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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교회 (3) - 신자의 교회생활 : 새로운 가족 (신앙과 성숙66)

에베소서 2: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1-06

말씀내용
신자의 교회생활-새로운 가족(엡 2:19)
오늘은 어쩌면 여러분이 익숙하게 아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좀 더 깊이 그리고 정직하게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익숙함이 주는 함정이 있습니다.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의 경험하고 살지 못하는 부분이기에 조금 놀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주제를 언젠가는 다루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교회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고, 또 주의 뜻을 선명하게 깨달았다면, 더 이상 회색 지대의 모호함에 머물지 말고, 어떻게 이 진리에 부합하게 살아야 하는가를 기도하며 순종하며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개의 가족
누구에게나 가족이 있습니다. 가족이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처음부터 정하신 방식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나서 생긴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각각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여 부부가 되게 하셨고, 그 부부 관계 속에서 자녀들이 태어나도록 정하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자연적 이치이고 법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옹호자들이 예외적인 경우들을 들어 자연적 일반적 법칙을 무너뜨리고 동성 간의 성행위나 나아가 동성 결혼을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이성적 능력의 결핍이나 한계가 아니라 그들의 영적 부패상을 반증하는 태도일 뿐입니다.
가족이란 정말 특별하고 좋은 것입니다. 물론 화목하지 않은 가정도 많습니다. 가정에서 깊은 상처와 아픔도 경험하는 것도 죄인들의 슬픈 현실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은 가족을 사랑합니다. 가족처럼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주님의 에피소드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물으시고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4~35).”고 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깜짝 놀라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주님은 지금 새로운 가족을 규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가족이 아니라 영적 가족입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종종 이단이나 극단적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모든 자연적 가족관계를 끊어내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어머니를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으시는 와중에도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기억하셨고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가리켜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9:26~27). 이때로부터 요한이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서 모셨다고 했으니 잘 알아들은 셈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태도들이 너무나 많기에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교회 안의 과부들을 돌보아야 하는 교회의 책임을 말하면서, 만일 과부에게 믿는 가족이나 친족이 있다면 그 과부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은 우선적으로 교회에 있지 않고 그 믿는 가족이나 친족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우리 믿는 사람들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피보다 진한 것은 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믿는 여러분의 삶에 적용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며 불신자보다 더 악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점에서 여러분의 불신 형제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앞서 말씀하셨던 그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제가 지난 주에도 잠깐 언급했듯이, 주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현존하는 세상의 일반 나라의 질서를 파괴하고 대체하는 것으로 당장에 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완전한 대치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일반 나라에 해당하는 것이 동일하게 가족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이것은 어떤 분들에게는 반가운 말로 들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정의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어쩌면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겠지요.
분명한 사실은, 지금 우리가 믿는 자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두 개의 가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부인하고 하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개의 가족 모두에 우리는 속해서 살아갑니다.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우선순위를 가진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마는, 우리가 대한민국 시민이면서 동시에 천국의 시민인 것과 비교하여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절대적이고 항구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분명히 교회라는 가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구속의 나라에 관한
우리가 지금 혈연으로 맺고 살아가는 가족의 관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연적 혈연 관계로 맺어진 가족은 노아 언약에 속한 일반 나라의 범주에 속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가 완성될 때, 자연적 가족은 폐하여 질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새로운 가족, 구속의 나라에 속한 새로운 영적 가족이 생길 것은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할례라는 언약의 표로 확증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누가 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를 보면 이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7:12~14입니다.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2~14).”
이 말씀은 사실상 새로운 가족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결코 자연적 혈연적 관계로 형성된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훗날 주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라고 하셨을 때, 이것을 명확하게 선언하신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 후에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맺고 살아온 사랑하는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전혀 무의미해지지는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때에는 그것이 우리 삶을 규정할 만큼 우선적이고 배타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이루신 구속을 통하여 그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7).” 할례라는 언약의 표로 맺어진 가족이 이제 믿음오로 말미암아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서신의 마지막에서 다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5~16).” 이제 주 예수를 믿어 새 피조물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똑같이 선언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권속’은 가족과 같은 말입니다. 왜 바울 사도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일까요? 교회가 실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입니다. 우리에게 “너희가 가족이 되어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가족이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을 좀 더 생각해보지요.
먼저 사도는 부정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우리의 영적 신분과 처지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말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과거에 외인이었고 나그네였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외인’은 우리가 살면서 비교하거나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준거집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회-정치적인 그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 그 사람이 죽든지 살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나와 아무 상관이 없고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외인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신 용례를 보면 이 ‘외인’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 마지막 심판 때의 일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나그네’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에베소서 2:19에서는 ‘외인’과 같은 말입니다. 말하자면, ‘나그네/외인’은 내가 영접하거나 돌볼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찾아온 ‘나그네/외인’을 영접한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한 일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나그네’의 정체가 40절에서 명확해집니다. 심판자인 임금이 말씀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그 ‘나그네/외인’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입니다. 이는 믿음의 형제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믿음의 형제요, 하나님의 가족이지만, 나와는 신분상으로나 어떤 모습으로든지 섞이기 힘든 사람이고, 정말이지 주님이 아니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외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너무나 약하고 별볼 일 없습니다. 세상이 다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네가 그를 무시하는 건 다른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 대한 태도가 곧 나에 대한 태도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많이 생각해야 하는 말씀이고, 생각을 넘어 회개하고 순종을 결단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5~46).” 무서운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맺어진 이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하여 무시하거나 모른척한다면, 그것은 곧 주님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고 무시라는 말입니다.
또 에베소서 2:19에서 전에는 너희가 ‘나그네’였지만 지금은 ‘나그네’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쓰인 ‘나그네’는 주님이 말씀하신 ‘나그네’와는(마 25:35) 다른 헬라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나그네’는 그야말로 외국에 임시체류하는 처지의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외인’보다는 사회-정치적으로 그 성격이 명확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를 믿는 너희는 더 이상 임시체류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당신은 아무 차별이 없는 동일한 권리를 가진 천국 시민(회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에 소속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외인도, 나그네도 없고 그 어떤 사회-정치적 구별이 차이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정 곧 교회입니다.
상호 돌봄의 책임
우리는 여기까지 우리가 속한 두 가족의 현실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야 할텐데,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인 게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어진 새롭고 영적이며 항구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이라면, 우리는 이 가족을 결코 무시하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기본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서로 돌볼 책임을 지는 관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귀찮다고 버리지 않고 자녀들을 큰 희생으로 돌보고 양육합니다. 자식들이 자라면, 연로한 부모를 돌보고 부양합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형제보다 더 가깝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때로는 형제 보다 나은 친구도 있지만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형제를 도울 수 있는 형편에 있으면서도 어려운 자기 형제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놀부가 보여준 부덕이요 악덕으로 여겨지는 것이 상례입니다.
영적인 가족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2~3년 전에 요한일서 강해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사랑은 의무나 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 보다, 거듭난 사람의 영적 본능이며, 거듭남의 명확한 증거로 제시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4~15).”
그리고 말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여기서 형제는 물론 새로운 영적 가족 안의 믿는 형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어떻게 말씀합니까?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믿는 자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가족, 영적 가족이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가족이기에, 교회에는 상호 돌봄의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이며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 맞다면, 이 책임과 혜택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니, 이 말 보다는 우리에게는 이런 본능적 감각과 의무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족이니까 말이지요.
이 말씀을 좀 더 정직하게 대면해봅시다. 우리는 가족입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끈끈한 어떤 동호회나 조직과 비교될 수 없을만한 독특한 가족같은 공동체가 맞습니까? 세상에서 끈끈한 가족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마 조폭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영화에서 미화된 조폭일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인간에게 의리라는 것이 작동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의리 공동체라면,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조폭 두목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 목숨을 내놓을 것을 요구 받기 보다, 우리의 두목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고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어 주셨고, 우리가 받아야할 영원한 형벌을 대신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주님께서 친히 이 사랑을 보여주셨고, 또 우리에게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훌륭한 조폭 집단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주신 구속의 나라에 속한 영적 가족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함입니다.
주님께서 새계명을 말씀하심도 이런 맥락인 것이 분명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교회, 이 새로운 가정 안에서의 형제 사랑은 이 세상을 향한 최고의 복음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의 숙제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이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실 형제를 사랑할 수 없을 만큼 형제의 형편을 너무나 모르지 않습니까? 말이 형제이지, 우리는 이름조차 모를 수 있고, 관심 조차 특별히 두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그냥 한 교회 다니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가족 안에서 주신 형제들의 형편을 내가 꼭 알아야 한다는 부담을 가져본 적은 있습니까?
우리 안에 한 형제가 있습니다. 그는 내일이라도 집세를 내지 못해서 내쫓겨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형제의 형편을 알지 못합니다. 그 형제의 얼굴에 있는 수심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코이노니아 그룹에서는 새 집, 새 차, 새로운 가구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 마치고 헤어지면서, 친절하게 인사할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오늘 밤에는 잘 자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서서, 그가 주님이 말씀하셨던 그 ‘나그네/외인’인줄 몰랐다고 말하면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이 피로써 맺어주신 형제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충분한 면책사유가 되는 것입니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매주일마다 우리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더 많이 서로를 알아야 하고, 더 많이 오픈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우리는 서로를 더 알기 위해 개인적으로 더 많이 더 자주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조차 모른 채,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한 교회에서 가족이라고, 형제라고 말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자존심이라는게 가족 안에서도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일까요? 아픈데 아프다고 말할 수 없다면, 그 가족이 과연 가족이긴 한 것입니까? 배고픈데 배고프다고 말할 수 없는게 가족입니까?
“게으른 형제,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합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경우를 지적하여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12).”
이렇게 말한 후에, 여전히 바울 사도는 이런 것이 우리의 선한 일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이런 것이 가족입니다. 가족 안에서는 이런 착하고 선한 일이 넘치도록 일어나야 하고, 이것은 가족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서로 돌봄인 것입니다.
모든 착한 일이 넘치는 가족
우리가 지난 해 10월, [은혜와 돈] 시리즈의 설교를 통해서 상고한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모금을 하면서, 고린도교회에게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9:8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자연적 가족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 형편 안에서 서로를 돌보고 책임을 나눠집니다. 한계가 있는 사람이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게 그렇습니다. 내 자식에게 부족함 없이 잘해주기를 원하지만, 부모라고 해서 마음만큼 다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은 영적 가족은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은혜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 우리의 가장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전능하신 아버지,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돌보심 아래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우리의 제한된 물질로 알아서 돌보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그래서 이것이 가능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 11:24).”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물질에 제한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 가족의 당장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영적 가족의 필요를 놓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 나아간 경험이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있었는지요? 여기서도 우리의 대답은 “몰라서”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요. 우린 정말 우리 영적 가족의 형편을 모를 뿐 아니라,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먹고 사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고린도후서의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와 모든 자원을 공급하실텐데, 이것은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형제를 형편을 돕기 위해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열심히 쉬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내려놓고 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명백한 희생입니다. 자기 하나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렇게 형제를 돕기 위해서, 도울 것이 항상 넉넉할 수 있기 위하여 가장처럼 열심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성실하게 살아가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하고도 합당한 동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하기 위해서, 착한 일을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랍고도 신선하고도 아름답고 신나는 동기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집사--착한 일을 위해 구별된 직분
자, 그럼 여기에 좀 더 구체적인 대안이 있을까요? 성경이 제시하는 대안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안은 바로 집사의 직분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직분은 장로와 집사 두 개의 직분입니다. 이것을 항존직이라고 합니다. 한 번 장로는 영원한 장로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는 이 두 직분이 항상 있어야 하는 직분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가정이 온전하게 존재하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집사의 직분은 바로 이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살피고 주도하고 실행하는 일을 하는 직분입니다. 집사의 직분은 모름지기 이 일에 헌신된 직분입니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가 하나님의 백성, 영적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기 위해서 분주하게 연구하고 엎드리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치리하는 장로는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들이 그 말씀을 먹고 잘 소화하고 살아가는지 그들의 영적 형편을 돌아보고 살피는 일에 전념하듯이, 집사의 직분은 형제들의 육신적 삶의 형편을 돌아보고 살피는 일에 전념하여 교회라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 착한 일이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가족 안에, 집사의 직분이 없다면, 마치 어머니가 안 계신 집안처럼, 자녀들이 굶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여러분에게 조금은 충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를 한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교회가 하나의 가족으로 여겨지고 집사 직분을 통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하라고 하실 때, 그것은 전적으로 교회 안의 식구들을 책임지는 일에 제한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영적 가정 안에서의 돌봄으로 집사의 직분의 책임을 제한합니다. 우리는 쉽게 교회 밖, 교회 주변을 도와야 한다는 부담을 가집니다. 틀린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 집안의 식구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밖의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자기 자녀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데, 옆집의 자녀들을 먹이고 돌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정상일 수 없습니다.
처음 집사 직분이 세워진 것은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과부들을 공궤하는 일에서 불평과 원망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행 6). 사람들이 적었을 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런데 사도들이 이 모든 일을 감당하다가, “제자가 더 많아지자”(행 6:1) 교회의 규모가 커져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이 일만을 전담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따로 세워야 했는데 이것이 집사 직분의 시작입니다. 집사 직분을 세우자 교회는 평안해졌고, 사도들은 다시 그들 본연의 일인 기도와 말씀 가르치는 일에 전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이것이 집사 직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식구들을 돌보고 먹이는 일 이 집사 직분에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이 말씀은 집사 직분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집사 직분이 아닐지라도, 모든 신자는 형제 사랑의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의 안팎으로 착한 일을 넘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바울 사도는 우선순위를 분명히 가르칩니다. 먼저는 ‘믿음의 가정들에게’입니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개인으로서 어떻게 세상에서 착한 일을 넘치도록 하는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사회생활이라는 주제에서 다루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교회라는 영적 가정 안에서 착한 일이 넘쳐야 하는데, 그 일을 하도록 집사 직분이 주어졌으며, 이 직분은 교회 안에 국한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가 교회 주변, 바깥을 향해 “나 몰라라”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도 역시 다른 기회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루겠습니다마는, 오늘 우리의 주제는 교회가 새로운 영적 가족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책임을 부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속과 교인됨의 특권
이 주제에서 마지막으로 풀어야 할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교인됨의 특권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여 자녀들이 그 집안의 가족 구성원이 됩니다. 이것은 출생부터 시작해서,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끊을 수 없는 최고의 관계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자연적 가정의 구성원이 됩니다. 그렇다면 영적 가족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의 교인 등록과정이 어렵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사실 제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하면, 1/10 정도도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것이 과연 우리 교회를 세워가는 것인가, 허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등록이 가볍고 쉽다면, 교회의 가족됨은 허물어질 것이 분명하고, 교회의 가족됨의 결속은 약해질 것은 불보듯 훤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등록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 곧 영적 출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의 가족이 됩니다. 이것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다 사랑하고 다 책임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역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지역교회는 우리가 영적 가족됨을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단위입니다. 우리는 벧샬롬교회라는 작은 가정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족들을 사랑하고 돌봐야 하는 가족이요, 식구들인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오늘 우리가 살핀 말씀처럼 그렇게 서로를 철저하게 책임지는 착한 일이 넘치는 곳이라면, 교인됨이라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교인이 되는 순간, 그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이렇게 많은 가족을 얻다니 말입니다. 100명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가족으로서 어디 적은 숫자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교인이 됩니까? 과연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더 커지기 위해서, 그렇게 사람들을 원하기만 하면 여러분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주는가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의 가장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까? 이 순종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요 특성입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서 넘어지는 일이 많음에도, “또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가슴을 찢으며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런 교회는 그저 맹숭맹숭한 관계로 서로의 관계가 이어진 교회이겠습니까? 말로는 “벧샬롬가족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충분히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물론, 조금은 느끼고 조금은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의미를 알고 기뻐하고 축하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가족이 되게 하셔서, 벧샬롬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아니, 벧샬롬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아십시오. 여러분은 이 새로운 가족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오늘 명백히 아셨습니까?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숙제를 안겨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가족으로 만드셨듯이, 우리가 가족됨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시기를, 그리고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여정 속에서 우리를 멋지고 깊은 결속을 누리는 가족으로 세워가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