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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 삶 - (4). 마음의 문제-율법과 복음

로마서 7:7-13, 시편 40:8, 로마서 6: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1-12

말씀내용
1.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고민
20세기 후반, 영미권에 큰 영향을 미쳤던 한 미국 목사님의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는 스위스 라브리를 통해서 예언자적 사역을 감당했던 프란시스 쉐퍼입니다. 쉐퍼는 자신의 저서 『진정한 영적 생활 True Spirituality』(생명의말씀사, 1975)의 서문에서 자신을 큰 영적 위기로 이끈 한 가지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실재의 문제(the problem of reality)”라고 불렀는데 그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이것은 양면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내가 보기에, 정통주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노라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성경이 그토록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사건들 속에 있어야 할 사실상의 핵심적인 실재를 별로 찾아 볼 수가 없었더라는 점이다. 둘째로, 내 자신의 실재도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초창기 보다도 더 약화되어 있는 모습으로 점점 나타나더라는 점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내 자신의 전반적인 위치를 재고해 보아야 하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세대에 정통 신학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올바른 교리는 많지만 진정한 영적 삶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모든 교리와 사역 활동을 꽤 잘 수행해왔지만 자신 역시 진정한 영적 변화를 거의 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불가지론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그 초기의 시간으로 돌아가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던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부분을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받은 교훈이 많이 있지만, 우리들의 ‘현재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의 의미에 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많이 들어보지 아니 했다는 것이 문제점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후에 “참된 경건은 머리와 의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문제라는 말은 기독교와 신앙이 단지 정통 교리에 대한 동의가 아니며, 또는 어떤 행동 양식에 속하는 의지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고,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를 따집니다. 청교도 목사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은 “종교(신앙)가 의무이기를 그치고 기쁨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회심되었음을 알았다(I knew I was converted when religion stopped being a duty and bacame a delight).”고 썼을 뿐 아니라, “인간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그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서 측정된다(The worth and excellency of a soul is to be measured by the object of its love).”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마음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가 한 말들은 우리가 곱씹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고민은 사역자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공감하는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르고 좋은 신학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대단한 사역의 성공을 거둘 수도 있지만, 정작 참된 경건의 실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거나 희미한 정도로 밖에는 발견할 수 없는 채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팀 켈러에 의하면, 여기에는 우리의 “약한 기도 생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무시당하는 느낌에 대한 빈번한 갈등과 고민, 종종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사역에 대해 비판적이 되는 것, 반복적인 자기 연민, 삶과 일 모두에서 불안과 기쁨을 상실하는 것 등, 우리가 항상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특정 경고 신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부분은 쉐퍼가 가장 먼저 깨달았던 바, 기독교 신앙이 마음의 문제라는 점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이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일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2. 현재를 위한 복음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의 모든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만을 제거하셨다는 사실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 일일 뿐 아니라 후일 믿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죄 없다고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천성에 들어가기까지 이 혼란스럽고 죄로 망가진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신자의 현재에 어떤 의미와 어떤 힘을 가지는 것입니까?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설명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이단들이 출몰하였고, 구원파도 그 한 종류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은 지성주의와 도덕주의 혹은 감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의 삶에서는 자기 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거나 상당한 실패감과 무기력함 사이를 오가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목적은 단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주님이 대신 받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에서 나아가, 우리를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로 만들고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목적의 두번째 부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범죄함으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칼빈의 말대로 우상 공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마음의 우상들을 만들어 세웁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에 계속해서 간섭하십니다. 마음의 우상들을 식별하여 제거하게 하시고 하나님만 예배하도록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변화시켜 가십니다. 이것은 현재적 변화일 뿐 아니라, 어떻게 복음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일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복음은 과거와 미래만이 아니라, 또한 현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확인해볼 텐데, 제가 예전에 [율법과 복음]시리즈에서 이 본문을 자세하게 다룬 적이 있기 때문에, 본문을 동일한 방식으로 자세히 다루는 대신, 오늘의 주제와 연결하여 적용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3. 율법에서 복음으로 (롬 7:7-13)
바울 사도는 7절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합니다. 율법 덕분에 죄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율법의 첫번째 기능은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3절에서 말하듯이,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십계명의 열번째 계명을 언급했습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b).” 하나님의 법인 율법은 행위의 문제만을 다루지 않고 마음, 내면의 문제를 다룹니다. 세상의 법에 의하면, 탐을 내도 그것을 불법한 방식으로 취하지 않았다면 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그것을 죄로 정합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 앞에서 정죄를 받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정죄하는 기능을 합니다.
하지만 9절은 우리가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 율법을 본래의 기능과는 정반대로 자기 의로움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이라는 말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용도를 알지 못했을 때를 가리킵니다. 바울에게는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이 그랬습니다. 그는 율법을 알았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내가 살았더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않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바울의 고백처럼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율법의 기준을 만족시키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이것이 자기의 의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매우 신랄하게 꾸짖으셨던 것이지요.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우리의 신앙이 율법주의로 흘러가게 될 때 우리 안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마음이 아닌 행위의 종교로 만드는 일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지만, 성화는 행위로 된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렇게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키는 태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결국 율법주의로 흘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주의는 마음 없는 순종이고 섬김입니다. 율법주의가 가져다 주는 열매는 바울의 말처럼, 자아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도 많이 하고, 말씀도 많이 보고, 교리도 많이 알기 때문에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와 말씀이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는다면, 거기에서 자아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격 없는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격하게 되지요. 하지만 율법주의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은혜의 수단으로 주어진 말씀과 기도와 기타 여러 가지 선한 것들이 자기의 의로움을 증명하고 과시하는 수단이 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낮추어 보고 심지어 비난하게 되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기만성이 이 어리석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8절은 죄의 기만성을 놀랍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죄가 계명 곧 율법을 지렛대로 이용해서’라는 말입니다. 지렛대를 이용하면 할 수 없던 일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렛대로 이용해서 죄를 더 쉽게 짓는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죄가 계명을 지렛대로 이용해서 나의 양심과 도덕 관념과 기준의 저항을 제거하고 자기의 목표를 이루어 낸다는 말입니다. ‘온갖 탐심’이라는 말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탐심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알게 된 죄는 소극적으로 넘어지는 차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 목적을 위해 율법 조차도 이용하여 자기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어 냄으로써 목적을 성취할 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일례로,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우리는 온갖 경건의 모습들을 행함으로써 경건한 사람이라는 영예를 얻고자 하는 탐심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나는 율법을 너무나 잘 지키고 사는 성도이다. 나는 율법을 사랑해서 밤낮으로 율법을 읽지 않는가? 나만큼 힘들게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죄의 기만성은 이런 식으로 율법을 이용하여 탐심을 이루어 내고 맙니다.
그러나, 9절 하반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율법을 통해서 죄가 죄로 드러나게 되면 그때 시퍼렇게 살아있던 자아는 죽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이며 하나님께 반역한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날 길이 없는 존재임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드러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자기 영혼에 대해서 진정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고 필사적으로 구원 받기를 갈망하며 자신을 이 처참한 자리에서 건져줄 구주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9절에서 말씀하는 바,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말씀한 것도 바로 이 순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13).” 죄를 깨닫고 절망하게 하는 것이 율법의 일차적 목적입니다.


4. 복음에서 다시 율법으로 (겔 36:25-27; 고후 5:17; 롬 12:2; 6:1-2)
바로 이때, 이런 자각이 있을 때 전해지는 복음은 그야말로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께서 모두 다 감당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 뿐이 아니지요. 복음은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써 율법의 의를 얻으셨다고 말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의로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얻을 수 없는 의로움을 믿는 우리에게 주시려고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덕택에, 우리는 죄의 형벌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심으로써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만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원인이나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죄를 드러나게 함으로써 절망하게 했다면, 복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합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증오와 분노를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바꾸어 줍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완전하게 바꾸십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죄인에게 행하시는 중생, 거듭남의 기적입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는 것이지요(겔 36:25-2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고후 5:17),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율법을 행하고 싶은 마음 뿐 아니라 그 율법에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무엇인지 묻게 됩니다(롬 12:2). 다시 율법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 생활의 또 하나의 함정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여 주셨으므로 이제는 율법 없이 살아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무율법주의 또는 율법폐기론이라고 말합니다. 무율법주의에 대한 바울 사도의 대답을 직접 들어보지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 “이제 은혜의 시대이니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는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죄보다 더 크니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대해 바울 사도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무율법주의에 대한 성경의 대답입니다.


5.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복음적 반응 (롬 7:12; 막 12:30-31; 시 40:8)
복음의 은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시 율법으로 인도하지만, 그 율법은 더 이상 정죄하는 기능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기능을 하게 되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드디어 마음으로 순종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을 만날 때 가져야 하는 복음적 태도는 율법주의도 아니고, 방종도 아닙니다.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율법의 모든 계명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과 완전의 기준을 봅니다. 가령,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30–31).”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지요.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자신을 사랑함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이 말씀 앞에서 “이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지만 나에게는 이 말씀을 순종할 능력이 없어”라고 인정함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이 계명을 완전하게 순종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나를 용납해 주셨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나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이 계명을 순종하기를 원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이렇게 행하는 것은 여러분을 자기 의로 데려가지 않을 것이기에 안전하고, 무기력함과 실패감으로 주저 앉게 하거나 방종으로 데려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비로소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과 교감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8).” 이렇게 주님을 섬길 때, 신앙은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서 실재가 되고, 우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실제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마음의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