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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언약 - 언약과 세례, 그리고 자녀 양육 (단편설교)

창세기 17:7-14, 사도행전 2:38-39, 창세기 18: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7-14

말씀내용
기독교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물론 이것을 알려주는 여러 현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유아세례식에 앞서, 성례와 관련하여 이 현상을 살펴보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례가 형식적으로 베풀어 지기 시작하고, 성례를 받는 사람들이 성례를 통하여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 안에서, 또는 그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이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 이 성례가 의미 없는 형식이 되어가는 현상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물론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그 한 가지 이유는 그 성경적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 교회역사에서 얻는 교훈
미국이 독립하기 전인 17세기 후반 뉴잉글랜드 지방의 교회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것이 1620년이었습니다. 그 1세대들이 가졌던 신앙적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약 40년이 지나는 동안 한 세대를 지나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서, 그런 신앙적 열정이 자녀들의 세대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았던 그들의 자녀 세대 중에서는 여전히 교회 출석은 하고 있었지만 확실한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하는 성인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자,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성인이 되어 신앙고백을 스스로 하지 않은 채 교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신자로 볼 것인가, 불신자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았습니다. 또 이들이 결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배를 참여했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들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또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1661년 교회의 논의는 이런 결정에 이르게 됩니다. 부모의 신앙고백에 의해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회심의 증거를 보이지 않으며 확실한 신앙고백도 하지 않고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찬을 금하고 교회의 주요회의에서 의결권을 주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자녀들에게는 유아세례를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실 애매한 결정이었는데, 그래서 중도언약(half-way covenant)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약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704년 경,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는 중도 언약에 해당하는 교인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던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는 성찬이 이들에게 회심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런 주장(스토다드주의)을 하게 되었는데, 슬프게도 그 결정은 회심하지 않은 다수의 교인들이 교회의 멤버십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2. 자녀들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
이런 과거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 교훈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도 이제는 기독교 신앙의 5대와 6대를 볼만큼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 선교 초기에 처음 복음을 들었던 분들의 희생과 헌신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또 일제와 공산 치하를 겪으면서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도 듣습니다. 하지만, 오늘 21세기 한국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적어도 3세대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우리의 신앙은 새로운 헌신과 은혜를 드러내는지, 아니면 명목상의 신자,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1세대인 여러분은 어떻게 신앙을 지켜왔고 여러분의 자녀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 오셨습니까? 그리고 지금 2세대인 여러분은 부모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고백을 하는지요? 그 주님을 신뢰하고 날마다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17세기 신대륙에서 그랬듯이,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를 나오고 있지만 주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3세대에 해당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며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서 근심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려는 의도로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소 불편할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갈 수 없는 우리 영혼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저는 이런 질문들을 여러분에게 던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영혼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저주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바이지만, 부모의 믿음이 훌륭하다고 해서 반드시 자식의 믿음이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신앙은 오직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나 의무를 면제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녀를 낳아서 기르면서, 거의 처음으로 자기를 온전히 희생할 수 있는 존재를 경험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와 어떤 희생이라도 달게 감당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 사랑도 유난해서 어려서부터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또 운동과 예능, 모든 분야를 오가며 자식을 잘 기르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부모라면, 자녀의 잘 됨은 내 아이의 신앙 여부에 달려 있으며, 내 아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압니다. 거듭난 부모는 내 아이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의 거듭남과 회심을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거듭나게 하심(벧전 1:23; 약 1:18)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난다는 것(롬 10:17)을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려주고 가르칠 것입니다.


3. 우리를 평안하게 하는 하나님의 언약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부모로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전부일까요? 그리고 나서 우리 자녀들이 믿고 믿지 않고는 그저 그들의 운명에 맡기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언약의 관계를 맺으사 당신의 구원 약속을 지키실 것을 확증하심으로써 우리의 불안한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굳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할 수 있는 성경의 개념들이 여럿 있지만, 단연 그 중에서도 ‘언약’이라는 개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심으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확인을 해볼까요? 요한계시록 21:7을 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마다 반복적으로 주셨던 약속이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구약 시대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새언약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거기서도 동일한 언급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언급하시면서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
특별히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너와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그리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언약이 단지 너하고만 맺는 언약이 아니라, 네 후손과도 맺는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의 하나님도 되시겠다고 친히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은혜로운 약속입니까? 이 약속이 우리의 현실에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믿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장래—저들의 신앙을 놓고 염려합니다. 한 예가 생각납니다. 한 권사님이 성인이 되어 교회와 신앙을 떠난 아들 때문에 염려하며 평생 기도하시다가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곁에 있는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아들아, 내 마지막 부탁이다. 제발 교회로 돌아가 예수님을 믿어라.” 어머니는 아들이 교회를 다시 나갈지, 신앙을 가지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죽음을 앞둔 어머니는 이후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모르지만, 이 약속을 주신 자비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평안하게 주님께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믿는 부모의 자녀들이 누리는 혜택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모든 자녀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들 중 얼마를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시 22:30-31; 45:16-17; 78:5-7; 145:4). 물론 불신자의 자녀들에게도 구원을 주시지만, 그것이 신자의 자녀들처럼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믿는 부모 아래서 태어난 자녀들은 부모의 기도를 힘입어 살고,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며, 참된 신앙이 어떤 것인지 가장 가까이서 보고 배우고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인인 부모 아래서 성장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람이 신실한 믿음을 가진 부모 아래서 양육된다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믿음을 가진 부모들도 다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합니다.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믿는 부모를 가진 자녀들은 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자비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부모들은 비록 자녀들의 장래를 알지 못할지라도 그 언약을 믿고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언약의 표(sign), 할례와 세례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으실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연약한 믿음을 굳게 해주기 위해서 언약의 표로 할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0-11).”
그런데 12~13절에 보면, 이 할례는 모든 성인 남성들에게는 물론이요, 태어난지 8일된 모든 남자 아이들도 다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직 자기 입술로 하나님을 고백할 수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도 할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신 것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을 확증해주시는 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 자식들에게도 언약의 표인 할례를 주는 것은, 그들이 구원의 은혜를 얻는 것은, 그들의 결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롭고 은혜로운 언약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참된 할례는 선지자들이 말한 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였습니다(신 10:16; 30:6; 렘 4:4; 9:26; 겔 44:7,9).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도 육체의 할례 자체로만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확인을 하는 잘못을 범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언제라도 모든 인간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이 저들의 인생에서 그런 헛된 자부심과 거짓 확신을 주는 도구가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그 신분과 정체성에 합당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할례라는 언약의 표는 성인은 물론이고 그 자녀들도 다 받아야 했습니다. 후손들도 부모들의 신앙 아래서 하나님의 언약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로 오게 되면, 그대로 세례를 통해서 이어집니다. 신약 교회에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면서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믿음 외에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며 거짓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갈 1:6~9). 또 주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믿음의 표로 할례가 아니라 세례를 제정하셨습니다(마 28:18~20). 세례는 이런 의미에서 구약시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표인 할례와 상응하는 역할을 하는 언약의 표가 됩니다.
그리고 할례가 유아들에게 베풀어졌듯이, 세례 또한 신앙을 스스로 고백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도 그들 부모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베풀어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너와 네 후손과’ 맺어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에 사도 베드로는 설교 중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8-39).”
하나님의 언약을 베드로가 기억했기에, 여기서도 ‘너희와 너희 자녀와’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의 생각처럼, 믿는 부모에게서 난 자녀는 거듭났다고 가정하고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아세례를 받은 우리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 언약 백성으로 보고 양육해야 합니다. 비록 아직은 스스로 신앙을 고백할 수 없지만, 부모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은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스스로가 하나님의 언약의 혜택을 받아 누리는 언약 백성이며 언약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뒤에, 18장 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하나님은 언약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를 지키고 의와 공도를 행하는 백성이 되도록 그 후손과도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하나님의 언약에는 믿는 부모의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5. 세례받은 언약의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하라.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에게 베푸는 유아 세례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스스로 신앙을 고백할 나이에 이를 때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부모들은 믿음으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할 책임이 부과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자녀 양육은 모든 믿는 부모들에게 부과된 엄숙한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듯이 우리가 자녀를 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 모두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기르다 보면 좌절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때마다 믿는 부모들이 기억해야할 것은, 지금 눈 앞에 벌어지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을 주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선하신 성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라고 말씀했고(히 10:26) 바울 사도는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살전 5:24). 하나님의 언약은 “너와 네 후손에게” 맺어진 것입니다. 언약은 기본적으로 쌍방의 협력으로 유지된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으로 말미암은 실패를 넘어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의 실패를 책임지시고 당신의 언약을 실패하지 않고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의 대가를 그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죽게 하심으로써 치르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믿는 부모들은 어떻게 언약의 자녀를 바르게 믿음으로 양육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그분의 온전한 희생이 구원의 유일한 토대이자 근거임을 늘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최초의 복음전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부모들이 이 복음의 신앙을 날마다 고백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그 복음을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믿는 부모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복종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학교와 유치원의 규율과 세상의 법을 배우기 전에, 하나님의 법으로서의 십계명을 배워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 또한 부모의 삶이 하나님의 법 아래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헛된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자녀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주일학교에서 이것을 매주일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마는, 이 교리 교육은 누구보다도 부모의 몫이고 책임입니다. 교회는 이를 도울 수 있을 뿐입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의 도리를 전체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녀들의 거듭남과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위의 모든 일을 다 잘 감당했을지라도,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언약의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6.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그러므로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힘만으로는 우리의 자녀들을 행복하고 순종적인 자녀 곧 성경을 믿고 그리스도를 존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녀들로 양육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종종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좌절하는 자리에도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언약의 진실함과 그 언약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믿는 부모들은 언약의 자녀들을 기르면서, 언약의 자녀들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믿음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의 가정들을 세우시고, 믿음의 가정들을 통하여 주님의 교회를 온전하게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유아세례를 받는 자녀들과 부모들에게 복을 주셔서, 이 언약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벧샬롬교회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권속들이, 모든 가정들이 이런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