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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우상 - (4). 자유의 우상

요한복음 8:31-34, 갈라디아서 5:1, 13, 로마서 8: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9-24

말씀내용
18세기의 미국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는 리치몬드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인간에게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말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분들이 계셨습니다. 누군가의 종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점에서 한 가지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지금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있고 누구의 종이나 노예가 아닌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여전히 자유를 갈망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자유가 어떤 종속적이거나 구속적 상태라는 상황 때문에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 자체가 자유를 갈망하도록 되어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종속적 존재가 아닌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가 우상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죄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팀 켈러는 죄를 “삶의 의미를 하나님 아닌 다른 것(비록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일지라도) 위에 세우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삶을 어디에 건설하든지 그것은 우리의 열정과 선택을 빼앗아갈 것이고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센터처치, p.271). 이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입니다. 팀 켈러의 말을 생각해볼 때, 자유처럼 삶의 의미를 두기 좋은 개념도 없습니다. 특히 현대인들에게 그렇습니다. 서구사회나 동양사회에서 이전 세대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가치는 바뀌어 현대의 문화 내러티브(시대 정신)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아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고 가치관이 세워집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자유를 원하는 현대인들은 그 자유에 종속되어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1. 자유에 대한 문화 내러티브
자유에 대한 갈망은 우리의 문화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특별히 자유라는 이 가치는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대 정신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어린 아이들에게서도 발견된다는 점이 무섭습니다. 아이들이 조금만 커도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를 내버려 둬요.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하는 말입니다. 누구의 간섭도, 통제도 받기를 거부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어디에도 구속 받기를 싫어합니다. 이런 정신은 개인주의와 맞물려, 가족의 해체를 부추기고, 사회의 모든 공동체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결혼과 관련해서는 소위 비혼주의라는 현상을 낳기까지 했습니다.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설령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 삶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게 허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라는 시대 정신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결혼은 하더라도 자녀 없는 결혼 생활을 원합니다. 자녀 양육이라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대의 정신이라고 할 자유는 우리 삶의 모든 방면에 영향을 미치며, 모든 것들로부터 간섭 받거나 구속 받지 않는 자유를 추구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문화적 현상으로, 혼밥뿐 아니라 혼술(혼자 술 먹기), 혼곡(혼자 노래 부르기), 혼놀(혼자 놀기), 혼영(혼자 영화보기) 등 소위 다양한 ‘혼족’들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김수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복잡하고 바쁜 사회에서 관계 유지를 위해 들여야 하는 심리적, 경제적 비용이 크다 보니 이런 부담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으로 분석합니다. 관계는 불편함을 야기한다는 생각,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도들도 적지 않습니다. 김봉석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혼자’라는 단어는 이제 외로움•고독•소외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닌 자유로움과 개인을 표현하는 말”이라며 “개인의 고립보다는 자유롭고 개성 있는 현대인들을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혼족 문화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문화일보입력 2016-03-08 11:35 박효목기자).
문화 내러티브가 위험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으며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소위 ‘혼신’(혼자 신앙생활하기)의 생활방식을 선택하여 살아갑니다. 그 현상이 교회에 속하지 않고 원하는 유튜브 방송으로 예배를 드리고, 원하는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설령, 교회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목회자의 간섭이나 교우(신앙/교회 안에서의 친구)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신을 내어 보이기를 거부하고 적절한 선에서 서로를 피곤하지 않게 할 만큼의 피상적 만남을 이어갈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깊이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두려워합니다. 교회의 모임이나 프로그램도 취사선택하여 참여하는 교회 생활을 합니다. 결국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 공동체가 형성은 고사하고, 해체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양도 무너집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목회자가 자녀 양육에도 간섭합니까? 목회자라고 해서 부부관계에도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겁니까?”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앙의 원리,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그어 놓은 선까지만 들어올 수 있고, 내 자유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가 극대화된 문화 내러티브, 시대 정신 속에서 살아간 결과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고독사의 문제를 생각해보지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이 용어는 1990년대에 일본에서 나홀로 죽음이 증가하면서 생긴 신조어입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도 일본발음대로, Kodokushi(또는 lonely death)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노인들의 고독사를 넘어 이제는 청년들의 고독사까지도 발생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고독사의 원인이 오직 자유의 시대정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약일 수 있지만,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독사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자유의 가치를 무제한적으로 추구한 결과는 고독, 고립, 미성숙(주로 인간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적 삶의 비참함입니다. 게다가 누구라도 자신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느껴지면 적대적이 되고 공격적이 됩니다. 내 자유가 타인의 생명 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안전하지 않은 세상,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 사회적으로는 혼란(chaos)입니다. 이것은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자유 위에 두었을 때 즉 자유라는 우상을 섬긴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는 또 다른 차원에서도 나타납니다. 권력과 재물, 성공은 모두 우리에게 자유의 영역을 넓혀주는 성질을 가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이 넓어질 때, 위험도 커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자리에 이르기 쉽고 결국 이런 식의 자유는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차고도 넘칩니다.


2. 추구할수록 멀어지는 자유 (창 2:17; 요 8:31-34)
이런 이야기 속에서 여러분은 자유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자유에 대한 왜곡된 정의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데,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왜 자유를 추구할수록 인간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자유를 추구할수록 자유는 멀어집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와가 가지고 있었던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7).”는 식의 명령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서 살거야. 그 누구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어.” 이것이 자유에 대한 하와의 왜곡된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자유에 대한 하와의 왜곡된 생각이 그녀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하였고, 그 결과로 인간은 죄의 속박 아래 갇힌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사탄이 뱀을 통해서 여자에게 넣어준 생각은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이었습니다. 이미 아담과 하와는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 자유를 누리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 이것이 첫 범죄를 유발하였다면,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이란 무엇일까요?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은 물고기가 물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갈망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왜 나는 물에만 갇혀 살아야 하는거야? 저 강아지와 벌레들은 멀쩡히 물이 없는 땅에서 살아가는데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은 결국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것이 모든 죄인 특별히 자유에 대한 문화 내러티브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처해있는 딜레마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동일합니다. 사탄은 이미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하와로 하여금 “나는 자유가 필요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종이라고 느끼게 속였다면, 죄의 종인 사람들에게는 반대로 “나는 자유를 향유하고 있어”라고 착각하도록 기만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것을 보여줍니다. 본문 앞에서 많은 유대인들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고(요 8:30) 주님은 믿은 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b-3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는 신자가 되었지만 아직 그 말씀 안에 거하지 않음으로써 제자가 되지는 못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주 예수님의 제자요, 길따름이입니다. 제자가 아닌 신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너희가 믿는다고는 하지만, 또 너희가 신앙을 입으로 고백하기는 하지만, 너희는 내 말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므로, 신자도, 제자도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입니다. 완벽해서 제자가 아니라, 백 번 넘어져도 다시 순종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듣는 이들을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자유로운 사람들인데 진리가 자유롭게 하다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 에둘러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죄의 종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요 8:33). 하와와 반대의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도 역시 하와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유를 알지 못하고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란 내가 누구의 지배 아래 있는가 하는 외적 상태로 정의될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유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지로 측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현대인은 특정한 상황에 놓여있지 않는 한,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예수님 앞에 있던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사탄은 교활해서 인간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줌으로써 그를 완전히 지배합니다. 자신이 마귀의 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코 자유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서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은 자유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모든 다스림과 모든 권위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자유에 대한 이 왜곡된 정의와 갈망은 자유를 추구할수록 자유로부터 멀어지고 도리어 죄의 종이 되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제가 말한 현대인이 겪고 살아가는 고독, 고립, 미성숙(주로 인간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적 삶의 비참함입니다.


3. 자유를 주시는 그리스도 (갈 5:1; 롬 8:1; 눅 15:11-32)
그래서 사탄이 복음과 믿음에 대해서 퍼뜨린 거짓말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속박 당하는 것이라는 거짓된 생각입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이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게 만드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유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아래로 들어와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유란 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하던(무정부주의적 사고) 18세기에 영국 백작 윌리엄 머레이는 “자유란 법치 정부 아래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도 뛰어난 통찰을 제공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제멋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사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는 항복 선언 혹은 복종 선언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던 물고기가 물 밖에서 고통을 받다가, 다시 물을 만나 마음껏 숨쉬고 헤엄치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고 여겼던 하와는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다스림 밖에서 사는 비참함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의 종으로 고통하고 탄식하는 모든 아담의 자손들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과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자유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건져내사 자유를 주셨다는 말씀은 죄인이 객관적으로 감당하게 되는 죄책과 정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죄책과 정죄로부터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자유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이 자유를 얻는 사람은 자신이 죄의 종임을 인정하고, 자신이 누리고 살아간다고 여기는 자유가 왜곡된 것이었으며 결국 고독과 고립의 예속된 삶의 비참함을 가져왔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사탄이 심어준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에서 주님이 주시는 자유에 대한 참된 갈망으로 옮겨와야 합니다. 그것은 다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탕자가 진정한 자유를 누린 것은, 그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을 때가 아닙니다. 그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 안겼을 때, 그는 진정한 자유를 다시 얻고 누리게 된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자유는 탕자의 형이 집에서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이 수년 동안 살아왔을 때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 믿는 것을 예속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유를 주셨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는 자유를 얻었다고 믿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 많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고 한 바울 사도의 말씀에 의하면, 탕자의 형은 아버지의 명령에는 순종했을지라도 그에게 성령의 역사는 없었습니다. 그는 돌이켜 아버지의 명을 지키는데서 나아가 아버지의 마음 중심으로 옮겨갈 때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이 명령만을 순종했기 때문에, 자유가 없이 예속된 종이나 머슴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철저한 신앙생활은 율법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고, 여기에는 아들의 정체성이 아니라 종의 정체성만이 작동할 뿐입니다. 아버지는 자유를 주셔도 아들은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는 책임 있는 자유다. (갈 5:13; 고전 9:19)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유의 개념을 조금 더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자유는 모든 책임으로부터 면제를 받는 자유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책임 있는 자유라는 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를 앎으로써 우리에게 부과되는 책임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진리를 알 때, 우리는 진리가 부과하는 책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일 뿐 아니라, 책임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우실 뿐 아니라, 또한 완전히 책임 있는 존재로 거하십니다. 진리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도록 창조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고, 사람을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 안에 거함으로써 참된 자유를 발견하고 누리게 됩니다. 진리를 알 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자유에 대한 모든 왜곡된 추구는 멈추고, 진정한 사랑 어린 관계를 맺는 자유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알게 함으로써 주시는 자유는 단지 율법의 정죄와 죄책으로부터 건져내는 자유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라디아서 5:13).” 이 말씀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날 내버려 둬!”라고 말하는 자유의 개념을 도리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개념으로 확장합니다. 사랑할 자유, 책임 있는 자유로 인도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자유는 나 편하자고 결혼을 거부하고, 출산을 거부하고, 교회 안에서의 사귐을 거부하는 경향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롭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는 사랑으로 누군가의 종이 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는 우리가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를 점점 더 부요하게 할 것입니다. 이 책임 있는 관계들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고립과 고독이 아니라 깊은 사귐과 참된 친교로 나아갈 것이고, 공동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의 우상이 가져다 주는 비참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자유를 얻어 누리려면, 먼저 우리는 자신이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은 결국 자유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합니다. 어떤 권위도, 어떤 통제도 거부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도록 이끌어갑니다. 그렇게 혼자 살아가는 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원하는 대로, 자기 편한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왜곡된 자유가 여러분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외로움과 미숙함과 비참함 뿐입니다. 이것은 모든 우상 숭배가 가져오는 결과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는 진짜 자유입니다. 죄와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사탄이 문화 내러티브(시대 정신)를 통해서 주는 자유를 추구한다면, 그렇게 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자유의 기쁨으로부터 멀어지고 죄의 종으로 비참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가 말하는 자유는 사랑은 커녕 누군가를 위해서 조금의 희생도 할 수 없는 철저한 자기 중심적 존재, 괴물로 우리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자유의 우상을 섬기는 세상에서 수많은 괴물들을 마주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존재가 그 누구든, 무엇이든 대적하고 공격합니다. 자유라는 우상 숭배는 이처럼 무섭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고 이 참된 자유로써 사탄이 준 세상의 거짓 자유의 신화를 허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대 정신의 포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고 살아감으로써 세상을 향해 “너희가 죄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나은 자유, 참된 자유를 주시는 그리스도께로 날마다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자유는 진리 안에서의 참된 자유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복된 자유이며,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자유입니다. 이 자유만이 우리에게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