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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교회 (4) - 성경이 가르치는 장로 직분

디모데전서 3:1-7, 디모데후서 2:24-2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4-14

말씀내용
2년 6개월 전 직분자 선출을 전후하여, 우리는 [교회와 직분]이라는 주제로 4번에 걸쳐 주의 말씀을 상고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장로 선출을 앞두고 장로 직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무시되고 간과되는 가르침 중 하나가 직분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직분과 관련하여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 보다 경험적 학습에 영향을 받은 나머지, 직분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가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직분을 잘 배우고 정확하게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교회 안에서 이루어 가려고 애쓰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직분의 개혁은 곧 교회의 개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주의 말씀이 온전하게 선포되는 것 만큼이나, 선포된 말씀을 따라 교회가 세워지고 운영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성경적 장로, 집사 직분의 회복입니다.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를 통해서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이 장로와 집사 직분을 통하여 바르게 실행될 때, 이것이 온 교회와 성도들에게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 직분에 대한 오해
먼저 장로 직분에 대한 오해를 몇 가지 다루겠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장로 직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서가 아니고, 좁은 의미에서 치리장로, 즉 오늘날 일반적으로 ‘장로’라고 불리는 직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장로 직분에 대한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오해는 장로 직분을 계급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머리만의 오해가 아닌 가슴의 오해이기에 더 심각합니다. 머리로는 성경적 장로 직분이 계급이 아니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머리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십자가를 앞에 두신 주님 앞에서 ‘누가 크냐’ 는 논쟁을 했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눅 22:24~27). 적어도 이런 다툼은 처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동안, 이런 다툼을 여러 차례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눅 9:46~48). 다스리고자 하는 본능,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인간의 본능은 장로 직분을 권력과 권위와 명예로 여기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 대로 장로 직분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려는 영적 싸움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직분자 선출을 놓고 위기가 발생하고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단체나 조직에서 대표나 회장 선출 문제를 놓고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이런 일을 본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계급과 권력 구조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목사—장로—집사—성도’의 순서로 이루어진 계급 구조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런 식의 권력 서열로 이해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죄인의 본성이 모든 것을 늘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이것은 중요합니다.
장로 직분이 계급이 아니라는 것은, 장로의 직무가 기업체의 이사가 하는 일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는 평가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장로는 이런 일을 하는 직분이 아닙니다. 물론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의 본질적 직무는 다스림 곧 목양입니다.
장로는 무엇을 하는 직분인가?
장로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장로가 하는 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장로가 무엇을 하는 직분이라고 가르칩니까? 우리가 속한 장로교회의 헌법이 이것을 성경적으로 잘 정리하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장로는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고 말합니다. 장로가 하는 일은, 영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물질적 봉사를 담당하는 집사 직분과 구별되는 부분입니다. 장로는 성도의 영혼을 돌보는 일, 그와 관련한 교회의 행정, 권징의 문제를 책임지는 직분입니다.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 장로는 교인들의 인정을 받고 그들의 택함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장로는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한다”고 말합니다. ‘도리(道理) 오해’라는 말은 신앙의 도리, 즉 교리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들과 관련이 됩니다. 오늘날 신천지나 사이비에 의해서 교회가 휘둘리는 것은, 장로 직분(가르치는 장로를 포함하여)의 결핍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리 오해는 반드시 도덕적 부패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백성은 방자하게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장로는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교우들을 주의 말씀과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을 때 당회에 보고하여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당회의 결정으로서 권징을 행할 수 있으니, 참으로 그 책임이 무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장로의 직무는, “교우를 심방하되 위로, 교훈, 간호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장로의 직무는 주로 심방을 통해 수행됩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는 장로의 직분이 ‘감독’이라는 용어로 소개됩니다. 장로와 감독은 같은 직분을 가리키지만, 그 단어가 가지는 문자적 의미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장로는 나이가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감독은 감독하고 다스리는 기능을 강조합니다. ‘감독’은 헬라어로 ‘에피스코포스’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조사하다, 방문하다, 심방하다, 보다, 살피다’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이 ‘감독’이 감당하는 직무를 잘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파카드’인데, 이 단어는 위의 의미들 외에 ‘군대를 소집하다’는 뜻이 있고, 이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돌보신다. 임명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장로를 가리키는 감독이라는 용어는 장로 직분의 본질적 사역이 심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병자와 상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식한 자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며 간호하는(돌보는) 일도 있습니다. 선포된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일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헌법은 “평신도보다 장로는 신분상 의무와 직무상 책임이 더욱 중하다.”고 말합니다.
넷째로 장로 직분은 “교인의 신앙을 살피고 위하여 기도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장로 직분은 심방하여 신앙을 살피는 일에서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직분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교우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헌법은 이렇게 말합니다. “장로는 교인과 함께 기도하며 위하여 기도하고 교인 중에 강도의 결과를 찾아본다.” 장로 직분은 교인과 함께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직분입니다. 그리고 ‘교인 중에 강도의 결과를 찾아본다’ 는 말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청종하여 잘 살고 있는지, 그 열매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끝으로 헌법이 말하는 장로 직분은, “특별히 심방할 자를 목사에게 보고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심방하는 중에, “아, 이 사람은 목사가 심방을 해야 하겠다” 고 판단이 되는 사람을 목사가 심방하게 하는 것입니다. 병환자가 있을 때, 또는 슬픔을 당한 자나 회개하는 자가 있을 때, 혹 특별한 영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헌법이 규정하는 장로의 직무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지, 어떤 뛰어난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이것을 들으실 때, 여러분이 기존에 갖고 계시던 장로의 직무에 대한 생각과 일치하거나 비슷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올바르게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상하게 들리거나 처음 들어보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받아온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러기에 더욱 말씀을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
헌법과 성경이 가르치는 장로 직분은 한 마디로 부모의 역할과 흡사합니다. 단순히 자녀들의 육적 필요 만 채워주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들의 영혼을 돌보는 믿음의 부모 말입니다. 믿는 부모에게는 불신 부모들이 가지지 않는 또 다른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거듭남과 회심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행하실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참된 거듭남과 회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참된 말씀을 가르치며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모가 자녀들의 영적 상태를 두고 의논을 할 수 있고, 때로는 징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들입니다. 이점에서 장로들의 일도 동일합니다. 단순히 의무 때문이거나 행정적 사무를 보듯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 직분이 없다면
“만일 장로 직분이 없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을 한 번 해봅시다. 그러면 교회 안에 다툼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분은 안 계십니까? 적지 않은 교인들이 교회생활 속에서 다툼을 경험하는데, 특히 당회 안에서의 다툼, 목사와 장로 사이의 다툼을 경험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장로 직분을 오해할 때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로 직분은 목사를 견제하는 직분이라고 이해하여, 부정적 역할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이며, 오해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살펴본 장로의 직무를 생각할 때, 장로 직분이 없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교회는 온전하게 세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장로 없이 목회를 하는 목사는 혼자 결정하고 혼자 행할 수 있어서 좋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홀로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부모의 짐을 지게 하지 않으셨고 원리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부모의 짐을 지게 하셨습니다. 홀로 서는 것은 위험하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인간의 전적 부패를 믿어온 장로교회는 단 한 사람의 탁월한 사람을 목사로 세워서 목회하게 하지 않았고, 복수의 장로들을 세워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제도화하였습니다. 이것은 본래 성경이 가르쳐온 바입니다. 당회라는 복수 리더십을 통해 목사의 약점은 보완될 수 있습니다. 목사 한 사람의 기질과 성향이 두드러지지 않고 다양한 장로들을 통해서 다양한 기질과 성향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혹 목사의 동기와 결정이 성도들의 오해를 받을 때에도, 장로들은 회중 속에서 그 오해와 비난을 해소하고 중재함으로써 교회를 평안히 인도할 수 있습니다. 권징은 한 사람에 의해서 행해질 수 없고, 당회라는 치리 기관을 통해서 행해집니다. 이것도 단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나 감정이 교회에 미칠 건전하지 못한 영향을 방지하는 안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때로는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로들이 든든히 서 있다면, 교회는 동요하지 않고 안정감을 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장로 직분이 있기에, 교회가 누리는 유익입니다. 부모가 편안하고 사이가 좋으면 집안의 자녀들도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경건한 어른들, 영적 지도자들이 한 마음으로 교회를 돌볼 때 교회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장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조건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결정이 있다면 무엇을 결정하는 일이겠습니까? 보통 교회당 건축이 중요한 결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부속건물을 구입하는 결정입니까? 또는 해마다 부서장을 새로 세우는 결정이거나 코이노니아 그룹을 결정하는 일입니까? 이 모든 것들보다 우선되는 중요한 결정은 목회자를 청빙하는 결정일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야 하기에,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를 청빙하는 일은 교회의 현재와 장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결정은, 장로를 선출하는 결정일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요한삼서에 등장하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을 장로로 선출하게 된다면, 그 교회는 큰 여러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요삼 9). 하지만 디모데전서 3장 1~7절에 말씀한 대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을 장로로 선출하게 된다면, 그 교회는 큰 유익을 얻게 되고 든든히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를 선출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고, 모든 교인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각자의 믿음을 따라 투표함으로써 이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이런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려면, 어떤 사람이 장로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장로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조건을 세 가지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영어로 이것을 3C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품(Character)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7절과 디모데후서 2장 24~25절은 장로가 될 사람의 성품을 잘 묘사합니다. 성품은 행동으로 드러납니다(딤전 5:24~25). 단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가 일관될 때 우리는 그것이 성품의 열매라고 받아들입니다. 장로의 성품과 덕에 관한 성경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외부 사람들의 평판이 좋은가(딤전 3:7)? 말과 행동에서 신중한가? 절제하는 사람인가? 돈을 사랑해서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닌가? 남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인가? 모두에게 친절한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인내하는 사람인가? 헌신된 성도로서 성실하게 교회의 모임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가(히 10:24~25; 요 13:34~35; 요일 4:20~21)?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교회 공동체의 건강에 기여하는가(빌 2:1~5; 엡 4:29)?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은혜를 드러냄으로써 세우는 말을 하는가 아니면, 비판적 언사로 허무는 일을 하는가? 분열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나됨에 영향을 미치는가? 어리거나 갈등하는 신자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그들을 만나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들의 영적 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인가(행 20:28)? 교회와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인가? 불신자들과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며 교회 안에서의 섬김을 통해 열매를 맺는가(골 1:9~14)? 경건한 지혜를 행사하는가(약 3:17)? 다른 사람의 훈계 앞에 자신을 교정함으로써 지혜로운 겸손을 드러내는가(잠 12:1)? 말, 행동, 사랑, 믿음과 순전함에서 다른 교인들에게 본이 되는가(딤전 4:12; 벧전 5:1~5)? 이와 같은 질문들은 성품과 관련된 질문들입니다. 성품이 장로 자격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성도들에게 경건의 본이 되는 것이 장로의 일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딤전 4:12; 벧전 5:2~3; 딛 2:7~8; 살전 1:5~6). 장로는 철저하게 본을 보임으로써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장로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두번째 조건은 능력 또는 적합성(Competency)입니다. 어떤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까? 장로의 직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능력입니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가 아닌, 다스리는 장로를 선출하는 일에서도 가르치는 능력은 중요합니다. 가르치는 능력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장로는 성경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이로써 성도들의 영적 유익을 도모하는 사람입니다. 훌륭한 판사나 변호사가 법을 정통하게 알아야 하듯이, 장로는 경험이나 연륜이 아니라 주의 말씀과 교훈으로써 성도들을 섬기는 자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본연의 직무인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장로가 되는 사람의 지적 능력은 중요합니다. 성경과 교리를 바르게 잘 이해하고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면 바로 장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6개월에 걸쳐 성경과 교리 등을 공부하고 가을정기노회 전에 노회에서 장로 고시를 치르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장로의 직무가 본질적으로 주의 말씀에 근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소개되는 장로의 직분과 집사의 직분의 조건의 차이는 오직 하나입니다. 장로가 될 사람은 가르치는 능력을 갖춘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딤전 3:2). 이것 외에는 여타 도덕적 성품과 관련된 사항들은 장로 직분과 집사 직분에 공통적입니다.

세번째로 장로가 될 사람에게 중요한 조건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Chemistry)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통 능력(Communication)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위의 두 가지 외에도 이 요소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현재 당회원들과 잘 맞는 사람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특별히 은사 면에서 현재의 당회를 잘 보완할 수 있는가, 교인들에게 주의 말씀을 조리 있게 효과적으로 소통할 때, 독선적이지 않고 원만한가를 살펴야 합니다.

자, 장로가 될 사람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이렇게 높습니다. 장로의 본에 의해서 교인들이 배우는 신앙은 교회의 문화를 형성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다시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쳐 공동체적 증거를 감당하게 할 것이기에, 장로가 될 사람을 이런 성경적 기준에 맞추어 검증하고 세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종종 교회가 장로를 몇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숫자를 먼저 정해놓고 장로를 선출하는 경우를 봅니다. 하지만 더욱 지혜로운 최선책은, 정해놓은 숫자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조건에 합한 사람이 없다면, 참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 것을 명했습니다(딤전 5:22). 장로는 조심히 세워야 합니다.

장로들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들이 맡았던,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겨 주셨던 영혼들에 대해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히 13:17; 렘 23:1~4). 자신의 일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는다는 사실을 장로는 알아야 합니다(고전 4:3~5; 고후 5:9~10).
자, 그렇다면 누가 장로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품, 능력, 조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할만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과연 그런 사람은 있습니까? 자격을 넉넉하게 갖춘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만 28살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을 때, 성경에 가르친 조건에 합당했기 때문에 안수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장로가 될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고 그런 의로움을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인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양무리 가운데서 어떤 자들을 목사와 장로로 세워, 당신의 양무리를 먹이고 돌보게 하십니다. 기이한 일입니다. 양무리 중에서 불러 양무리를 돌보고 먹이게 하십니다. 이것은 오로지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장로를 선출하는 공동의회에서 이런 은혜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로를 선출하는 이 중요한 결정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드러나기를 구합니다. 주의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을 신중하고 면밀히 살피되,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장로에게 순복하고 장로를 위해 기도하라.

교회에 장로가 중요한 만큼, 온 성도는 자신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성도들에게 피택된 장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다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장로들에게 겸손함으로 순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17을 봅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 벧샬롬교회에는 저 외에 두 분의 장로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한 분의 장로님을 더 선출하려고 합니다. 선출하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새로운 장로님이 선출된다면, 여러분은 그에게 순복하고 그가 이 무거운 직분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두려움과 기쁨으로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그가 장로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고스란히 온 교회와 모든 교우들의 유익이 될 것입니다. 장로들로 즐거움으로 이 직분을 감당하게 하십시오. 오늘 우리 벧샬롬교회의 장로 선출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교회가 큰 은혜를 누리는 결과를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