가족수양회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교육부 프로그램을 별도로 진행하였습니다. 누군가의 수고가 없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여러분이 수고하셨지만, 특별히 신진현형제와 김범렬형제는 세 번의 집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하고 우리 자녀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수양회가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기도하고 고민하며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수고를 알아주고 그들이 감당해준 수고로 말미암아 그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선출 그리고 존경과 사랑
이제 말씀을 맺기 전에 교훈적 적용점들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장로 직분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교회 생활의 원리로서 조금만 확대 적용해본다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모든 성도의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교회를 세우는 일은 목사의 일, 장로의 일, 혹은 집사의 일이나 기타 직분자들의 일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회를 세우는 일은 성도의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로 여러분 모두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라는 말씀은 ‘형제들’인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14절에서 사도는 다시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성도들은 형제 중 게으른 자들을 권계해야 하고(12절에, ‘권하다’와 같은 단어),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해야 하며,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직분자들의 일이기 전에, 모든 성도의 일입니다. 여기서 ‘게으른’이라는 단어는 군사용어로서, 대오를 맞추지 못하고 벗어나는 사람, 질서 없이 행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Leon Morris).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의 결론을 쓰면서, 데살로니가 교인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을 지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약함으로 인하여 주님은 교회에 직분을 주셨고 직분자들을 세우십니다. 그들도 모두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이지만, 우리 중에서 직분자들로 세우집니다. 직분자들은 성도로서 하는 일을 몇 배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인해 교회에 직분을 주시고 직분자를 세우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저들의 수고가 교회를 얼마나 복되게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직분자들이 없다면, 교회는 어떻게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직분자들은 주님이 규정하신 자기 직분의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하고, 성도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합니다.
천로역정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순례자들을 섬기라고, 담대를 붙여 주셨고, 또 진리의 용사와 불굴과 같은 강한 자들을 붙여 주십니다. 그들이 앞장 서고(인도하고) 뒤를 지켜줌으로써 연약한 순례자들이 그 험한 순례의 여정을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중에서 담대를 일으키시고 또는 진리의 용사나 불굴 같은 사람들을 일으키사, 우리 중에 가장 약한 자라도 이 천로역정을 완주하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직분자들이 많다면, 그저 이름만 가진 직분자가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열심으로 서로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지만 이 일에서 배나 수고하여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는 직분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세워진다면, 그 교회는 얼마나 복된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우리는 다음 주일 예배 후에 공동의회를 열고 우리 교회에서 집사 직분과 권사 직분을 받아 섬길 형제들을 선출해야 합니다. 교회의 교인으로서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직분자를 선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한 주간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는 가운데 신중하게 투표로써 직분자들을 선출해야 합니다. 나와 친한 사람,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존경하고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을 찾으셔야 합니다. 한 주간 특별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어떤 분이 집사 직분의 직무에 합당하고, 어떤 분이 권사 직분의 직무에 합당한지를 열심히 찾아보십시오.
그러나 선출이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는 선출된 직분자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며,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교회를 세우라고 요구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뒷짐을 져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들, 모든 교인들은 자신의 직무를 언제나 충성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자들은 배나 수고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뜻대로 세워져 감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주님께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