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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기도 - 하나님이 다 정하셨는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 (신앙과 성숙 25)

에베소서 1:3-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2-03

말씀내용
기도하는 신앙(2) 하나님이 다 정하셨는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엡 1:3~19)


지난 주일, 우리는 모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분이 “나도 모세처럼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는 말하는 깊고도 친밀한 하나님과의 사귐을 경험하고 싶다”고 느끼셨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칼 바르트가 ‘하나님을 향한 불치의 향수병(incurable God-sickness)’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능은 식욕처럼 일어나 밥을 먹고 포만감을 즐기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본래의 본능을 저항하는 타락한 본능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거부하고 부담스럽게 여기는 죄성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기도하기 위해서는 늘 이 죄성과 싸워야 하고 이 싸움이 없이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최고의 즐거움으로 나아가려면 험난하고 좁은 의무의 길을 지나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과 성숙]이라는 큰 주제에서 [기도하는 신앙]이라는 소주제를 다룰 때, 우리 자신이 가진 기도에 대한 오해와 그릇된 태도를 돌아보고 교정하며 참되고 복된 은혜의 자리로 다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고백들이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4).”

1. 기도에 관한 질문, 질문들
우리가 기도에 관해서 가지는 질문들은 어린 아이같은 질문으로부터 좀더 신학적으로 표현되는 질문까지 다양하고도 많습니다. 기도가 그만큼 우리 신앙에 있어서 신비한 영역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해서는 유난히 이상스러운 가르침과 경험들이 난무합니다. 관상기도나 향심기도 같은 신비주의 영성이 무분별하게 들어오고, 기도 응답에 관한 이상한 기도 신학이 만연하며, 온갖 나쁜 신학에 근거한 기도 경험들이 넘쳐납니다. 현실적으로는 소위 기도의 대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미숙하고 이기적인가 하는 질문도 나옵니다. 기도에 관한 질문과 이슈들은 정말 많습니다.

2. 기도한다고 상황이나 결과가 바뀌는가?
오늘 제가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서 주목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걸까요?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습니까? 시험보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합격합니까? 이것은 매우 와 닿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왜 하는가 하는 동기의 문제를 건드립니다. 만일 기도가 상황과 결과를 바꾼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정말 열심히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먹지 않고 금식하며, 자지 않고 철야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예배당은 밤이나 낮이나 기도하는 사람들로 붐빌 것입니다. 이런 열심은 기도가 상황과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독려하고 더 열심히 부르짖고 엎드리라고 말하는 데는 이만한 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것은 성경적인 방식입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10년 전인 2007년에 미국 미니아폴리스에서 다리가 무너져 13명이 죽고 145명이 다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미니아폴리스의 두 저명한 목회자가 낸 논평은 상이했습니다. 먼저, 존 파이퍼는 교량 붕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목적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렉 보이드는 이 불행한 사고는 하나님의 주권과 무관하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런 사건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났다면 하나님은 거룩하지도 선하지도 자애로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 괴롭고 부패한 세상에서는 다리들이 때로 붕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입장을 [개방적(열린) 유신론]이라고 부릅니다. 개방적 유신론은 하나님께서 미래의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지 않으며, 현재의 일도 모두 주관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합니다. 이 입장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관심하시거나 불행한 일을 허락하시는 것처럼 오해하여 기도를 중단하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불행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는 이들에게 목회적 차원의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또 한 사람의 개방적 유신론자인 로저 올슨의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무지와 죄 때문에 때로 불행한 일이 발생하고 사악한 행위가 자행된다. 하나님이 은밀히 그런 일들을 계획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타락한 죄인들에게 ‘좋다. 지금은 나의 뜻대로 되지 않고 너희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기도를 약화시키는가?
이들이 가진 잘못된 전제를 지적하겠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은 기도를 무용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사를 다 작정해 놓으셨다면, 기도가 무슨 소용이냐는 겁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가 기도해야 할 책임의 관계를 다루는 신학적 주제입니다.
위대한 개혁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가 기도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는 기도를 섭리의 항목 안에서 다루었습니다. 왜 기도를 그리스도인의 실천이나 성화 혹은 성령론이나 교회론의 항목 안에서 다루지 않고, 섭리의 항목에서 다루었을까요? 여러분 중 다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통해서 기독교 교리의 개요를 공부하였습니다. 섭리는 신론에서 다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목적을 따라 그리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영원 속에서 작정하시고 역사 속에서 창조와 섭리의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신대로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세상을 섭리로 보존하고 다스리십니다. 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에 우리의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바빙크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목적만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까지도 다 작정하셨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수단을 작정하셨다는 말에서, 우리는 기도가 차지하는 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기도의 응답을 작정에 연결하신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일반적인 숙명론 혹은 운명론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숙명론은 인간이 무슨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는 결정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는 방편으로 포함하여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따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르게 배운 그리스도인은 “기도해봤자 소용없어!” 같은 말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도해봤자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기도를 당신의 목적을 가장 선하게 이루시는데 포함하셨고, 그 과정을 사용하시며, 그 과정과 목적 모두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을 유익하게 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는 기도를 섭리의 항목 아래서 다룬 것입니다.
가령,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은 사탄의 부추김을 받아서 욥의 재산을 공격했고 종들을 죽이고 소와 나귀 그리고 낙타들을 빼앗아 간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재산을 건드릴 권한을 주셨고 사탄은 당시 악명 높던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을 선택하였고, 그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에게 자유가 없었을까요?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었는데, 사탄의 강제력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마귀에게 순종하여 욥의 재산을 친 것일까요? R.C.스프로울의 말입니다.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면, 욥의 가축이 강탈당하는 일은 일어날지라도,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유사한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팔려는 악한 생각으로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50:20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기서도 형들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되, 다른 수단을 통해서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기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방편으로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 하나님께서 이미 다 정해 놓으셨으니까 내가 기도해봐야 소용없어. 상황을 조금도 바꿀 수 없고, 결과도 바꿀 수 없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서, “오, 주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기도마저도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는데 영광스럽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구해야 합니다.
자, 그래도 하나님의 주권의 교리는 우리의 기도를 약화시키고 기도하려는 우리의 동기를 무력화시킨다고 말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도리어 우리의 무릎을 전능하신 아버지께 꿇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해도 소용없도록 결과를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당신의 목적 성취의 수단으로 포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예정을 확신한 바울 사도의 기도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사역에서 은퇴한 뒤에 많은 교회를 방문하면서 자신이 관찰한 바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드리는 기도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예배 시간에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아픈 사람이나 다른 희망 사항을 제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자들은 기도할 때 더 이상 하나님의 속성이나 그분의 사역을 언급하지 않았고, 또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지도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교회의 예배 시간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기도에도 비추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 기도에는 이런 저런 희망 사항들을 언급하는 것 외에, 하나님의 속성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얼마나 언급합니까? 또 우리는 기도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을 돌립니까? 만일, 우리의 기도에서 이런 요소들을 발견할 수 없고, 그저 원하는 것들을 구하는 것 밖에 없다면, 도대체 우리 기도는 왜 그런 것일까요? 우리 기도는 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다르며, 왜 성경이 전반적으로 가르치는 기도와 다른 것일까요?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채 기도할 때 그럴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가 무시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깊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교리와 가르침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너무나 피상적으로 아는데 만족합니다. 정치의 문제, 연예계의 문제, 기타 사회적 이슈나 기타 관심 이슈들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는데 반하여,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너무나 피상적 지식의 수준에 머무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기도의 가장 큰 장애물, 최고의 방해꾼 중 하나입니다. 성경의 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무시하게 되고, 거기에 남는 것은 오직 인간의 몫, 인간의 요구만 강조될 뿐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놀라운 선언을 담고 있는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정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창세 전 하나님의 선택을 부인할 수 없도록 선언하는 구절입니다. 9,11절도 보십시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놀라운 예정 선언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믿는 사도 바울이 이 위대한 선언을 한 뒤에 바로 이어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15~19절에는 사도 바울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하나님께 사도는 기도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그렇게 분명하게 확신하는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이것은 조금도 모순된 일이 아니었고,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구절의 의미를 깊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기도,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했던 사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이 기도의 특징에 여러분의 주의를 끌고 싶습니다.

5. 사도의 기도의 특징: 감사와 찬송(롬 11:33~36)
사도의 기도의 특징은 한 마디로 감사와 찬송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도가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을 수 있는 근거,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주관적인 상상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사도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15절에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했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그 정하신 뜻을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뜻이,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며(1: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며(1:5) 그리하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기에 사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이 되게 하셨고 그 기업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말입니다(1:11~14).
이 감사는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바라고 기도했던 것을 하나님께 응답해주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감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능가하고 초월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작정하신 일은 이루어질 것이며, 그 이루어주시는 바를 에베소 성도들을 통하여 보고 있기 때문에 혹은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치지 않는 감사를 돌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에서도 정확하게 같은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교리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가 하는 말이 로마서 11:33~36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것은 무엇보다도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기도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송영 중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찬송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식하게 될 때, 가슴 깊은데서 터져나오는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1장이나 로마서 11장은 하나님의 주권이 결코 우리의 기도를 약화시키거나 기도의 동기를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돌리는 감사와 찬송으로 더욱 온전하게 합니다.

6. 하나님께서 다 정하셨는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오늘은 여기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정하셨는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도를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정하셨고, 하나님의 작정은 목적과 함께, 기도라는 수단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 계획과 목적을 이루시는 도구로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기도는 단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을 바꾸는 용도로만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말입니다(엡 1:4).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성도가 기도해야 할 이유와 근거는 너무나 분명하고 강력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접근할 수 있고, 그 기도를 우리 자신의 간절한 기도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할 이유와 근거를 가질 뿐 아니라, 열정적으로 그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기도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할 때, 이런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우리 벧샬롬 교회에 깊이 그리고 널리 미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