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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우상 - (8)./복음 중심 삶 - (1). 자아의 우상

이사야 6:1-9, 고린도후서 3:18, 출애굽기 33:18-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0-22

말씀내용
자아의 우상은 사실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우상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행복이나 감정, 자유는 물론이고, 돈이나 성공, 권력과 종교, 정치 모든 우상들의 영역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하시지만(고전 10:31), 인간은 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은 이런 일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매우 기만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진심으로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주제인 ‘자아의 우상’은 [하나님과 우상]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이자, 오늘부터 시작하는 [복음 중심 삶] 시리즈의 첫 설교이기도 합니다.


1. 자신을 모르면 자아 숭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막 12:31; 창 3:5; 롬 12:3; 창 3:10b; 단 4:30; 5:22-23).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나는 그러한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질문이 중요하다면 왜 중요합니까? 만일 이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자아의 우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본성적인 것이기에 애를 써서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자기 사랑을 전제하셨던 것입니다(막 12:31). 문제는 이 자기 사랑이 자아 숭배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폴 브라운백의 말입니다. . “자아 사랑의 가장 큰 위험은 자아 사랑은 자아 숭배라는데 있다.”(폴 브라운백). 이것은 ‘비뚤어진 자아사랑’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비뚤어진 자아 사랑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방향성으로 일어납니다. 첫째는 상향적 성질인데, 최초의 범죄 사건에서 보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 보다 위에 놓으려는 방식, 즉 자아를 과도하게 높이려는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는 뱀의 유혹에 하와와 아담은 굴복했던 것입니다. 이 유혹의 본질은 인간의 비뚤어진 자아 사랑을 향한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이 비뚤어진 자아 사랑의 상향적 성질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로마서 12:3).”고 말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이 비뚤어진 자아 사랑의 상향적 성질을 조심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비뚤어진 자아 사랑의 두번째 방향성은 하향적 성질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이후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b).”라고 대답하지요. 아담은 스스로의 모습에서 결핍과 수치감을 느꼈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비뚤어진 자아 사랑의 하향적 성질은 부끄러움의 죄를 감추려는 시도와 짝을 이루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비뚤어진 자아 사랑의 하향적 성질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으로 자신의 사실적 현실을 덮으려고 시도합니다. 기만적 요소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셨을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가 아니라 “내가 범죄하였으므로 두렵습니다”라고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범죄를 수치감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덮었습니다.
이 비뚤어진 자아 사랑의 두 가지 성향은 범죄 이후에 줄곧 인간의 본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다니엘서에서 보는 바벨론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단 4:30)이나 벨사살(단 5:22-23)에게서 상향적 성질의 극치를 봅니다.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다니엘 4:30).” 물론 이들은 제국을 호령하는 왕들이었지만, 이런 성향이 왕이나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이런 비뚤어진 자아 사랑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만 주어지면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숭배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경우에, 이 비뚤어진 자아 사랑은 하향적으로 나타나지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도 여기에 속합니다. 또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다양한 방식의 자기 비하 또는 자기 혐오의 형식으로도 나타납니다. 자기 비하는 겸손이 아니고, 자기 혐오는 비뚤어진 자아 사랑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비뚤어진 자아 사랑의 드러남이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사람은 자아를 숭배하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생각이 자아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이 자아 숭배입니다.
이런 식의 비뚤어진 자아 사랑과 자아 숭배 현상은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관계가 깊습니다. 자기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사람은 결국 자아 숭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더 높아지고 더 나아지려고 하거나, 반대로 못 나서 만족이 되지 않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무언가로 치장하고 덮으려고 애를 씁니다.


2. 자아의 문제는 껍데기로 해결할 수 없다.
자아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착각이 있습니다. 자신을 포장함으로써 자아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그것이 상향적이든 하향적이든 비뚤어진 그래서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는 자아 사랑은 학벌, 스펙, 고가의 제품들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자아를 설명해주는 어떤 요소들은 될 수 있을지 언정, 나 자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내용을 싸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껍데기가 내용일 수는 없지요. 우상을 숭배하는 일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자아 숭배가 가져오는 두려움은 자신의 진짜 모습이 발각될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자기를 치장하고 있는 것들이 벗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불편합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말입니다. 때로는 이런 수식이나 장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점점 더 자신의 내면에서는 불편함이 가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자기 자신 조차 대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낳을 뿐입니다.


3.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때 진정한 자신을 알게 된다(사 6:1-4; 출 33:18-20; 사 6:5).
우리가 언제 어떻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이건 우리 인생에서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정성 있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끊임 없이 채워지지 않는 자아의 만족을 추구하게 될 것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자아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뵌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뵈었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읽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기록이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의 경험입니다. 그는 성전에서 환상 중에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이사야 6:1–4).”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했습니다.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들이 스랍들 조차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없어 그 두 날개로 자신들의 얼굴을 가렸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려야 했습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성전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고 그 영광스러운 임재는 성전에 충만한 연기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하자(출 33:18), 하나님께서는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지만.. 네가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출 33:19-20).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말을 사용할 때 그 일차적 의미는 구별됨, 분리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구별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설 때,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뵈었을 때 이사야가 보인 반응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이사야 6:5).” 저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이렇게 뵙기 전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몰랐다거나,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거나, 자신의 죄인됨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알았을 겁니다. 심지어 충분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고백하는 말(사 6:5)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는 화들짝 놀란 것입니다. 그는 대경실색(大驚失色)했습니다. 두 가지 인식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 하나님은 자기가 생각하던 거룩하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생각과 말 속에서 알던 하나님이 아니라,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은 자기가 이제껏 알았고 생각했던 대로의 죄인이 아니라, 그것과 비교할 수 조차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놀라고 두렵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비추어진 자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종종 노래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기도 합니다. 또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사람들과 우리 자신들을 무의식적으로 비교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정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때, 우리는 이사야 처럼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 자신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상시에 생각하던 죄인인 우리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그 모습을 발견한 결과, 우리가 느끼는 놀라움과 두려움은 이내 우리를 절망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었던 이 기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때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진정으로 보게 되고 자신의 죄인됨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우리를 절망으로 인도한다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드러난 내 죄인됨의 모습은 거룩한 진노와 심판 외에는 바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은혜—십자가의 은혜 (사 6:6-7; 엡 1)
그러나 이사야의 이야기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절망하던 이사야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이사야 6:6–7).”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만 한다고 느끼게 했던 이사야의 죄악을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시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이사야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살려 달라고 구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스랍을 통해 이사야의 죄악을 사하시는 감당 못할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당신의 선지자로 파송하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사 6:8). 죄용서의 은혜를 입은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았고 도리어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보냄을 받게 됩니다.
이사야에게 일어난 이 사건을 우리는 신약성경의 렌즈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받아야 할 죄인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이 일어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 우리의 죄 용서, 우리의 구원은 모두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빠 혹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유효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반복하고 반복함으로써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이사야의 죄악이 사해지는 은혜의 경험도 이사야 선지자 자신이 후일에 예언했던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주어진 것임은 분명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고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을 때 느꼈을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일이 우리 인생에서 처음 일어나게 될 때, 그것을 회심(Conversion)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자신의 실존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이제 조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의 간극이 십자가의 은혜로 채워졌음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회심의 순간에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죄인됨의 실체를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자신의 죄인됨의 실체를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무한 영광이고 무한 은혜임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식하는 십자가의 은혜가 점점 더 커지고, 우리 삶을 사로잡아 인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을 누리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5. 자아 숭배에서의 자유 (사 6:8-10)
다시 본론으로 가볼까요? 이사야의 이 사건이 자아의 우상 숭배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었을 때, 그리고 나아가 그 무한한 간극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비뚤어진 자아 사랑, 곧 자아의 우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워 보내십니다(사 6:8).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선지자로 파송하시면서, 이사야의 사역이 실패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사 6:9-10). 백성이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아의 숭배에서 자유함을 얻은 이사야는 사역의 실패가 보장된 부르심에 응답하게 됩니다.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매여있고 자아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에 붙잡혀 있으며, 자아 숭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이 부르심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복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인간은 끊임 없이 자신을 치장하려는 노력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의 실체를 인식했을 때, 그런 부질 없는 노력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경험한 죄악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 은혜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은혜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십자가 은혜로 죄인 괴수와 같은 자신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여 주셨다는 이 불변의 사실 앞에서 우리는 소망을 발견합니다. 삶은 자아를 끊임 없이 치장함으로써 부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만 부요해질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 사람은 자아 숭배에서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자신의 약함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리거나 수치감이나 절망감으로 향하지 않고, 자신의 강점 때문에 자만하거나 우쭐대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은혜가 자유하게 한 사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6.성숙의 여정—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참된 인식에서 자라감 (고후 3:18; 2:17; 4:2)
그렇다면 신자의 성숙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숙은 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참된 인식에서 자라가는 여정입니다. 회심할 때 알게 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한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의 실체를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인식에서 우리가 자라가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을까요? 세월이 흘러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고, 덤덤해질 것이고, 가슴은 차가워 질 것입니다. 종교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인의 마음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입니다. 자기 의에 붙잡히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자아 숭배로 돌아가는 배역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게 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어야 하고 그 거룩하심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그 삶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어떻게 그 일이 우리 삶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예배 가운데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자기 백성에게 나타내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놀랍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주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2:17과 4:2에서 반복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주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물을 타지 않고 받은 그대로 전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린도후서 2:17).”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린도후서 4:2).”
하나님은 물론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것처럼 당신의 거룩하심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드러내시는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거룩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죄인됨의 실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죄인됨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그 간극을 메우는 십자가의 은혜를 점점 더 커지고 그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지속될 때, 우리는 모든 형태의 자아 숭배로 돌아갈 위험은 줄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패니 크로스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 감격을 이렇게 찬송시로 고백했습니다(찬송가 288장 3절).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점점 더 인식하는 일에서 자라갈 때, 자아 숭배에서 자유함을 얻고 십자가의 은혜로 참된 성숙의 여정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진정으로 우리를 자아로부터, 자아 숭배로부터 자유하게 능력입니다. 일평생 이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 살게 해주시기를 자비하신 주님께 은혜를 더욱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