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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 삶 - (6). 믿음과 애정

골로새서 3:1-4, 고린도후서 5:7, 시편 115: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1-26

말씀내용
믿음을 여러분은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믿음은 애정을 두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마음을 두는 것, 몰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은 애정을 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볼텐데, 믿음의 이 요소가 왜 중요한지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1. 두 가지 질문 (고후 5:7; 엡 1:17,18)
먼저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첫째, 신자는 어떻게 성숙에 이르게 됩니까? 신자는 인격과 성품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습니까?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거듭난 신자라면, “나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함에 대한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신자의 참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숙에 이르는가? 어떻게 성화가 되는가?”는 쉽게 흘려 넘길 질문은 아닐겁니다. 매일 기도하고 매일 성경 읽으면 됩니까? 또는 매일 말씀을 따라 적용을 한 가지 이상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은혜의 수단들을 무시한 채 성화에 이를 수는 없지만, 성경은 그 답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인 복음의 약속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를 믿음으로써 신자는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면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갑니다. 선행의 축적이 내면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변화는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에 근거하여 신자의 삶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고 할 때,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바울 사도가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도후서 5:7).”고 했을 때, 그는 어떤 삶을 생각한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믿음이 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눈이 안 보이면 정상적 생활을 할 수 없듯, 신자가 믿음의 눈이 어두우면 정상적 믿음 생활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구했고,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엡 1:17,18). 믿음의 눈이 어두우면 믿음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추상적일수록 그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허구적인 믿음일 가능성이 큽니다. 가령,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아닌지 설명해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믿는다고 말합니다. 교회생활에도 익숙합니다. 믿음은 관념적입니다. 믿음의 대상과 내용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그 믿음에 반대되거나 상충되는 것들을 분별해낼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은 기독교인의 모든 외형적 모습을 보일지라도, 사람을 내면으로부터 변화시키는 힘이 없습니다. 그 믿음은 관념일 뿐 실재가 아닌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구체적이고 선명한 믿음의 내용을 가질 뿐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일을 합니다. 잘 모르는 대상에 진정한 애정을 쏟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고 깊게 깨닫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일례로, 복음을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라는 사실로 이해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인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와 율법이 정한 형벌과 저주를 남김 없이 쏟아 부으셨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그 믿음을 보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성자 그리스도를 받아 주시듯이 의롭다고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하고 영접해 주시며, 그 사랑은 영원히 변함이 없어서 우리 일생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이 사랑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끊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생토록 자녀들을 참아 주시며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릅니다. 물론 믿음은 단순히 어떤 진술에 대하여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복음의 사실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은 사람의 전인격적 애정으로 연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복음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일생토록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신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2. 미혹하는 마귀의 역사와 진리 전쟁 (요 8:44; 딤후 3:7)
역사적으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요 8:44) 마귀의 일은 거짓과 유사 진리로 참된 복음의 진리를 흐리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 꾸준히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진리의 싸움의 한복판에 처하게 되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그 의미를 꾸준히 배워가야 합니다. 그러니 날마다 주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자의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고 그 믿음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교만으로 이끌고, 자신이 복음을 이미 다 알고 있고 더 배울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합니다. 우리가 쌓아온 신학 지식과 오랜 교회 생활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디모데후서 3:7).”고 지적한 것과 같은 일들이 우리 자신에게 일어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미혹을 받아 경건의 능력은 없는데 경건의 모양 때문에 교만함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가르침도, 배움도 찾아보기 어렵고, 게다가 모호하고 애매한 설교들이 난무합니다. 진리는 선명한 것인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갈망,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이 자리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저 “나는 크리스천이야,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야.”하는 정도에 머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 믿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선명하게 알고 날마다 그 복음을 자신에게 전하고 주님께 애정을 두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참된 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위의 것을 찾아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골 3:1-4; 2:20; 요일 3:2)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골 3:1,2). 이것은 어떤 행동 규범이나 도덕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서신의 전반부인 1-2장에서 골로새 교회가 처한 위기 상황에 맞추어 복음의 도리를 설명하고 나서, 후반부인 3-4장에서 복음의 도리에 따른 도덕적 권면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어떤 도덕 규범이나 행동 지침을 말하기 전에, 전제를 먼저 말합니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말은 ‘구하고, 바라고, 갈망하고, 심지어 연구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생각한다는 말은 ‘…에게 마음을 주다, 마음을 두다, 몰두하다, 의향이 있다’와 같은 뜻입니다. 이 두 단어는 어떤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 의향, 목적, 갈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거기에 너희 삶의 목적을 두고, 늘 그것을 염두에 두며, 거기에 마음을 몰두하고 애정을 쏟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위의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절에서 바울 사도는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위의 것은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을 가리킵니다. 즉, 그리스도가 계시는 하늘 보좌, 하나님 우편에 너희 마음을 두라는 것이고, 그리스도께 마음과 애정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둘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 복음이 낳은 신자가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변화입니다.
찾고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지능적 활동이 아니라 의지적 활동이기도 합니다. 목표와 동기가 다 연결됩니다. 전인격적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아는 신자들은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복음 이전의 삶은 한 마디로 땅의 것에 몰두하는 삶이었습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와 애착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지금, 더 이상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앉아 계시는 하나님 우편, 곧 위의 것을 바라고 애착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의 생각을 가득 채우는 것은 위의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목적하고 염두에 두고 사는가는 그가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도덕 규범이나 행동 지침을 말하기 전에, 신자의 삶의 방향, 목적, 태도, 애착의 대상을 먼저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우리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할 근거를 3:1에서 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게 하는 전제입니다. 2:20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이라고 했는데, 3:1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말과 함께 짝을 이루어 복음의 전제를 적용합니다. ‘복음이 너희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맞다면’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새로운 삶을 살아갈 힘의 원천이 우리의 행위나 의지에 있지 않고 복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롬 6:1-14). 이 복음의 근거에서 신자는 일생토록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일에 애착과 애정을 드리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3절에서 ‘너희가 죽었고’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입니다(갈 6:14). 그리고 신자의 영혼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지금은 그리스도가 숨겨져 계심과 같이 감추어져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우리 자신들에게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음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 감추어졌던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충만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소망을 이렇게 쓴 바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한1서 3:2).”
본문에 의하면, 신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 그리고 일생토록 지속해야 하는 일은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것 즉 그리스도께 애정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스티브 칠더스(Steve Childers)는 믿음이 두 가지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우리 지성과 마음의 애정을 우상들이 아닌 그리스도께 맞추는 일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말하는 바,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땅의 것이 의미하는 것은 각종 마음의 우상들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특권들을 끊임없이 누리고 기뻐하게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새 피조물이 된 나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말함으로써 복음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이 믿음이 하는 일이지요. “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2:20)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3:1) 존재이지!”라는 자기 인식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잡는 믿음이 쉽지 않은 것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3:3). 우리는 믿음을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 피조물이 됨으로써 누리게 된 모든 복음의 특권과 약속들을 기억하고 누리고 기뻐해야 하는데, 우리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완전하고 충만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적용하여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 그 애정, 그 믿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신자가 일생토록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회개와 함께,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신자의 삶은 회개와 믿음이 반복되는 패턴으로 사는 것입니다.


4. 마음의 우상 식별하고 제거하기—애정으로서의 믿음 (시 115:8; 고전 10:31; 벧전 1:8)
그런데 믿음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관념적 믿음에 머물지 않고, 우리를 내면으로부터 변화시키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인격적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우리는 마음의 우상들을 식별해서 제거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관념적 믿음과 실재로서의 믿음의 차별점이 있습니다. 관념적 믿음은 결국 마음의 우상들을 안고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대신, 점점 자신이 섬기는 우상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편 115:8).”고 하신대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마음에 숨겨진 우상들을 식별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 마음과 애정이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대신, 땅의 것을 향하고 생각할 때, 바로 그 땅의 것이 우상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애정을 주는 대상, 몰두하는 대상,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동기, 목표와 연결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우상들은 무의식 속에 숨어서 기생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통해 우상을 식별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신뢰하며 무엇을 무서워하는가?” 또는 “이것만 있으면 나는 정말 행복할거야” 또는 “이것이 없어서 나는 지금 너무나 불행해”라고 느끼게 하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마음으로 섬기는 우상의 정체인 것입니다. 가령,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존경을 받지 못하는 환경처럼 무서운 게 없습니다. 그 존경을 얻어내기 위해 그는 모든 일을 합니다. 이때 존경이 그가 섬기는 마음의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주님께서 비천한 죄인인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수치를 마다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합니다(빌 2:5-11). 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용납하고 인정해 주셨으니 이제 나는 누군가로부터 존경을 갈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존경받기를 추구하는 데서 자유롭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리스도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집니다(고전 10:31). 우리는 회개에서 우상을 깨뜨리고, 믿음에서 우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습니다.
우상들은 우리에게 약속을 줍니다. “네가 원하는 용납, 통제, 명성, 성공, 안정감, 기쁨, 지식, 인정, 존경을 내가 줄 수 있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거짓의 아비 마귀가 우상들을 내세워 남발하는 허위 약속들일 뿐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이미 다 얻었고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우상들을 제거하는 최고의 행위는 복음이 우리에게 보장하는 특권들을 붙잡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애착과 애정을 두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우상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회개할 수 있고, 그 우상의 능력을 무너뜨리는 구체적 복음의 약속에 우리 마음을 드림으로써 복음을 적용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애정과 열망을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특권들을 성경에서 확인하고 그것을 누리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결코 마음의 우상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그 믿음은 실재로서의 믿음이 되고, 여러분의 내면에서 여러분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삶에서 불만족이 깊어 가는 만큼, 여러분은 마음의 우상들을 만들어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복음의 진리와 약속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유도 작동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박해 속에서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베드로전서 1:8).” 그들은 직접 보지 못했던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복음의 전제 위에서 권합니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모든 애정을 쏟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여러분을 내면에서부터 여러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인격과 성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그 믿음은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애정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