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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양심 - 신앙과 성숙 71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4) -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

베드로전서 3:13-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3-03

말씀내용
신자인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미워하기에, 주님께 속한 우리도 미워합니다(요 15:18~19). 우리는 이런 적대적인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서 살아야했던 유다 백성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이나 모르드개 그리고 에스더의 삶을 통해서 그 시대 그들의 삶의 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반대에 직면해야 했고, 복음이 로마제국 내의 이방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로마의 다신 숭배와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에 의해 조롱과 배척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 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갈 때, 신자들은 지혜롭게 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우리 식의 열심에 담아 살면서 이것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우리 식의 열심에 담는다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직장 생활에서 신우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는데, 이 열심이 과도하여 직장에서 자신이 맡은 업무에 지장이 초래될 만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우리 식의 열심에 담는 것입니다. 신우회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열심을 드러낼 때, 지혜로운 방식으로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신앙이 없는 배우자와 함께 살아갈 때도 지혜롭게 우리 신앙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불신 배우자의 동의나 인지가 없이 상당한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신앙을 자기 식의 열심에 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을 자기 식의 열심에 담는다는 말은 일방적으로 행해진다는 말입니다.

불신자가 신자들의 가치관, 태도, 행동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입니다.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달라도 너무 다르며(롬 8:5~6),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속한 일들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고전 2:12~14).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지혜롭게 사는 한 가지 방식은 보편적 토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불신자들이 이해할 수 없어.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식대로 그저 믿음으로 살아가자” 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많은 말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공통의 토대에서 모든 인간들과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불신자들과 똑같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과 동일하게 먹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영역이 있는데, 이것을 상식 혹은 교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무조건 믿음으로만 살면 된다’ 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물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보편적 토대 위에서 공유하는 가치를 드러내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 보편적 토대 중 하나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려고 하는 주제인 양심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다 양심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선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는 대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지 이제 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도 베드로의 권면의 의미 (롬 13:3~4; 마 5:10~12)
본문은 적대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세상에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합니다. 13절에서 선을 행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설로 이 주제를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 세워진 국가와 정부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포상을 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하는 권위를 행사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3장에서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3–4).”

기본적 정의가 일반 국가에 세워진 정부의 권위를 통해서 시행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모든 정의가 온전하게 시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불의를 보지 않고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뉴스 매체에는 이런 기사들이 넘쳐납니다. 사회의 약자들인 어린 자녀, 피고용인, 외국인, 소수자, 여인 등에게 가해를 하고도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나와 다시 그런 동일한 일을 저지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런 부조리와 혼돈에 맞서는 기독교적 힘과 방식은 어디서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언젠가 궁극적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데서 옵니다. 궁극적 정의의 시행을 믿을 때, 우리는 선을 행하고 고난을 받아도 계속 선을 행하는 일에 착념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 정의는 주님이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시행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모든 결과를 감당해야 합니다. 선을 행한다고 좋은 결과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13).” 선을 행하면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설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14절에서 사도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도리어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여러분,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15~16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겸손히 소망의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난을 초래하는 줄 알면서도 선을 행할 때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하는가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 사도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많은 권면 중에서, 16절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씀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특별하게 상고하려는 주제입니다.

2. "선한 양심을 가지라." (롬 2:14~15)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도는 여기서 “굳은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는 세상의 불신자들 속에서 살아가면서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권면하는 중입니다. 성도들은 불신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살아가고 있고 그들은 우리를 욕하고 비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을 행한다면, 결국 성도들을 욕하고 비방하던 불신자들은 자기들의 비방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선을 베풀기를 그치지 않으심으로써, 결국 악하고 냉담한 죄인의 마음을 녹이시고 부드럽게 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렘 32:39~41).
그런데 여기에 양심이 등장합니다. 양심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32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니, 드물게 사용된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보통 신자들은 이 양심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래서 “믿음만 지키면 되지 양심이 뭐 그리 중요한가?”하면서 양심을 가볍게 여기곤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신앙과 성품은 분리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오늘날 우리 한국 기독교가 심각하게 간과하였고 놓쳐온 결과, 기형적 기독교가 된 부분적 원인이기도 합니다.

왜 사도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만일, 사도가 단순히 교회라는 영역 안에서 말하고 있었다면, “굳은 믿음 혹은 순전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교회의 영역에서 믿음은 공통의 토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는 불신자들과 살아갈 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다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통의 토대가 필요하고 우리는 공통의 토대 위에서 거룩하고 영적인 가치를 말하고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공통의 토대 가운데 하나가 양심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기능으로, 어떤 것을 알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도덕적 이해와 판단을 하는 내적 기능입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양심이 있고, 우리는 양심에 토대를 두고 모든 인간과 거룩하고 영적이며 하늘에 속한 것들을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양심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율법인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고,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을지라도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함으로써 그들을 고발하고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우리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호소해야 하는 중요한 접촉점이 되기도 합니다. 이점에서 사도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했고 그 양심으로 선을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불신자들에게도 양심이 있으니, 결국 그들이 선한 양심으로 선을 행하는 신자들을 계속해서 욕하고 비난하게 되면, 결국 그들 스스로가 양심에 찔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사도 바울의 권면 (딤전 1:5,19; 3:9; 4:1~2)
우리가 여기서 성경이 양심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총 32회 사용된 양심이라는 단어는 바울 사도가 그의 서신에서 가장 많은 20회를 사용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특별히 디모데전서에서 양심이라는 말을 4번 사용했는데, 이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디모데전서 1:5에서 사도 바울은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마음, 양심, 믿음을 차례로 언급합니다. 사랑은 마음과 양심과 믿음에서 나온다고 말하면서, 이 사랑을 이루는 것이 교훈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19에서는 믿음과 양심을 같이 언급하는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믿음과 양심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양심을 버리면 믿음도 파선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디모데전서 3:9입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 말씀은 집사 직분의 자격에 대한 맥락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왜 집사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여야 합니까? 특별히 교회에서 집사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세상에서 받는 평가는 더욱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잘못된 행동과 삶으로 비난을 받는 사람이 교회에서 집사의 직분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것입니다. 한 구절을 더 보지요. 디모데전서 4:2입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여기서 바울 사도는 믿음에서 떠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묘사합니다(딤전 4:1). 믿음에서 떠난 이 사람들은 결국 양심이 화인 맞아 외식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사람의 믿음과 양심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믿음에서 떠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양심이 화인 맞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들을 통해,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양심에 대한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양심은 믿음과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있는데 양심이 없는 사람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그의 믿음을 의심해야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착한 양심’을 말합니다(딤전 1:5,19). 그리고 또 ‘깨끗한 양심’을 말합니다(딤전 3:9). 선하고 깨끗한 양심과 참된 믿음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양심에 털 난 신자’라는 말은 ‘뜨거운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들을 희생시키고 이용하면서 자기 길을 가는 것이 가능합니까?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신자는 참된 신자일 수 있습니까? 선하고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아니 신자란 선하고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렇다면 이 세상에 신자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얼마나 더 괜찮은 세상이 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신자들은 아무리 많은 권력과 재물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소위 갑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하고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위 세상에서 일반 시민들의 양심에 의해서 비난과 욕을 먹을만한 일을 습관적으로 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재계와 공무원 사회, 학계와 모든 사회 곳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날로 부패해가는 성질을 가진 더러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선하고 착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사는 참된 신자들은 선을 행함으로 비난을 받을지라도, 자신들의 선한 양심으로 말미암아 선한 행실을 그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이 우리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선한 양심에서 흘러나오는 선한 행실을 볼 때입니다.

4. 양심, 공통의 토대 (벧전 3:1~2; 2:12,15)
이와 같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살아갈 때,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의 토대가 양심입니다. 신자들은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에서 동성애는 죄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세상을 향해 말합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이렇게 외치지만, 세상은 “그래서? 뭐?”라고 대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경외하지 않으며, 성경은 그들에게 아무 권위도, 기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믿음의 언어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종종 일반 뉴스매체들에서 인터뷰를 하는 목사, 신자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터뷰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너무나 기독교의 언어, 믿음의 언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이런 언어는 늘 한국 기독교의 혹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선한 행실의 열매가 없는 현실에서 넌센스로 밖에 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의 이슈가 뉴스에서 다루어질 때마다 너무나 많은 댓글들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글들로 쏟아냅니다. 슬픈 현실은 그들의 비난에 대하여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면서도, 뭐라 변명을 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아닙니까? 우리는 신자들을 욕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비방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할만큼 선한 행실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저는 이 땅의 수많은 신실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행실을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적지 않은 교회와 성도들이 선한 양심으로 선한 행실을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믿는다고 하나, 그 믿음을 세상 속에서 선한 행실로 드러내지 않는 교회들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준엄한 주의 말씀 앞에서 우리 벧샬롬교회는 어떠한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 자신은 어떠합니까? 과연, 여러분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손해 보기를 기뻐하고 선한 행실로 여러분의 믿음을 드러내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내가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으로,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가볍게 행하는 거짓말이나, 법과 규정을 범하는 일들이 덮어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 여러분이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여러분의 불신 이웃들이 답해주어야 할 문제입니다.
신자인 우리가 만일, 우리들의 언어로 세상 속에서 소통하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이런 태도와 말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본질상 선한 양심과 선한 행위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신자들이 세상에서 불신자들 속에서 그들을 대하며 살아갈 때,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반드시 그 열매로서 양심과 선한 행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사도 베드로는 같은 서신에서 불신 배우자와 사는 믿음의 아내를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베드로전서 3:1~2입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벧전 3:1–2).”

중요한 것은 믿음의 열매인 행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선한 행실은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단순히 겉으로만 선한 행실을 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언제나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같은 서신에서 이 주제를 조금 더 말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2,15).”
이 말씀들에 비추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참으로 부끄럽고 하나님께 죄송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아픈 마음으로 주님의 이 말씀을 겸허히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양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그 양심이 온갖 죄를 허용하고 이기적 습성들로 무디어져서 하나님 앞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만큼 망가져 있다고 할지라도, 양심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들과 비교할 때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한 선한 양심, 깨끗한 양심에서 나오는 선한 행실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5. 양심을 거스르면 믿음이 무너진다.
양심은 영어로 conscience 입니다. 여기서 접두사 con은 함께라는 뜻이고, 뒤에 붙은 science는 과학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본래 ‘안다’, ‘앎’,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함께 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어원을 아는 사람들은 양심이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함께 아는 지식이라고 이해합니다. 물론 신자들은 여기에 하나님을 더할 수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과 나, 그리고 모두가 함께 아는 지식입니다. 양심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표로써 역할을 하는 내적 느낌이나 음성”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 속에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목소리로서, 일반계시 특별히 도덕적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양심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양심에 대한 정의 위에서, 성경이 양심에 대해서 가르치는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양심은 믿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으로 선한 행실을 드러내는 것은 비단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을 대할 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믿음은 양심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엄밀하게 표현해야 한다면, 참된 믿음은 자신의 표피인 양심을 더 선하고 깨끗하게 만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믿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을 하든, 믿음이 입는 옷이라고 표현을 하든, 믿음은 그 자체로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기 보다, 양심이라고 하는 그릇 혹은 옷을 통해서 외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양심은 더 구체적으로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양심의 기능을 너무나 경시하거나 간과해왔습니다. “양심에 조금 걸리긴 하지만, 큰 거짓말은 아니니까”라고 말하면서 행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소위 요령, 편법(불법이 아닌)이라고 불리는 일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대개 정직의 문제에서 발생하고, 돈과 관련해서 많이 일어나는데, 언제나 우리의 양심과 관련이 됩니다. 내 돈을 조금 더 아끼기 위해, 세상에 세워진 법과 원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만 지키면 되지 세상 법 쯤이야” 하고 가볍게 무시하는 일이 신자들이나 교회에 의해서 적잖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소위 ‘하나님의 일’과 관련되면 우리는 더 열심히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 잘 알려진 한 목사는, 예배당 건축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내 집을 짓는다면 결사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배수진을 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성된 뒤에 어떤 일을 하느냐입니다. 서울시가 뭐라하든 누가 뭐라하든간에.. 우리는 사회법 위에 도덕법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라는게 있습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또는 교회가 세상 법을 어겨도 된다는 뉘앙스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이 말은 물론 신학적 무지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자 이 나라의 시민으로서 사회의 법이 성경과 어긋나지 않는 한 준수해야 할 의무를 지니며,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실, 교회의 지도자가 이런 말을 하고 그런 식으로 어떤 일을 집행하게 되면, 이것은 이 일에 동의하지 않는 성도 개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고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는 일이 되고, 이 일과 연관된 사람들의 양심을 침해하는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회원들 각자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회원은 이런 일에 대하여 마땅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의 분쟁을 일으키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도모하는 방식과 절차를 따라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만일 이런 식의 일들을 행함으로써 양심을 거스르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거기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성도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절약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이득이 되기 때문에, 법과 규정을 어기면서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가볍게 여기게 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며, 우리 양심을 거스름으로써 우리 믿음을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저작권법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어원서들이 비싸다는 이유로 우리는 무제한적으로 복사를 해서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개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되어 있고 저작권법도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생들이 국내서적들을 pdf판으로 만들어 배포하고 사용하는 일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고 그것으로 이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지적 재산권에 대한 도둑질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저는 우리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갈등하고 있는 문제들을 케이스 별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양심이 깨어지면, 믿음이 다 새나가고 말 것입니다. 결코, 양심만 타협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불신자들과 비교할 때, 월등하게 선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한국 사회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저들은 선한 양심의 사람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믿음의 진정성을 세상 앞에 보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