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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설교분류별모음 > 민수기 강해 (24) - 두려움이라는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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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죄 (3) - 두려움이라는 우상 (민수기 강해 24)

민수기 13:1~14:1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06-08

말씀내용
1. 반역 시리즈와 이 사건의 본질
우리가 살펴볼 본문인 13~14장은 반역 시리즈의 네번째 이야기입니다. 다베라에서 일반적인 불평으로 시작한(11:1~3) 이 시리즈는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고기가 먹고 싶다는 불평으로 이어졌고(11:4~35) 다시 하세롯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권위를 시기하는 문제로 이어지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12:1~16). 이제 우리는 13~14장에 걸쳐서 기록된 이 시리즈의 네 번째 이야기를 봅니다. 이 반역 사건은 광야 40년의 생활에서 금송아지 숭배 사건과 함께 최악의 두 사건으로 기억되는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가지지만, 우리가 지금은 그것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이 사건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먼저 이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다수 지도자들의 보고에 기초하여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역을 일으킨 이 사건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거절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것이 다수 정탐군들의 보고와(13:28~29, 31~33) 그 보고에 의존하여 흥분한 온 회중이 지휘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결정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14:4).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거부한 것입니다(13:1). 이것이 이 반역 사건의 본질입니다.
2. 사건의 개요
그러면 이제 이 반역 사건의 개요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A. '거의' 다 온 것은 다 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먼저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모세가 정탐군들을 보낸 곳이 어딘가 하는 것입니다. 13:3에는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13:26에는 좀 더 상세하게 바란 광야의 가데스라고 밝힙니다. 가데스는 바란 광야의 북단, 광대한 오아시스 지역에 세워진 성읍으로 브엘세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8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가데스는 가데스바네아로도 불렸고(민 32:8) 엔미스밧(창 14:7), 므리바(민 20:13)와도 동일지명입니다. 제가 이 장소를 주목하는 이유는 가데스가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남쪽 경계였기 때문입니다(민 34:4). 이스라엘 백성이 드디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반역의 비극이 벌어진 곳은 가나안의 경계, 초입이었습니다!
이 본문과 관련이 있는 신명기 1:20~21절을 보지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신 1:20~21).” 이제 하나님의 명령대로, 들어가서 차지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신 1:22).” 이것이 민수기 13장의 배경입니다. 정탐군을 보낸다는 것, 미리 준비하고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들어가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미리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해보고 가겠다는 겁니다. 모세는 그 제안을 좋게 여겼고(신 1:23),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재가하셨습니다(민 13:1~2).
그들은 거의 다 왔습니다. 목적지의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이 땅에 들어가기까지는 38년의 세월이 더 요구되었고, 뿐만 아니라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다 광야에서 죽은 후에야 그 다음 세대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정말 슬픈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3400 여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삶에서 똑같은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B. 정탐을 하다(13:1~24)
모세는 각 지파에서 지휘관을 한 사람씩 뽑아서 가나안을 정탐하도록 보냈습니다. 그 땅의 지형, 거주민, 비옥함의 여부 등을 조사하고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는 사명을 주어 보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준 사명은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지, 또는 바람직한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네겝에서(13:17) 하맛 어귀 르홉까지(13:21) 거의 남북으로 354 킬로미터에 이르는 가나안 땅을 잘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13:22에 그들이 정탐한 성읍 중 헤브론이라는 익숙한 지명이 등장합니다. 모세는 헤브론을 쓸 때, 정탐군들은 물론 이 말씀을 읽는 독자들도 헤브론을 알 것이라고 추정하고 쓰는 것 같습니다. 헤브론은 롯과 헤어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곳이었고(창 13:14~18),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매입해서 가족의 매장지로 삼은 곳이었으며(창 23), 여기에 사라, 아브라함, 이삭이 매장되었고 애굽에서 죽은 야곱의 유해도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헤브론은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하게 하는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곳에 이른 정탐군들, 특별히 믿음의 사람인 갈렙과 여호수아의 마음은 감격에 겨워 전율했는지 모릅니다. 또 그들이 가져 온 포도 송이는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올 만큼 컸으니 그 땅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을 모든 백성이 알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C. 엇갈린 보고(13:25~33)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열 두 정탐군이 관찰한 사실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13:27), 그 땅 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며 아낙 자손을 보았다는 것(13:28), 그리고 아말렉은 남방에,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가에 거주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13:29). 대체로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당시 가나안에는 높이가 10~13미터에 이르고 두께는 5미터에 이르는 성벽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관찰한 사실에 있어서 그들은 모세가 요구한 것을 잘 수행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본 사실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모세로부터 받은 사명을 넘어서는 문제였습니다. 다수의 보고와 소수의 보고가 엇갈렸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열 두 정탐군 중 열 명이 서명한 다수 보고서와 단 두 명만이 서명한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있습니다. 이 엇갈린 보고가 보여주는 근본적인 차이는 물론 믿음의 문제임을 우리는 압니다. 이 두 보고의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다음 두 구절에 있습니다. 13:27을 보지요.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그 땅을 ‘당신(모세)이 우리를 보낸 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 14:8).” 이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성경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시는 땅이라는 약속과 함께 나옵니다. 출애굽기 3:8,17; 13:5; 33:3; 레 20:24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다수의 보고는 그 약속을 빼놓은 채 그냥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들은 삐딱한 관점으로 그 땅은 좋아도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말합니다(13:32). 이 말은 계속해서 전쟁을 불러일으켜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땅이라는 말입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핵심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전제에서 사실들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4:8에 있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에 나타납니다. 문제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에 있지 않고, 약속하시고 역사하시는 신실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보고 이 사실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D. 백성의 반역(14:1~10)
사건은 더 확산됩니다. 이들의 보고를 듣던 백성들이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두 개의 엇갈린 보고 중 어떤 보고를 받아들이고 반응할 것인가 입니다. 백성들은 다수의 보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다수의 견해가 옳다고 믿습니다. 다수의 견해에 속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다수의 견해를 받아들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온 회중은 소리를 높여 부르짖고 밤새 통곡했습니다(14:1).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원망하며 불평하는 내용은 무서운 내용입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14:2b~3).” 그들은 하나님을 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칼에 죽게 하고 처자를 다른 민족의 노예로 만들려고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멸하는 불신앙입니다. 백성들은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이 결정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안중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대적하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지휘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모세와 아론은 그 자리에 온 회중 앞에서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칼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폭도가 된 백성들에게 대항치 않고 그들 앞에서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표시로 엎드려 간구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보다 더한 어떤 것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경멸하는 말을 들었을 때, 모세와 아론에게는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14:6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은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것이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일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14:7b~9).”
회중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마음을 돌이켰습니까? 그들은 돌을 들어 그들을 치려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직접적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집단 폭력이 아니라 사법적 권위를 가진 행동이었는지 모릅니다. 돌로 치는 것은 중요한 종교적 범죄나(레 20:2,27; 24:23; 민 15:36; 신 13:10) 가족 안에서의 심각한 언약 위반의 경우에(신 21:21; 22:21,24) 취해지는 사법적 행동이었습니다. 만일, 이 경우가 집단 폭력이 아니라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자기들에게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자기들을 향하여 거짓 증거를 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대반역이 절정에 치닫는 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온 회중 앞에 나타내심으로써 개입하셨습니다.
3. 적용적 교훈: 두려움이라는 우상
우리가 이 말씀을 적용하는 차원에서 생각할 것은 두려움이라는 요소입니다. 무엇이 이 열 명의 정탐군들로 하여금 이런 불신앙적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습니까? 또 무엇이 이 백성들로 하여금 밤새 울며 부르짖게 만들었고, 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결정을 하게 만들었습니까?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정탐군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봤을 때,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이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곳에 사는 거민, 신장이 장대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13:32~33). 이들의 말입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13:31).” 그들은 스스로도 가나안의 아낙 자손 앞에서 메뚜기처럼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은 열 명의 정탐군들이 서명한 다수 보고를 믿었습니다. 그 보고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들에게도 동일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래서 밤새 울고 부르짖었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지도자들에 대한 원망이었고, 애굽에서 괜히 나왔으며 애굽이나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도리어 좋았겠다는 후회 가득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본문은 두려움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두려움은 눈 앞에 보이는 인간 지도자들인 모세와 아론을 향한 원망을 가져왔고 이 두려움은 자신들이 믿음으로 걸어온 여정에 대한 후회를 동반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 전부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까? 두려움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이성을 마비시키고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왜곡시키는 비합리를 가져옵니다. 14:3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지금까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경험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들이 하는 말들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말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 홍해를 가르고 건넌 일,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일,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신 일,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일…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들을 보호하셨고 인도하셨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이처럼 왜곡하여 말할 수 있습니까? 칼에 죽게 하시려고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다니요? 두려움은 우리 안에 악한 결과,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게 함으로써 이성을 마비시켜 온전한 이성적 추론 조차 할 수 없는 어리석음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눈 앞에 보이고 펼쳐지는 어떤 것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것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까? 두려움이 우리 안에서 신앙을 질식시키는 방식은 우리 안에 있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려움이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과 목적을 뒤집는, 하나님과 정반대의 방향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합니다. 그것이 이들이 내린 결정입니다.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14:4).”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많은 이적을 본” 자들이었습니다(14:11).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 누구보다, 그 어떤 세대 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보고 경험한 세대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게 만든 것입니까? 두려움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왔음에도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지는 어떤 것 때문에 한 순간에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 때,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사람에 대한 원망과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완전히 뒤집는 결정을 내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경고입니다. 열 정탐군들과 그들의 보고를 믿은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을 불신할 뿐 아니라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정확히 말했습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게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14:9).” 두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신앙의 요소들을 질식시켜 버리는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십니까? 여러분을 지금 두렵게 만드는 요소는 없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그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외면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사로잡고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것이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열정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두려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많은 열정과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물질과 더 많은 노력을 두려워하는 그것에 쏟고 살게 만들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 영혼을 쉬게 하지 않습니다. 내 눈 앞에서 본 그 대상이 여전히 있는 한 말입니다.
두려움을 가진 채,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렙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14:24).’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이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온전히 따른다는 말은 나뉘지 않은 마음,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 마음을 나눕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를 갈래 갈래 찢어 놓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 눈 앞에 있는 어떤 대상이나 현실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대상이나 현실이 사라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려움을 제거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두려움에 대한 책임이 이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려움을 제거해주시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동일한 조건과 동일한 상황에서 열 명의 정탐군들이 보였던 두려움을, 갈렙과 여호수아는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도 아낙 자손을 보았고, 그들도 철옹성 같은 가나안의 요새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현실적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을 부인하고 현실을 회피하는 초현실주의가 아닙니다. 신앙은 그러나 그 두려움의 대상을 넘어 한 가지를 더 보게 합니다. 그것이 14:9입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를 두렵게 하는 대상의 배후, 그리고 그들보다 현저히 약한 우리의 배후를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아무도 없고(그들의 신들은 다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우상들만이 있을 뿐이고) 우리의 뒤에는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평생 우리 앞에 있던 대적이 사라지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현실의 문제가 사라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지 모릅니다. 하나가 사라지면 또 다른 하나가 일어나 나를 위협하고 두렵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려운 현실을 우리 앞에서 보란 듯이 제거하심으로써 우리의 두려움을 해결해주시는 대신, 그 앞에서 우리 눈을 크게 떠서 하나님을 보게 하심으로써 두려움을 제거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길러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눈을 뜨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방식에 익숙해 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현실 앞에서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믿음으로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고 가는 힘이 두려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두려움이 이끌고 가는 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이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대적하는 길이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이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설령, 여러분의 인생 안에서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일지라도, 여러분의 계산으로 절대 풀릴 수 없는 문제일지라도, 그 두려움이 여러분의 인생을 끌고 가서, 여러분의 열정과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헛된 일에 쏟게 만들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길은 오직 하나,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그 두려운 현실 앞에서 매일 매일 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라는 불신의 정체를 여러분 안에서 발견하셨다면, 회개하십시오. 그 두려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 삶, 자기 가족의 삶, 자기 것을 붙잡는 이기적 삶에서 벗어나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두려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모든 에너지를 원망하는 일에 쓰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두려움이 다른 사람들 마저 믿음으로 살지 못하도록 부추겨왔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그 두려움이 정작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대신 섬기는 우상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우상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온전히 따르는 길이 아닙니다.
두려움이라는 우상을 언제나 경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복된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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