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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우상 - (7). 정치의 우상

사무엘상 12:20-21, 요한계시록 13:1-18, 창세기 18: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0-15

말씀내용
1. 두 짐승 (계 13; 16:13; 19:20; 20:10)
우리는 지난 주일에 종교의 우상을 다루었습니다. 종교의 우상에는 기만의 요소가 작동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려는 마음으로 열심을 다하지만, 미혹을 당함으로써 결국 우상 숭배의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우상은 정치의 우상입니다. 이것은 세상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여기게 하고, 정치 지도자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우상 숭배의 형태입니다. 정치의 우상과 종교의 우상은 사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으로 각각 상징되었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종교의 우상, 즉 거짓 선지자를 가리키고(계 16:13; 19:20; 20:10),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오늘 상고할 주제인 정치의 우상을 상징합니다. 이 두 우상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고 유혹하여 용 곧 마귀를 섬기게 하는 존재입니다.


2. 사무엘 시대에 일어난 정치의 우상화 (삼상 12:1-2,19-21; 8:5,7-8,19-20)
본문인 사무엘상 12장은 사무엘의 유명한 고별 연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 연설에서 백성들의 요구로 자기가 왕을 세운 일을 언급함으로써 연설을 시작합니다(삼상 12:1-2). 사무엘은 그들이 왕을 구한 일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라고 분명히 지적합니다.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삼상 12:17b).” 하나님께서 우레와 비로써 이 잘못을 확증하시자,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서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삼상 12:19b).”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기서 사무엘이 백성에게 한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사무엘상 12:20–21).”
그들이 왕을 구했던 것이 왜 죄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국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군림하여 다스리는 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이심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늙고 물러날 때가 되었을 때, 백성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나아와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삼상 8;5,19-20). 그들이 이렇게 요구한 것은 사무엘을 이어 사사가 된 사무엘의 아들들이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일들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삼상 8:1-3,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왕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을 버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삼상 8:7-8). 그들이 왕을 달라고 요구한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을 대신할 인간 왕을 원하는 것이었기에, 이것을 하나님은 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치의 우상화를 명시적으로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백성이 구한 왕은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하면서, 거듭 “그들은 헛되니라”고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백성이 원하는 왕은 그들의 구원자가 될 수 없고, 그들을 유익히게 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왕에게 기대하는 것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헛된 것을 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에게 그 헛된 것을 따르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고 간곡하게 권합니다.


3.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정치의 우상화 (출 32:1,4)
일단, 저는 이 말씀을 우리 현실에 먼저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과거의 우리 근대사에서도 지금처럼 정치적 양극화와 적대감이 심화된 적은 있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남과 북 사이에 이데올로기와 정치 체제로 인하여 동족 상잔의 전쟁까지 겪은 나라가 아닙니까? 문제는 이런 양극화와 적대감이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고 심지어 일부 목사들은 강단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주저 없이 쏟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지역에 따라, 연령에 따라, 그들이 가진 정치적 입장과 진영 논리로 찢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의 몸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마귀적인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일례를 들지요.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토요일 아침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아침을 먹으러 함께 베이커리 카페에 갔습니다. 제 왼편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제 오른편에서는 “김대중, 노무현은 빨갱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정색을 하고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둘로 찢고 있는 것이니, 교회에서 그런 식의 정치적 대화를 삼가 달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또는 이보다 심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 때문입니다. 이것을 심하게 부추기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지난 해, 대선 전에 주일 강단에서 “이재명 찍으면 지옥간다”고 말한 목사가 있었는가 하면, 광주에서는 5월이 되면 518을 강단에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극단적이지요. 자신의 정치적 견해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나누고 쪼개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정치가 우상화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참된 신자는 비록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은 세상 나라의 시민으로서 살아갑니다. 정치와 무관하게 살 수 없고,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언제 정치가 우리에게 우상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오늘날 정치적 양극화와 적대감이 이렇게 심화되고 있는 현상은 이미 우리가 정치 활동을 일종의 종교로 삼았다는 증거다.”라고 말합니다.
정치의 우상화는 우리 안에 두려움을 낳고 이 두려움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악마로 보게 만드는 데까지 갑니다. 팀 켈러는, 우리가 뭔가를 우상화하게 되면 그 징후로 두려움이 삶의 주된 특성이 된다고 말합니다. 삶의 중심을 우상에 두는 사람은 거기에 의존하게 되는데, 자신이 만든 가짜 신(우상)이 어떤 식으로든 위협을 받으면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감이다. 어렵다”라고 말하는 대신,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끝장 났다! 희망이 없다!”라고 소리친다는 것이지요. 극단적일 뿐 아니라, 적대적이 됩니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요? 세상은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이 이렇게 반응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왜 한국 교회 안에 이런 세속적 현상들이 그토록 깊이 침투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들이 종교 체험에서 얻는 만족을 로맨틱한 사랑에서 얻으려 하는 속성이 있다”는 어니스트 베커의 주장은 정치의 영역에도 적용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실체를 잃고 명목상의 종교생활을 유지하게 될 때, 그 영적 빈 자비를 엉뚱한 것으로 채우려고 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정치입니다. 특정 정치 지도자를 메시아로 보고 정치적 정책을 구원의 교리로 여기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그 정치 지도자의 정치관은 구원관이 되고, 그가 하는 정치적 행위(그것이 뉴스를 듣는 수준이든, 아니면 적극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이든)는 일종의 종교(구원) 행위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치의 우상화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역사를 통해서만 주실 수 있는 희망을 정치 지도자와 정책에 걸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 지도자가 낙선하게 되면 살아갈 힘을 잃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놓치게 되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죄와 죄성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정치를 우상화하는 사람들은 진짜 악당이 세상에 침투한 죄라는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어 있는 사람들을 적대시하거나 심각하게는 그 생명의 가치를 멸시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됩니다.
앞에서 인용한 어니스트 베커의 말이 옳다면(“사람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들이 종교 체험에서 얻는 만족을 로맨틱한 사랑에서 얻으려 하는 속성이 있다”), 결국 교회 안에 침투한 우상숭배의 형태는 그것이 정치이든, 여타의 것이든, 교회가 하나님의 실체를 잃어버리고 신앙은 관념화되고 진정한 영적 체험을 잃어버렸다는 반증입니다. 복음과 은혜를 잃어버린 빈 자리에 복음을 대체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채워 넣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꽤나 강력합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긴 예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내려옴이 더디다고 느끼자,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했습니다(출 32:1b). 그들은 친히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눈에 보이는 모세를 주목했습니다. 눈에 보이던 모세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그들은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b).” 이것이 정치 우상화의 전형입니다.


4. 다시 성경으로! (삼상 12:20-21; 삼상 9:2; 호 5:4)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서 들어 보십시오.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사무엘상 12:20b–21).” 이스라엘 백성은 인간 왕이 세워지면 다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왕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거부했고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한 이상형 인간을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준수했고 보통 사람 보다 어깨 위만큼 키가 컸습니다(삼상 9:2). 하지만 사울 왕이 백성을 유익하게도 못하고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정치의 우상을 섬기는 행태가 한국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상황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왕을 원했던 행태와 너무나 닮은 꼴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두려운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호세아 5:4).” 음란한 마음은 나뉘어진 마음입니다. 마음의 절반은 하나님, 그 절반은 우상에게 나뉘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말하고 성경을 말했기에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절반의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이것이 곧 호세아 선지자가 지적하는 음란한 마음이며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정치를 우상화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5. 정치에 대한 성경의 기본 가르침
적어도 우리가 정치의 우상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관련하여 성경이 주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정리하고 유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A.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행 1:6; 마 16:19).
첫째는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행 1:3). 그때 제자들은 주님께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이 질문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40일 동안이나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관해서 특별 수업을 받았지만, 여전히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혼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비단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그러했고, 지금 우리나라에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1세기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유대의 정치 현실은 그들의 생각을 사로잡을 만큼 중요하고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언제 메시아를 보내셔서 우리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주시고 무너진 하나님의 왕국을 재건하실 것인가?”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제자들이 유대민족이 처한 현실 정치와 하나님의 나라를 혼동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내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있었고 메시아에 대한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신자들은 자기가 속한 세속 국가의 정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는 열쇠를 주신 대상은 세속 국가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복음 16:19).”고 하신 약속은 교회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임기 5년의 대통령이나 그 정권에게 그 약속을 주신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 대통령직에 앉든지 그 사람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B.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무관심할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없다(마 5:13-14).
두번째로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무관심할 수 있는 명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자 또한 세속 국가에 속한 모범 시민으로 살아갈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모범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세상의 정치를 떠나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합 니다(마 5:13,14). 그리스도인은 투표 행위로부터 직업 정치인으로 살아가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시민이 현실 정치에 무관심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습니다.


C. 하나님께서는 세속 국가와 정부를 인정하셨다(창 9:5-6; 롬 13:4,6).
세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속 국가와 정부를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 국가 혹은 그 정부의 기원을 노아 언약에서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새로운 명령을 주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5–6).”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최소한의 사법적 정의를 세울 수 있는 세속 국가-정부의 권세를 세우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정부의 권세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자’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불렀습니다(롬 13:4,6). 이것이 세속 국가와 정부에 대한 성경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쓰던 당시의 로마 황제가 네로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놀라운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속 국가와 정부는 궁극적으로 악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정치의 한계가 있습니다.정치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어떤 위대한 정치인도 구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악을 예방하고 악행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는 있습니다. 악의 극복은 오직 성육신하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며, 심판자로 다시 오셔서 마침내 종결하실 것입니다. 세속 국가와 정부는 악의 예방과 악행자 처벌이라는 최소한의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하나님의 사역자와 일꾼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D. 그리스도인은 정부와 통치자의 권위를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롬 13:1).
이점은 우리를 네번째 원리로 자연스럽게 인도합니다. 신자는 세속국가의 시민으로서 정부와 통치자의 권위를 존중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고 썼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저항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 지도자를 향해서는 이 구절을 적용하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이 말씀을 적용하지 않으려는 죄성을 드러내곤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식의 자의적 해석과 순종은 이미 정치를 우상화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조심해야 할 영역입니다.


E.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기준으로 현실 정치를 대해야 한다.
다섯째 원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나라에 속한 시민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기준으로 현실 정치를 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정당에 가입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반기독교적이거나 무신론적이거나 반사회적 반인륜적 가치를 표방하지 않는 정당이라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수여야 합니까, 아니면 진보일 수도 있습니까? 성경은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가정과 결혼의 가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지만,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같은 사회의 소수자들에 대한 보호와 존중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에 설 수 있고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세속 국가에서 우리는 성경의 가치를 온전하게 표방하고 구현하는 정당을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점에서 그리스도인은 한 정당의 모든 정강, 모든 정책, 또는 특정 지도자의 모든 주장과 입장에 다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상대적이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F. 그리스도인은 의와 공도를 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창 18:19; 막 12:30-31).
끝으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은 지금도 모든 신자에게 유효한 말씀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물론, 현실 정치를 대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의와 공도’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의’는 구약성경에서 보통 공의(righteousness)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쩨다카(צְדָקָה)’인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의(공의)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신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율법 안에서 설명되는데, 주님은 그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2:30-31). 이 말씀에 의하면, 언약에 충실한 삶은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이웃을 이롭게 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공도’는 무엇입니까? 보통 정의(justice)로 번역될 수 있는 ‘공도’는 히브리어 ‘미쉬파트(מִשְׁפָּט)’인데, 주로 ‘결정, 판결’의 의미를 가지는 사법적 정의의 개념, 재판이나 판결을 통해 사법적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법적 정의가 비교적 바르게 행해지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참으로 공의를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은 사회에서는 사법적 맥락의 정의도 많아질 것이 자명합니다. 그러니 의와 공도를 행하라는 부르심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삶을 함축합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 시민, 정치인, 법조인, 경제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정의를 드러내며 살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만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의 기준을 보여줍니다. 비록 제한적일지라도 ‘의와 공도’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 기준에서 인물, 정책, 정당을 분별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시민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기적 손익이나 사적 이해 관계를 따라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의와 공도라는 엄밀한 기준에서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투표라는 정치 행위를 수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6. 교훈과 적용 (계 11:15)
오늘날 한국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교회까지도 정치에 열광적입니다. 신앙을 이용하여정치적 선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이름으로,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추종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 허다합니다. 이런 행위들은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이 지적하는 바, 마음을 다하여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도 못하고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정치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자기들이 추종하는 정치 이데올로기, 진영의 논리, 거의 신격화된 종교지도자를 따라 열광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가 교회 안에서 버젓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이 보았던 짐승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 말기, 에스겔이 보았던 성전 안에서 자행되었던 온갖 우상 숭배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것은 교회의 타락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현상입니다. 정치가 아니라 복음이,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답입니다. 정치 뉴스에 여러분의 시간을 소비하느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미 정치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사랑하지만,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에 대한 지나친 희망과 지나친 절망은 우상 숭배의 증거일 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만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광하고 우리가 희망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