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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설교분류별모음 > 시편강해 - (38).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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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신자 양육 - 고난 (2)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시편강해 38)

시편 38:1-2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8-07-11

말씀내용
1.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지 않는 자녀는 없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지 않는 자녀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하나님의 자녀에게 징계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징계를 받을 때 어떻게 받아야 하느냐입니다. 히브리서의 본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5,9).”
가볍게 받지 말아야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심하여 낙심하지도 말라고 권면합니다. 또 순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태도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자녀들을 징계하실 때, 자녀들이 얼마나 견딜 수 있으며 어느 정도라야 자녀들의 유익에 가장 합당한지 알고 징계하십니다. 심하지도 가볍지도 않습니다. 물론 받는 입장에서는 무겁고 괴롭겠으나,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징계는 언제나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징계를 받는 자녀들이 어떻게 느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어떤 경우에 받은 징계를 다룬 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시라고 표제에 소개됩니다.

2. 애가로서의 참회시
이 시편의 장르는 애가입니다. 슬피 탄식하는 시입니다. 특별히 시인은 개인적인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심한 질병 가운데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징계로서의 질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인식합니다. 특별히 1~4절, 18절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특별히 1절은 6편의 1절과 동일합니다.
1절에서 시인은 자기 질병을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시인은 질병 가운데서 고통합니다. 어쨋든 이 질병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시인은 이 질병이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을 인정하고 참회합니다.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이런 구절들 때문에 애가에 속하는 이 시편은 또한 참회시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참회시는 6,32,51,102,130,143편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본문에 나타난 경우를 일반화하는 위험입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조심해야 하는 태도입니다. 시인이 지금 심한 질병 가운데 고통하고 있는 것은 자기의 범죄함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질병이라는 것이 인간 세상에 시작된 것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질병에 걸릴 때, 그 모든 것이 일일이 우리의 범죄에 대응적 인과관계로 이해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시편 주석을 쓴 피터 크레이기는 시인이 지금 자기의 질병은 죄의 결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인식 자체가 옳은 것이냐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걸리는 질병을 모두 다 우리의 특정 죄와 연결하는 것은 합당한 성경적 접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볼 수 없었던 것은 부모나 그 사람 자신의 죄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요 9:3).

3. 상황: 징계를 받는 시인의 두 가지 고통
우리는 이 시편에서 먼저 징계를 받는 시인이 겪는 두 가지 고통을 읽을 수 있습니다.

A. 육체적 질병
첫번째는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입니다. 특별히 2~10절은 육체적 질병에 대한 묘사가 가득합니다. 시인이 이 질병이 하나님이 주신 징계라고 인식하는 점은 2절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자기 질병을 ‘주의 화살’, ‘주의 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주의 진노’와 ‘나의 죄’를 언급합니다. 살에는 성한 곳이 없고 뼈에 평안함이 없습니다. 살과 뼈는 시인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상처에서는 썩은 악취가 난다고 말합니다. 욥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6절은 시인이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다고 말합니다. 허리는 열기 때문에 뜨겁고 살에는 성한 곳이 없습니다(7). 또 시인은 피곤하고 심히 상했습니다(8).심장은 뛰고 기력은 쇠했으며 시력도 떨어져 보이지 않습니다(10).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라는 말은 어떤 정상적 관점이나 시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기도할 때 마음이 엉뚱한데로 떠내려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물며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이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B. 외로움과 고립감
시인의 육신은 이렇게 질병으로 말미암아 형편 없는 상태이고 고통은 극심합니다. 하지만 시인이 받는 하나님의 징계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적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20절에서는 이런 정신적 고통을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배신과 고립입니다. 친구냐, 원수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그를 멀리하고 그를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이들은 친구들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병들고 고통하고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과 오래도록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오래도록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의 옆에 계속해서 있어주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들이 고난이 깊어질수록 하나씩 하나씩 떠나갑니다. 시인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욥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자녀들은 죽었고, 보다못한 그의 아내는 욥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이런겁니다. 부부 사이라도 어려움이 깊어지면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사랑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관계를 상하게 되고 곁에 있어 주지를 못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그렇습니다. 이제 욥의 친구들입니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멀리서 온 친구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들은 욥의 위로자가 아니라, 욥을 비난하는 자들로 변하게 됩니다. 비록 그들이 여전히 욥의 옆에 있을지라도, 심리적 거리는 거의 원수요 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그들은 욥에게서 멀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욥에게만 일어난 일이겠습니까? 고난의 시간을 지나던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누가복음 23:49입니다.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그들은 다 주님으로부터 멀리 서 있었습니다. 정확히 본문 11절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멀리하고...멀리 섰나이다.” 본문이 말하는 거절과 고립을 주님은 온전히 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이럴진대, 원수와 대적들은 어떠하겠습니까? 12절입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원수들은 시인의 불행을 그냥 놔두지 않고 파멸에 이르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정확히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넘어짐과 불행을 기뻐하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남의 불행을 자기들의 행복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19~20절은 많은 원수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시인을 부당하게 미워하고 시인이 선을 행한 것 때문에 대적하면서, 악으로 선을 갚는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이 심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낍니다. 이 외로움과 고립감은 사람들에게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으로부터도 자기가 버림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만큼 외롭고 고독한 느낌입니다. 21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일을 이 시편은 그대로 잘 보여줍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그의 육체와 영혼이 얼마나 어려운 상태에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4. 시인의 대처방식
이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시인이 어떻게 이런 고통과 고립에 대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요점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A.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라.
첫번째로 시인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시인이 받는 고통은 우연히 재수없게 당하는 고통이 아닙니다. 이것을 징계로 이해하는 시인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과 진행과 결과는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는 2절에서 ‘주의 화살’, ‘주의 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모든 고난은 주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께 바른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황 가운데 처하더라도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고 선하신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것을 정확히 알았기에, 기도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특이한 점은, 자신의 고통을 말하다가 기도하고, 또 말하다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한다는 점입니다. 그 첫번째가 9절입니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그리고 두번째로 나오는 기도는 15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왜 시인이 이렇게 기도합니까? 어떻게 시인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의 열쇠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시각을 놓치면, 결코 그는 바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B. 침묵과 기도
두번째로 시인이 하는 것은 침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에 대해서야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마는, 원수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그들에게 반응하지 않겠노라고 말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그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고 자기들의 행복으로 삼으며, 자기를 파멸로 몰아넣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자들을 향해 차라리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따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적절하고도 용감한 처신이다. 악의에 찬 비방에 대한 거룩한 무관심은 진정한 용기이며 현명한 방책이다.”범죄한 시인은 이 일로 인해 원수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시인--하나님의 자녀--을 변호해주실 수 있으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들을 응대하는 대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시인이 왜 이렇게 반응합니까? 그는 반박할 말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자기 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로 말미암아 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인식하는 시인은, 그들을 향하여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상대하는 대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침묵으로 응대하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15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응답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 확신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흡족함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둘째로 시인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슬픔 가운데서 죽게 하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세번째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의 고백을 들으시고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18절입니다.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끝으로 시인은 악인들이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19~20절입니다. “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5. 예수님을 생각하라.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록해 놓으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범죄하고 하나님은 범죄하는 자녀들을 징계하심으로 바로잡으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도 징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심한 육체의 고통을 짊어질 수 있고, 사람들로부터의 배신과 고립을 겪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기도 합니다(21).
이 모든 일을 겪을 때, 하나님에게 징계를 받을 때, 시인이 보여주었듯이 이것을 아십시오. 첫째, 이 모든 일의 시작과 진행과 결국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둘째로 여러분을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차라리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여러분의 시선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하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육체의 고통과 사람들로부터 받으신 배신과 배척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하신 이 모든 일은 왜 일어났습니까? 죄가 없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결국 주님께서 받으신 육체의 고난과 외로움 그리고 고립은 죄 때문에 받으신 형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1~25).”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 받지 않게 하시려고 친히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모두가 다 우리를 멀리 할 때 조차도, 주님은 우리가 서야할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시인은 이 모든 징계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보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 시편에는 시인의 질병이 치유를 받았다는 암시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그가 분명한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 속에서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은 종종 이 질병으로부터의 치유이지만, 언제나 답을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치유가 일어날수도 혹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치유가 일어나든지 일어나지 않든지, 성도들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답이시고,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그분의 돌보심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응답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다는 그 사실은, 여러분이 인생의 생명줄을 붙잡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