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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 삶 - (2). 너 자신을 알라

이사야 64:6, 레위기 13:45-46, 로마서 7: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0-29

말씀내용
오늘 저는 여러분 모두를 낙심시키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을 낙심하고 절망하게 할 수 없다면, 복음은 여러분에게 형식적 개념이거나 공허한 외침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말했는지 정확하지 않은 이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격언은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앞마당에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일반 은총 안에서의 지혜를 보여주는 격언입니다.
오늘 제가 전하는 말씀은 지난 주에 상고한 말씀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때 자신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된다는 것이 지난 주일 말씀을 통해 살펴본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뵈올 때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데, 이 두 지식(인식)이 일평생 지속적으로 자라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자신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신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1.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려운 이유 (창 1:26-27; 6:5)
먼저 “너 자신을 알라”는 오늘 설교 제목을 생각해 보지요. 이 말은 인간이 자신을 알기가 어렵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엄청난 지성으로 인공 지능까지 만들어내는 똑똑한 인간이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또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알았을까요? 로버트 오펜하이머나 스티븐 호킹은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쉬운 과제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자나 과학자에게 물어서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일 겁니다. 게다가 근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류가 가지게 된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너무나 탁월해서 인간은 그 이성의 능력으로 인류를 지속적인 진보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존재입니다. 20세기 전반기에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긍정적 관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공교육기관에서 받는 교육 외에도, 많은 매체들도 이런 영향의 선상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미치는 그 영향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적 인간관에 한치의 자리도 내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거부감이 드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 내가 세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는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판단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피조세계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피조세계에 인간과 비길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창 1:26-27).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타락한 존재로서 그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악하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창 6:5). 이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극에서 극에 이를 만큼 넓고 다양합니다. 고대 사상에서부터 성선설과 성악설이 다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을 아는 것은 어렵습니다. 성경을 통해서가 아니면, 그것은 심지어 불가능한 과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알게 되면 우리는 절망한다.
오늘 본문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타락한 인간 본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은혜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범죄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유쾌한 현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죄를 숨기고 발각되지 않으리라는 헛된 소망으로 살아가든지, 잘못이 드러나면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때로는 죄가 명백히 드러나도 그것을 부인하는 뻔뻔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세상에서 흔히 일어납니다. 그러나 특별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열심과 행위로 치장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미화하거나 아니면 종교적 성취를 통해 의로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동일하게 십자가에 드러난 복음의 은혜를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무감각하고 무감동한 종교생활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죄를 미화하거나 자신의 의로움을 대단하게 여기게 되면, 거기에서는 은혜도, 거룩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슬프게도 교회 안에 있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런 자리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자신의 영적 빈곤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까지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서 별 힘이 없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신을 진정으로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적 빈곤을 알았던 때가 있습니까? 그것을 종종 기억하고 인정합니까?


A. 자신의 부정을 아는 것 (레 13:45-46)
본문에 따르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첫째로 자신의 부정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라고 할 때, 부정하다는 말은 레위기의 제사법적(의식법적) 용어인데, 특히 나병 환자에게 붙여지는 말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그가 만지고 접촉하는 것들이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특히 나병으로 부정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소와 회중에게서 멀리 떨어져 광야에 격리되어 홀로 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혹시라도 다가오려고 하면, 그는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크게 외쳐 누구든지 자신에게 다가올 수 없게 해야 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위기 13:45–46).” 이사야 선지자가 부정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의 외적 행위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넘어, 존재 자체가 더럽혀져 있고, 인격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이 더러운 게 아니라 물 근원이 오염되었다는 말입니다.


B. 인간의 의로움은 다 기름 때 묻은 걸레다. (창 6:5; 눅 18:21; 롬 7:18; 눅 18:9)
둘째로, 그런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 악하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6:5의 진술과 맞닿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세기 6:5).”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는 말씀은 사실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더러운 옷’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본래 여성의 생리혈이 묻은 천을 가리킵니다. 알렉 모티어는 이 말을 현대인들이 알아듣기 좋게 ‘우리의 최선의 노력은 모두 기름 때 묻은 걸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의 의가 그렇다는 말은 정말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 우리의 눈물, 우리의 선한 행위들이 모두 더러운 걸레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선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모든 의로운 행위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부자 관원은 자기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킨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주님 앞에 내놓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눅 18:21).
여러분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로마서 7:18).”고 한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이 죄를 자각할 때 영혼은 ‘자기 의’라고 하는 것을 지옥에서 꾸며낸 가장 혐오스러운 거짓말로 간주할 것이라고 하는 확신합니다. 또한 그때 영혼은 모든 자기 신뢰를 영혼이 빠져들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기만이자 속임수라고 간주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회개도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명백히 잘못되고 부정한 일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의롭다고 여겨질 자신의 모든 행위 속에 숨겨진 죄악들을 찾아 회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서(눅 18:9-14) 바리새인이 놓쳤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눅 18:9).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던 바로 이점이 바리새인들의 신앙의 패착 요인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성경을 사랑한다고 했던 그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C. 인간의 모든 자기 개선 노력은 무익하고 헛되다.(창 3:7)
세번째로, 본문은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개혁하고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라는 말입니다. 아담은 범죄한 뒤에,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수치와 결핍을 가렸습니다(창 3:7). 죄를 미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 없어질 무화과나무 잎이었습니다. 우리는 갖은 방법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자기 죄악을 미화하려고 합니다. 개선의 노력과 개혁의 시도를 수 없이 반복하지만, 그것들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결심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했습니까? 그런 결심이 여러분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었습니까? 그것들은 모두 시들어가는 잎사귀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고칠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점에서 계몽주의 인간관은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똑똑한 인간이 원자폭탄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죄인의 손에 들려질 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는 표현은 지푸라기가 거센 광풍 앞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듯, 인간의 존재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3. 복음은 반전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시고 환하게 웃으신다고 말한다. (사 64:8; 습 3:17)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이 말씀을 제대로 읽고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면, 우리는 다 부정하고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불신이 가득한 믿음이고, 우리의 기도는 더러운 정욕이 가득하며, 우리의 눈물은 위선으로 가득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교회 안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든 봉사가 다 더러운 옷이고 기름 때 묻은 걸레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그런 행위들에 기대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지, 내가 얼마나 교회를 잘 섬겨왔는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말씀을 연구하고 바른 교리를 알아왔는지에 기대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자신의 죄성의 깊이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이 얼마나 오래 교회 생활을 해왔든지 상관없이 여러분은 믿음의 기초, 복음의 ABC부터 다시 배우셔야 합니다. 부자 관원이 말한대로,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기름 때 묻은 걸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을 무시한 채, 자신을 안다고 말할 수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 상고하였듯이,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즉각적으로 자신의 죄악됨을 보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오래 전 하나님을 뵈었던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한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복음이 반전입니다. 이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 부정한 자이고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걸레이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고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는 허무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시고 환하게 웃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시고 환하게 웃으신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여러분에게 더러운 옷을 빨라고 요구하거나, 시드는 잎사귀 같은 것을 치우고 가죽 옷을 지어 입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로 옷 입혀 우리의 모든 수치를 덮어줍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스스로를 개선하려는 노력,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수고, 기도, 눈물, 봉사들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착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의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수동적 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4:6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래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입니다. 8절에 이 탄원이 희미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이사야 64:8).”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아무 가치 없고 쓸모 없는 진흙일 뿐이며 제 안에는 어떤 선한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손에 맡기오니 저를 빚으시옵소서. 저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한 새 피조물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탄원이 실패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이 탄원은 실패하지 않는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의라도 다 더러운 걸레일 뿐인 우리를 보시고 환하게 웃으십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말입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 3:17).” 이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반전입니다.


4.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복음 (딤후 2:1; 고전 4:3-4; 15:10)
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자신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복음은 우리를 쉬게 합니다. 쉼 없이 자기의 수치를 가리고, 자신의 결핍을 덮으려고 했던 수고를 마침내 그치게 됩니다. 복음은 더러운 걸레 같은 자기 의를 더 많이 쌓으려는 수고를 그치게 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안식하게 합니다. 더 이상 위선으로 자기의 죄악과 수치를 가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죄악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용납하셨고 또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한 그리스도인은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헛된 수고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의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더러운 걸레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의를 통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위대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알량한 의를 쌓아가려는 수고를 그치고,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고 그리스도만을 더욱 의지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영어 표현에 ‘too good to be true’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좋다는 말이지요. 복음은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것이고 너무 좋아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알기까지, 복음은 이런 반전을 여러분의 삶에 가져오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을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거나 사람들 앞에 더 좋게 보이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갖 조건들로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노력이 얼마나 헛되고 무익한 수고인지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게 된 사람은,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고 환히 웃으신다고 선언하는 복음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된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진정으로 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딤후 2:1). 사람들의 모든 판단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린도전서 4:3–4).”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이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고백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