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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예배 - 시편강해 - (50). 참된 예배

시편 50:1-23, 베드로전서 4:1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11-13

말씀내용
대부분의 시편이 기도인 것을 생각하면 시편 50편은 좀 독특합니다. 마치 선지자들의 통렬한 정죄 선언처럼 들리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표제가 [아삽의 시]라고 되어있는데, 아삽은 다윗이 임명한 성전 찬양대의 지휘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대상 6:31-48). 이 표제를 가진 시편은 모두 열 두 편으로, 나머지 열 한 편은 73-83편입니다.
시편 50편은 한 장의 기소장 혹은 판결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의 분위기는 판사가 법정에 입장하여 증인들을 부르고, 피고인을 세워 재판을 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강림하셔서 증인과 피고인을 소환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개의 죄목을 지적하시는데, 첫째는 피고인 이스라엘 백성의 형식적 예배이고 둘째는 그들의 위선적 삶입니다. 형식적 예배를 지적하는 것이 7-15절이고 16-23절이 위선적 삶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예배와 삶을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한 부분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소환장(1-6)
이 시편은 시작이 장엄합니다.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라고 시작하지요? 히브리어로는 이렇습니다. “엘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가 3개가 연이어 사용된 것입니다. 엘은 일반적으로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가장 높은 신을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을 드러내는 표현이고,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구속주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고의 신이신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한 하나님,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사”라고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발성하는 것 조차 두려워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3중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매우 장엄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분이 바로 심판하러 시온산에 강림하시는(2) 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6). 그가 말씀으로, 해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소환하십니다. ‘세상’은 4절에서는 ‘위 하늘과 아래 땅’이라고 표현되는 바,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즉 하늘과 땅을 이 재판정의 증인으로 소환하고 계신 것입니다. 온 하늘과 땅이 인간들이 행한 모든 죄악을 보았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이 모든 세상 앞에서 자기의 죄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 하늘과 땅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에 이성을 가진 모든 존재 즉, 천사와 모든 인간을 소환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 심판주이시기에 능히 이렇게 행할 수 있으십니다. 이 장면은 마치 최후의 심판날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2-3절은 심판장 하나님의 강림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불 그리고 광풍으로 강림하십니다. 빛과 불과 광풍은 모두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를 보여주는 상징들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검은 구름, 천둥, 번개, 광풍의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빛은 죄를 드러내고 불은 죄인들을 정결케 하는 기능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불은 삼키는 불입니다. 이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의 현현, 장엄하고 놀랍게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잘 보여줍니다. 이제, 재판장이 임하셨고, 증인들이 소환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피고를 소환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피고가 누구입니까? ‘나의 성도들’이고,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입니다. 여기 성도들이라는 표현은 ‘하시드’라는 히브리말인데 경건한 자들, 하나님과의 언약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신앙고백과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요, 그리스도인들이요, 성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이제 재판정이 열리기 직전입니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6).”공의로운 심판장이 좌정하십니다.


2. 첫번째 정죄—형식적 예배(7-15)
이제 심판장의 첫번째 판결문이 낭독됩니다. 7-15절인데, 여기서 지적되는 죄목은 형식적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7)”라는 재판장의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말씀하시는 분, 판결하시는 분은 ‘엘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이 말씀하실 때, 숨을 죽이고 들을 뿐입니다. 그 말씀 앞에서 누구도 반박하거나 변명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은 그들의 제사였지만, 하나님은 8절에서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8).”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리지 않았거나, 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제사를 드렸고 제물도 가지고 왔습니다. 형식으로만 보고 외양으로 보면 꾸짖을 것이 없습니다. 율법의 조문으로는 틀린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내밀한 죄목을 찾아 드러내십니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제사를 드렸고 제물도 가져 왔으나, 그 제사와 제물은 공허한 형식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와 예물을 드릴 때,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제사와 예물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착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제사와 제물에 대한 매우 이교도적인 이해였습니다. 당시 이방 종교들은 신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제사와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들의 화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 신들이 축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바쳐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방 종교에서 드리는 제사와 제물은 일종의 뇌물인 셈입니다. 뇌물은 받는 자의 기분을 만족시켜 주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들의 제사와 제물이 하나님의 기분을 맞춰드리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마치 제삿상을 대단하게 차려놓고 하나님이 드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외면적으로 그들은 훌륭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드린 제사와 제물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꼬박 드렸고 제물도 가져왔지만, 이유가 틀렸고 마음이 바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적용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네 헌금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 않겠다. 그러나 문제는 네가 내게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네 헌상에는 감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 일에서 얼마나 자유로우십니까? 내가 드린 헌금으로 교회가 운영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드린 헌금으로 하나님이 일하시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드린 헌금으로 이것 저것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마음, 생각들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받는 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왔으며 주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책망하십니다. 9절입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 말씀은 비꼬는 투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마 이렇게 떠버리면서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내 집에서 수소를, 내 우리에서 숫염소를 제물로 가져다 드렸지!”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부심, 자기의를 드러내는 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쓰는 말,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 게 필요없으시다는 말씀이지요.

10-12절은 자기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떠버리는 자들을 향한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이 수사적 질문은 부정적 대답을 암시합니다. 너희가 가져오는 제물의 고기로 내가 배부르거나, 그 제물의 피를 내가 마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모든 방식은 다 이교도들로부터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그런 우상 신들처럼 여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독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이방 신들 중 하나처럼 생각했다면, 그들은 사실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제사와 제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켜드려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얄팍한 종교적 방식은 결국 신을 이용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며,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닙니다. 여기에 번영신학의 위험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14절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제사는, 예배는 믿음을 드러내는 수단이고 방편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라는 말씀은 그 믿음이 감사로써 표현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시대에 감사의 제사는 화목제와 함께, 공중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거나 찬양하는 성전 예배 행위의 하나였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은, 오늘날 십일조와 주정헌금 등 기본적인 헌금 외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 응답하신 축복에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헌금 같은 성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4절 하반절에는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는 것에 종속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은 싸구려 흥정이 아닙니다. 서원을 갚으라는 것은, ‘간구—응답—감사’의 사이클을 잘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간구—응답—감사’의 사이클이 잘 작동하고 있습니까? 혹시 ‘간구—응답’의 사이클만 있지는 않습니까? 본문은 ‘감사의 제사’를 참된 예배의 특징적 요소라고 가르칩니다. 23절도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매주일 드리는 예배가 형식이 아닌 살아있는 믿음에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본문은 참된 예배는 감사의 제사라고 말씀합니다. 스펄전은 형식적 예배를 고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영혼이 내게 사랑과 감사를 표현할 때에만 내가 너희의 제물을 받아 들일 것이다. 기억하여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함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감정이 제물의 본질이요 의미이자 정수라는 것을.”

15절은 잘 알려진 구절이지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 말씀도 우리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간구—응답—감사의 제사’라는 패턴이 여기 다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패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5절 말씀은 신자에게 환난 날이 있고 그런 날이 찾아온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날에 간구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과 간구에 응답하사 그를 건지십니다. 그리고 그는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간구—응답—감사의 제사’의 패턴이 여러분의 삶에서 익숙하게 나타나게 하십시오.


3. 두번째 정죄—위선적 삶(16-23)
이제 우리는 세번째 단락인 16-23절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그들의 위선적 삶을 고발하십니다. 첫번째 고발과 두번째 고발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관계는 순서와 함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무너지면, 삶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형식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위선자가 되지 않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참된 예배를 드린다면 그는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 영광을 보는 사람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식적 예배가 지속되면 그 인격은 점점 나빠지고 위선적이 되어가게 됩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삶이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가인입니다. 그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생을 죽일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죽이게 됩니다. 이 모든 악이 어디서 먼저 시작되었습니까? 그것은 가인의 예배, 형식적인 예배, 믿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삶이 무너집니다.

십계명도 동일한 패턴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사람에 대한 의무가 나옵니다. 여기서도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계명도 하나님 사랑이 우선되고 이웃 사랑이 따라 나옵니다.

자, 하나님의 판결문을 계속 보십시오. 16절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악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5절에서 ‘나의 성도들’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들 중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악인은 ‘성도들’과 반의어로, ‘경건치 않은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정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반절에 보면, 그 악인들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입에 둔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선지자일 수도 있고, 요즘 식으로 목사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고백, 그들의 예배 참여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말할 수 있고 어쩌면 설교를 아주 뛰어나게 잘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상 죄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그들은 비록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가르치지만, 실상은 그 교훈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등 뒤로 던져버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위선자들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18-20절은 십계명에 비추어 그들의 악행을 더 구체적으로 고발합니다.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여기에는 십계명의 7,8,9계명이 언급됩니다.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의 죄입니다. 도둑과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이 친구입니다. 그리고 입을 악에게 내어주고 혀로는 거짓을 꾸밉니다. 여기 ‘꾸민다’는 말은 그 뜻이 ‘짜깁기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거짓으로 거미줄을 친다, 그물망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사로잡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한다”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거짓 증거로 사람을 죽입니다. 형제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들이 이토록 담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당장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을 보지요.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이 일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같은 줄로 여겼습니다. 부모들이 벌을 준다고 하고는 그냥 지나치는 경우들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지적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허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당신의 오래 참으심과 은혜를 드러내시는 것인데 말입니다(롬 2:4; 9:22).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때가 차면, 그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죄악들을 그들의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실 것입니다.

22절에서 다시 하나님은 그들을 혹독하게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아,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도, 그리스도인을 부르는 말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그들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매주일 예배를 드리는데도 말입니다. 매주일 설교를 하는 목사인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맹수에게 찢기는 작은 동물처럼 찢겨 멸망 당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예배 공동체에서 위선자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침내 모든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제 결론처럼 보이는 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구절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14절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입니다. 감사의 제사만이 형식적 예배와 위선적 삶을 치료하는 명약입니다. 두번째는,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한다면, 위선적 살을 뜯어고쳐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을 베푸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행칭의를 말씀하는게 아닙니다. 참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가 끝까지 믿음의 순종이라는 행위를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4. 참된 예배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은 참된 예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인 시편 50편은 참된 제사, 참된 예배는 감사의 제사, 감사의 예배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신앙이 표현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 없는 주일 성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감사 없는 거액의 헌금이 아닙니다. 예배가 형식화되고 삶이 위선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런 유혹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 문앞에서 백성들에게 전했던 설교를 생각하게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렘 7:3-7).”
우리는 괜찮습니까? 여러분의 예배는, 여러분의 헌상은 괜찮습니까? 여러분의 예배와 여러분의 헌상에는 감사가 있습니까? 감사가 충만합니까? 의식적으로 기억하십시오. 예배에서 감사가 빠지면, 그것이 형식적 예배가 되고 그 형식적 예배가 위선적 삶을 낳는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삶에, 우리 가슴에 감사가 있다면,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의 헌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감사의 예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요 4:23)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올 때마다, 오늘 본문의 처음과 끝을 기억하십시오. “엘 엘로힘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옵니다. 여러분이 성경으로부터 배운 모든 교리와 지식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합당하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명예가 아니라, 쾌락과 즐거움이 아니라, 그 하나님만을 경배할 것입니다. 그분을 안다면, 우리의 나라, 소유물, 자녀, 아무 것도 경배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할 것입니다. 우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것,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참된 예배자가 되는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도 기억하고 생각하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감사의 예배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