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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설교분류별모음 > 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은혜로운 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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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은혜 (3) - 은혜로운 헌상 (단편설교)

역대상 29:1-19, 고린도전서 15: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1-13

말씀내용
은혜로운 헌상 (대상 29:1~19)

[신앙과 성숙] 시리즈를 잠깐 접고, 두 주에 걸쳐 우리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예배당 이전 계획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1. 돈이 아니라 은혜, 내가 아니라 하나님!
지난 해 10월, [은혜와 돈]이라는 시리즈로 헌금에 관련한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이 돈이나 헌금에 대해서 말씀할 때, 그 초점은 은혜라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헌금과 관련된 말씀이지만, 이 말씀도 역시 돈이나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저희를 도우셔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여러분에게 전하고, 여러분이 이것을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역대상의 마지막 장인 29장은 다윗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품었던 성전 건축의 열망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찌기 다윗이 성전 건축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갸륵한 마음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말씀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다윗아, 네가 나를 위해서 집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세우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하는 것입니다(대상 17; 삼하 7).
백향목 궁에 거하는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화려하게 지어드리고 싶었던 마음은 잘못 되거나 틀린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는게 아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다. 네가 내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주는 것이다.”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윗에게만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는 일은 거절되었지만, 다윗은 감격하며 감사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이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앙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초점은 돈이 아니라 은혜이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2. 다윗의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을 결정하는 것
다윗은 하나님께서 아들 솔로몬에게 허락하신 성전 건축을 위해 평생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과 후손에게 베푸셨고 베푸실 은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준비하였나니(대상 29:2).”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윗이 아들의 성전 건축을 위해서 준비하여 드린 물품들의 목록 또는 헌금이 아닙니다. 3절을 보십시오.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대상 29:3).”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이 본문의 초점입니다. 다윗의 영혼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많은 시편에서도 그런 다윗의 마음을 읽고 감동합니다.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목사였던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은 그의 책,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그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측정된다.”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그가 입는 옷이나 타고 다니는 차나 사는 집이나 얻은 학위나 성취한 업적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결정합니다.
다윗의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드린 헌금의 총액이 아닙니다. 그가 얻어 누린 왕위나 권력도 아닙니다. 다윗이 평생에 그토록 사모했고 사랑했던 하나님이 다윗의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을 결정합니다. 시편에 다윗의 기도들을 읽어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하나님 자신을 사모하고 갈망했는지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답고 고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3. 은혜로운 헌상의 조건—하나님을 알고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과 헌상은 언제나 위험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 마음에 내재하는 위험 요소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이것을 경고합니다. 그 위험 요소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생각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인생을 선교사로 헌신하여 송두리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평생 모은 거액의 돈을 헌금하였습니다. 여기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생각이 들 때 위험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드린다는 생각은 일견 좋은 것이지만, 우리의 신앙을 넘어뜨릴 만한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생각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뒤집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우리의 교만과 자기 의가 우리를 끌고 가기 시작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세상에서는 기부를 하거나 특별한 기여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을 기념하여 건물의 이름에 기부자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특별한 방식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기념하여 모든 사람이 기억하게 합니다. 이게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어떤 일에 크게 기여한 사람을 기억하는 합당한 세상적 방식입니다.
그러나 영적 영역에서는 다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송두리채 드렸다고 할지라도, 또는 우리가 평생에 모은 돈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드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고 본래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생명, 가족, 돈, 명예, 지적 능력, 업적과 성취, 성공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내가 노력해서 살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영역에서는, 그 노력 조차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을 때, 그 마음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그 기특한 마음을 내내 다윗 안에 보존하시고 그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다윗의 제안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 거절의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우리 자신을 아는 것!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 자신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이중 지식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4. 은혜의 그릇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기독교 신앙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지식이 우리가 은혜를 받는 형식 혹은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모든 종교와 차별되는 점은 은혜입니다. 은혜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일반 사전에서 ‘은혜’는 이렇게 설명됩니다: “사람이나 신이 어떤 사람에게 베푸는 도움이나 고마운 일.’
만일 여러분이 이런 사전적 정의로 은혜를 이해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어떤 사람’에게 베풀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와 형벌을 받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을 지닌 죄인에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얼마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압니다. 날마다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리스도인은 은혜 없이 설명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은 은혜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은혜를 받는 형식 혹은 그릇이라고 말했는데, 이 이중 지식이 더욱 깊어갈수록 우리는 더욱 큰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무한 전능한 능력, 모든 곳에 임재하시는 무소부재하심, 전지한 지식, 거룩하심, 의로우심, 진실하심, 선하심, 은혜로우심, 자비하심, 사랑, 아름다움, 영광, 위대함, 엄위로우심, 주권, 자존하심, 영원하심, 무한하심, 불변하심 등이 갖는 영광스러움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볍고 얄팍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면 알수록, 인간은 그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을 인식하게 됩니다. 여기서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자신의 교만을 꺾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인간의 교만은 꺾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무한광대하심을 알지 못한 인간은 언제나 교만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잘남을 그렇게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라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 같은 존재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아는 것, 이것이 “은혜를 받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5. 하나님을 아는 지식(10~13).
우리는 이런 일이 다윗의 인생에 일어난 것을 압니다. 아니, 다윗이 진정으로 그의 평생에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은, 사실 오늘 본문, 다윗의 인생의 막바지에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10~13절을 보지요.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 29:10~13).”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위대하심, 권능과 영광,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했다고 말합니다. 천지와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고, 주권과 부와 귀가 다 주로 말미암는다고 말합니다. 권세와 능력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을 크게 하고 강하게 함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는 만물의 주재,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고백은 그냥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찬송과 예배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하면서 입에 붙은 익숙한 말로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이것이 여러분의 고백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경배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식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십니까? 이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런 하나님을 고백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알지 못하는 신을 향하여 드리는 이교적 예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행 17:23).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성으로 많은 지식을 쌓고 알아갑니다. 인간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없는 한계치가 어디인가 생각하면서 놀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신 지성으로 인간이 알아야 하는 최고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을 다니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좋은 사람을 만난 것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인생과 영원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인생은 시편 73편 기자가 고백했듯이, 짐승 같이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의 비참함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산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삶의 조건이 충족되기만 하면, 하늘을 찌르는 오만과 거만을 드러내고 살게 됩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만큼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6. 자신을 아는 지식(14~1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합니다. 14~16절을 봅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대상 29:14~16).”
이 다윗의 고백은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주께로부터 왔고, 다 주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 드린 모든 것, 자신이 왕으로서 소유한 자신의 모든 소유, 모든 재산이 다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드렸습니다. 그는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아니, 계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이며, 모든 것이 다 주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 때, 자기가 하나님께 바쳤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바치는 다윗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이것이 가능합니까? 받는 자가 주는 자에게 감사하는 것은 세상의 보편 법칙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면서, 도리어 감사하다고 감격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표면적으로는,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고 있지만, 배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평생에 베풀어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잘 사용하다가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드리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내게 주어진 은혜였기에, 다윗은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이 지식이 한 사람의 영혼 안에 자리하게 되었는가는, 대개 하나님께 드리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드린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자의 감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겸손은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태도가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은혜를 받은 사람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이고, 이 은혜는 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어떤 성공과 성취를 가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도 아니며, 통치자도 없으며, CEO일수도 없습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와 내 백성이 누구이기에…우리는…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고 말입니다.
가끔 말씀드리는 바이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아는 것은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것을 알지 않아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 외에 이렇게 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했듯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나 자기 자신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4:3~4).

7. 은혜를 받은 자의 은혜로운 헌상
여러분은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은혜를 받는 자리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은헤가 필요한 존재인지 알고 날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바라십니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힘쓰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까?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a).”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고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회중을 모아놓고 말합니다.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준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와 또 마노와 가공할 검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모든 보석과 옥돌이 매우 많으며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성전 벽에 입히며 금, 은 그릇을 만들며 장인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하는지라(대상 29:2~5).”
다윗은 베들레헴 이새의 집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목동으로 자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세워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왕의 권력으로 유부녀를 강간했고 자기의 죄를 감추려고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수인 우리야를 사지로 몰아 죽게 한 살인교사범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회개하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노년에 이른 다윗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드려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합니다. 다윗이 느꼈을 감격을 아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 아니라, 이 순간,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뭔가를 드릴 수 있다는 이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나와 내 백성이 누구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대상 29:14)?”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은혜롭고 합당한 헌상을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헌상 곧 드림을 통해서 더 큰 은혜를 받아 누립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의 은혜로운 헌상은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을 동반합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대상 29:5b).”
은혜를 받은 사람의 은혜로운 헌상은 즐겁습니다. 신자는 이것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8. 은혜의 전염성
다윗이 헌상을 하자, 각 가문의 지도자들,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 그리고 천부장, 백부장 또 왕의 사무관들이 가만이 있지를 못합니다. 은혜가 전염된 것입니다. 그들이 “다 즐거이” 드렸습니다(대하 29:6). 귀족들, 신하들, 지도자들이 왕의 은혜로운 헌상을 보고 참여를 했다는 것은, 그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증거입니다. 다윗도 즐거이 드렸고 신하들, 귀족들도 즐거이 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린 헌상의 내용이 7절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위하여 금 오천 달란트와 금 만 다릭 은 만 달란트와 놋 만 팔천 달란트와 철 십만 달란트를 드리고(대상 29:7).”
이것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금 170톤과 8.4그램의 금화 만개, 은 340톤, 동 610톤, 철 3,400톤”입니다. 이 어머어마한 액수입니다.
은혜는 전염됩니다. 성경에서 죄를 누룩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는 누룩의 번져감처럼, 죄도 번져가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은혜의 전염성을 봅니다. 왕이 받아 누린 하나님의 은혜가 귀족들과 신하들에게로 흘러갔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9절을 봅시다.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대상 29:9).”
백성들은 왕과 신하들의 헌상에 압박을 느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변의 심리적압력을 받아서 헌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이 모든 일을 본 다윗은 심히 기뻐했습니다.
은혜는 전염됩니다. 교회 안에서 점염되어 흘러가야 하는 것은 죄의 누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누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혜의 감염자들이 되어 은혜를 전염시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은혜의 바이러스를 갖고 그것을 전염시키십시오.
그리고 본문은 온 백성의 예배로 이어집니다. 다윗이 그날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은, 수송아지 천 마리, 숫양이 천 마리, 어린 양이 천 마리,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풍성한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대상 29:21).”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의 은혜로운 헌상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예배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온 무리는 “크게 기뻐하여 여호와 앞에서 먹으며 마셨습니다(대상 29:22).”

9. 이런 아름답고 은혜로운 헌상을 하나님께!
정말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을 우리에게 기록하여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헌상은 이렇게 은혜로운 헌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드리는 헌상입니다. 뭔가를 얻어내겠다는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너무 고맙고 너무나 감사해서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고 싶어하는 헌상입니다. 이런 헌상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동반됩니다. 쓴 뿌리가 나거나 시험에 들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금년에 예배당 이전을 계획하면서 헌상을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있어 예배당 이전이라는 이 특별한 기회에, 어쩌면 우리 인생에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을지 모르는 기회에 우리가 드리는 헌상에서, 성경에 기록된 이런 아름다운 헌상의 감격을 여러분과 함께 맛보고 누리고 싶은 것이 저의 기대와 간구입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우리 안에서 전염되어서 우리 모두가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헌상을 하고, 이로 인하여 다시 은혜를 받으며 크게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축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