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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예배 - 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신앙,기쁨,예배,영광

요한계시록 5:11-14, 시편 16: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5-10

말씀내용
요한계시록의 하늘 보좌 환상 본문인 4-5장을 마무리하면서, 예배와 영광이라는 주제를 한 번 정리하는 것이 교우 여러분에게 유익하겠다고 생각하여 오늘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설교 제목은 “신앙, 기쁨, 예배, 영광” 네 개의 단어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네 단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개념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네 단어가 왜 기독교의 핵심 개념들인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네 단어를 들을 때, 여러분에게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네 단어의 맥락을 생각해보는 것은 설교를 듣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늘의 천사들과 우주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이야 지금도 이미 하나님과 어린 양께 찬송을 드리고 있겠지만, 우주의 모든 피조물이 다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송하는 날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시점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본문은 예배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어떤 강제적 요소나 억지로 하는 의무감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는 무엇입니까?


1. 의무와 기쁨 사이에서
여러분 중에 예배를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는 분이 계십니까? 반대로, 어느 정도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분은 계십니까? 이 둘은 상당히 다른 것이지만, 그 대답은 여러분의 신앙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일 아침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은 의무감과 기쁨 사이의 어느 한 지점에서 매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려 왔을지 모르지만, 이 질문은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피해갈 수 없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우리는 천사들이 서 있는 그 보좌 앞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예배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의무감과 기쁨 사이의 어느 한 지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날 우리가 분주한 일들이 많아서, 그 영광스러운 예배의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매주일 우리의 예배가 그날의 예배의 연장선에 있게 될 것을 안다면, 우리는 오늘 드리는 예배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날의 예배와 오늘의 예배는 본질상 차이가 없습니다.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은 그날 거기에도 계시겠지만, 오늘 여기서 우리의 예배도 동일하게 받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2.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신앙
오늘 네 단어 중 첫번째는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신앙은 관계로 설명됩니다. 신앙의 주체와 신앙의 대상이 맺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인격적입니다. 일반적인 종교에는 이런 인격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격적 관계라고 할 때, 그것은 마치 부부, 부모와 자녀, 친구의 관계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상명하복(上命下服) 질서의 군대에서 상관과 부하의 관계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한히 존귀하신 하나님은 미천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인격적인 관계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 관계는 서로를 알아감으로써, 더 깊은 친밀함과 사랑을 누리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감탄하고 놀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신앙은 정체불명의 신앙입니다.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참되고 온전한 지식이 아닙니다.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그 사랑 또한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 신뢰의 관계이기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지식에 근거한 사랑을 전제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신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관련되고, 신앙 뒤의 세 단어, 기쁨, 예배, 영광도 순차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관련됩니다. 즉, 이 지식과 사랑에, 우리의 신앙과 기쁨과 예배와 영광이 좌우됩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 뿌리박은 강한 애정이 성경적 예배의 뼈와 골수다.”(존 파이퍼, 『하나님을 기뻐하라』(생명의말씀사, 2020. 3판1쇄), p.110).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의 신앙과 예배를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정체불명의 신앙이 되지 않으려면, 여러분의 영적 삶에 진보가 없다면, 이 지식과 사랑에 문제가 있는지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3. 신앙이 만들어내는 변화
하나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로서의 참된 믿음은 믿는 자 안에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믿는 자 안에서 아무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신앙이라면, 어떻게 그 신앙의 참됨 여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만들어내는 변화는 무엇보다, 내적 변화입니다. 거듭난 신자 안에는 새로운 정서, 신앙 감정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 하나님께 대한 애정과 같은 감정입니다. 믿는 자 안에서 성령님은 “기뻐하고(빌 4:4), 소망하고(시 42:5), 두려워하고(눅 12:5), 평강을 갖고(골 3:15), 열심을 품고(롬 12:11), 울고(롬 12:15), 사모하고(벧전 2:2), 불쌍히 여기고(엡 4:32), 슬퍼하고 애통하는(약 4:9)” 마음을 일으키십니다(존 파이퍼, 위의책, p.122). 이 감정은 신앙에서 매우 본질적인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에서 ‘기쁨’은 하나의 감정, 신앙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감정은 신앙이 만들어내는 변화이고 더 정확하게는 성령님께서 믿는 자 안에서 만들어내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생기는 감정이거나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입니다. 이것은 직감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예배가 이 감정과 깊이 관련됩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께서 성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를 취하셨을 때, 즉각적으로 그리고 일제히 경배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존 파이퍼는 예배에서 이런 신앙 감정이 중요한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무 느낌이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다…하나님을 향한 감정이 목적 자체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진정한 예배가 된다.”(존 파이퍼, 위의 책, pp.122,125).


4. 기쁨
신앙이 믿는 자의 내면에서 만들어내는 감정 중에서도 신앙과 예배의 본질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이라는 감정입니다. 신앙이 인격적 관계라고 할 때, 신앙의 인격적 대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거기에는 그 대상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진 존재를 향해서 가지게 되는 무서움 때문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이 기뻐하고 행복하도록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천지창조의 기사와 에덴에서의 삶, 그리고 요한계시록 21-22장이 보여주는 새예루살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뻐하지 않는 인격적 대상을 영광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성경의 가르침을 압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역사적 문서가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1문답입니다. “(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제일 되는 목적’이란 존재의 목적을 의미합니다. 인간 존재의 목적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신앙의 습관과 관련해서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할머니로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말씀을 종종 들으면서 컸습니다. 그 일은 어린 제게 무척이나 힘든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제가 원하는 일들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저의 기호와 하나님의 기호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까다로운 선생님의 기분을 맞춰드려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저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이 의미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please)는 것은 대상의 기쁨을 전제로 하지만, 누군가를 즐거워한다(enjoy)는 것은 대상이 아닌 주체의 기쁨을 전제로 합니다. 소요리문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말하는 대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인간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이 서로 묶여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하나님 때문에 즐겁고 행복해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그런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기뻐했고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고 모든 것이 되셨기에, 그들은 염려가 없이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 일 동안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먼저 만드신 후에, 인간을 마지막에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외로워 할 것을 먼저 아신 하나님은 구하지도 않은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염려하거나 고통스러운 수고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범죄하기 전의 인간에게 노동은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동산의 이름을 ‘에덴’이라고 지으셨는데, 그것은 기쁨, 환희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선한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았던 아담과 하와의 가슴에는 언제나 감사가 가득했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아담과 하와는 즐거워했고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기쁨이라는 정서가 배제된 예배는 참 예배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쁨의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1문답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의무감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마치 아내에게 선물을 주는 남편이 의무라서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 사이의 관계를 존 파이퍼는 이렇게 멋진 말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크게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When we are most satisfied in God, God is most glorified in us.)” 이 일이 가장 크게 일어나는 자리는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자리입니다. 하지만, 죄는 이 모든 것을 다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5. 타락—사람은 자기가 기뻐하는 것만을 예배한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고, 인간은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최고로 만족할 수 되도록 지어졌습니다.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기뻐하는 대상,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자리를 우상으로 채우게 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했고,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 천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인간의 그 깊은 욕망을 완전히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존재는 없는데 말입니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A. Smith)가 『습관이 영성이다』(비아토르, 2018)에서 소개한 이야기가 타락한 인간의 왜곡된 예배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쇼핑몰을 현대인의 성소, 예배당이라고 말합니다. 쇼핑몰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쇼핑몰의 화려하고 큰 정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구도자들을 위한 대형 지도가 나오고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주보(예배순서지)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익숙한 신도들은 그곳을 빠르게 지나쳐 이미 친숙한 내부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는 시간의 흐름도 인식하지 못한 채 의식에 몰입하게 됩니다. 종종 쇼핑몰은 휴일과 축제를 열어 더 많은 신도들을 모으고, 기존의 신도들에게 더 큰 기쁨으로 제공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이라는 힘을 지닌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기쁨의 성향에 맞추어 만들어진 각 예배실을 지나다 보면, 들어와서 제대로 예배를 드리라고, 직접 맛을 보라고 친절하게 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찾는 기쁨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선반을 샅샅이 뒤지던 중 기쁨과 만족을 줄 경험과 제물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온 신도들은 어디서 자기의 기쁨을 누릴지 알기에 바로 그 예배실로 들어가 선반에서 제물을 바로 취하기도 합니다. 선반에서 제물을 발견한 사람들은 예배의 절정에 해당하는 제단으로 나아갑니다. 거기에는 제사장이 서 있습니다. 거기서 돈으로 봉헌을 하고 나면, 제사장은 축복을 하며 우리를 보내줍니다. 예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또 다른 예배실로 향합니다. 2부와 3부 예배는 계속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본래 자기가 기뻐하는 대상, 사랑하는 대상을 예배합니다. 범죄하기 전에 그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자기들이 사랑하는 것, 자기들이 기뻐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물질 만능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쇼핑몰은 거의 모든 영혼의 예배의 장소가 됩니다.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꾸준히 만족과 기쁨을 얻기 위해 그 ‘예배당’으로 나아갑니다.
C.S.루이스는 1949년 <영광의 무게>라는 글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한한 기쁨을 준다고 해도 우리는 술과 섹스와 야망에만 집착하는 냉담한 피조물들입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자고 말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상상하지 못해서 그저 빈민가 한구석에서 진흙 파이나 만들며 놀고 싶어하는 철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합니다.” (C.S.루이스, 『영광의 무게』(홍성사, 2008), p.12).
사람은 자기가 기뻐하는 것,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은 결코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면, 결코 채움 받을 수 없는 욕망을 가진 범죄한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6. 구속—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존재로의 회복
범죄한 인간의 딜레마는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을 배제한 채, 기쁨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이 가진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게 해주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셔서(고후 5:21) 십자가에서 우리 죄에 대한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해 주셨습니다(갈 3:13).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로움도 얻을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주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심으로써 믿는 우리에게 그 의를 거저 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사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미치게 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안에 다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새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신자 안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입니다. 절대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자들이 기쁨의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들의 목사로 불리는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도의 안식과 분깃이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육적인 생각이 영적인 생각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땅에 속한 마음이 하늘에 속한 마음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 삶의 과업이 되게 하소서.” 이것이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배자가 누리는 기쁨이 여러분 안에 충만해 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 기쁨이 없는 예배자의 갈망과 한숨도 귀하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언제 여러분은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실패한 예배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정말 영혼의 만족과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께 충만한 기쁨으로 나아와 예배할 수 있습니다. 큰 은혜입니다. 언제나 그럴 수 있기를, 그런 일이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천사들은 언제나 이런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도 영화로운 구원을 얻은 뒤에는 영원히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가 죄와 완전히 결별할 수 없기에, 이런 충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하는 기쁨이 없을 때, 우리는 갈망과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언젠가 맛본 그 하늘의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하고도 깊은 갈망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참된 예배자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으로 인한 충만한 기쁨이 없다면, 여러분은 이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갈망 조차 품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때로는 우리 영혼이 이런 갈망 조차 갖지 못할 만큼 지독한 영적 광야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깊은 한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물어서 쩍쩍 갈라지는 광야 같은 내 영혼을 은혜로 적시고 만지셔서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주님, 제 영혼의 광야가 오늘로써 끝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구하는 갈망 조차 없는 자기 영혼을 아파하며 한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있는 이 한숨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지난 몇 달을 돌아보십시오. 또는 지난 해들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예배자입니까? 어떤 예배자로 살아왔습니까?


8. 신앙, 기쁨, 예배, 영광의 예배자로 살기를! (시 16:11)
신앙은 하나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가장 만족스럽게 즐겁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한 예배를 받으실 때,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제시한, ‘신앙, 기쁨, 예배, 영광’의 핵심 내용입니다. 언젠가 천상의 모든 천사들과 함께, 그리고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충만한 기쁨과 감격에서 터져 나오는 찬송으로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예배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날을 기대합시다.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우리가 드리는 평생의 예배에서 이런 기쁨의 고백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복된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