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하나님과 우상 - (2). 행복이라는 우상

양육설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하나님과 우상 - (2). 행복이라는 우상

신명기 10:13, 전도서 2:11, 마태복음 22:37-4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8-27

말씀내용
두 개의 질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설교 제목 그대로 입니다. “행복하고 싶습니까?” 이것은 우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행복의 갈망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해질까?”입니다. 오늘 설교는 첫번째 질문을 전제로, 두번째 질문을 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1. 행복이란 무엇인가? (전 2:11)
사랑하는 배우자, 말 잘 듣는 자녀, 힘이 되어 주는 가족, 월급을 많이 주는 좋은 직장, 건강, 성공적인 사역,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휴가.. 이런 조건들이 만족되면 우린 행복합니까? 우리는 자녀를 기르면서 힘들어하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거야.” 나중에 행복하라고 하는 거란 말이지요. 오늘 본문을 우리말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가 잘되라고 주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 아니냐?” 물론 일반적으로 부모가 말하는 행복과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을 누렸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사업의 성공, 재물, 인생의 쾌락, 눈이 원하는 모든 것, 마음이 즐거워하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고 지혜도 누려봤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도서 2:11).” 그런 것들을 해보니까 내가 바라던 행복은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말이 생각납니다. 로이드존스의 말인데, “그리스도인은 (이론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의문이 들고 반박하고 싶으십니까?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했을까요? 그리고 이 말은 성경적으로 옳습니까?


2. 하나님은 행복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아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 이전 영원 전부터 세 위격의 영광스러운 교제 속에서 흘러 넘치는 완전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셨습니다. 그리고 흘러 넘치는 그 기쁨을 주시려고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고 원리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이 이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행복은 그의 아들을 즐거워하시는데 있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인간 영혼의 최상의 기쁨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을 우리가 최고로 기뻐하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도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려고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을 먼저 창조하셨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남자와 여자, 공동체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하나님은 무한히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물론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얻게 됩니다. 인간은 본래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행복은 관계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계시는 하나님도 공동체로 존재하시듯이, 하나님은 인간도 당신의 형상을 따라 공동체적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관계 없이 살 수 없고,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행복을 누리고 경험합니다. 하지만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적 영광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인간 관계에서도 교묘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됨으로써 진정한 행복에서 단절되었고 비관계적 행복이라는 자기중심적이고 왜곡된 행복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목적은 이 깨어진 원래의 행복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죽으심으로써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사람의 성숙함은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측정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행복도 그 관계 속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행복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고, 바라는 인생을 허락하심으로써 행복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3. 두 가지 행복—일차적 행복과 부차적 행복 (마 7:13,14)
우리는 “그럼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행복을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래리 크랩은 일차적 행복과 부차적 행복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부차적 행복은 삶이 우리를 속이지 않을 때, 삶이 우리를 선대할 때에만 주어지는 행복입니다. 부차적 행복에 대한 욕구는 기분이 나쁠 때 좋은 기분을 느낄 권리가 있다고 여기고, 부차적 행복을 즐기는 것에 몰두하는 삶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바라는 만족스러운 환경과 즐거운 감정을 공급해 주시고, 적어도 고통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주시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 주셔야 한다고 느낍니다. 부차적 행복의 문제는 이것이 본질상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느끼게 할 위험도 있습니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이 추구하는 부차적 행복의 한계입니다. 부차적 행복의 길은 넓은 길입니다(마 7:13).
그러나 본래의 행복, 일차적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때,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을 때 찾아오는 행복입니다.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이 아니라, 엄청난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때 주어집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은혜를 알고 그 행복을 경험한 사람이지요. 하지만 일차적 행복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확장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안에서 쉼을 누릴수록,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수록, 하나님의 성령은 그분의 시간에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더욱 드러내게 하시고 우리는 더 큰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일차적 행복은 하나님과의 친밀함,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자라갑니다. 그러나 여기에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일차적 행복은 ‘하찮은 즐거움’이나 부차적 행복을 요구하는 자세, 그 권리를 내려놓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 길은 좁은 길입니다(마 7:14). 좁은 길을 가기는 힘듭니다. 여기에 장애물도 있습니다.


4. 행복이 우상이 될 때: 행복이 행복의 장애물이다.
행복이 우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지요. 사람이 일차적 행복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부차적 행복을 향한 포기하지 못하는 갈망입니다. 이때 부차적 행복은 일차적 행복의 장애물이 됩니다. 가령, 교인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교인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이 부차적 행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갈망이 너무 큰 나머지, 그가 예수님께서 흠 많은 자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흠 있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이것은 성령님께서 그 안에서 일으키시는 갈망입니다—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고 있는 부차적 행복을 향한 갈망이 너무 큰 나머지,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가족, 친구, 교인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이 질식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죄에 맞서는 일 보다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더 옳고 바람직하다고 느끼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 고통에서 풀어주고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일을 하셔야만 한다고 느낍니다. 그의 기도는 부차적 행복을 향한 자신의 갈망을 표출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느냐, 행복한 느낌을 가지느냐가 더 절실하고 중요합니다. 결국 진리가 아닌 감정이 그의 삶을 이끌어갑니다. 말씀을 들으면, 그는 “그래도!”라고 말하며 고집스럽게 저항합니다. 행복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10년이 아니라 일생을 갈 수도 있습니다. 불행한 것이지요. 돌아보면 그저 몇 차례 행복한 순간들이 기억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불행의 기억 뿐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분석적으로 들어가보면, 이런 태도를 형성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내가 좋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 행복을 향한 나의 욕망은 너무나 정당하고 당연한 권리라고 느낍니다. 성공, 음식, 재산, 마약, 술, 성, 인정, 돈, 심지어 사역 등은 다른 방식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만족감을 주는데, 나는 이런 것들을 요구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만족을 원하는 것은 나쁜 것이나 죄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라고 여깁니다. 남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복하고 싶은 소박한 생각이니까요. 이런 전제가 마음을 장악하게 되면, 그는 일차적 행복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와, 자신 안에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갈망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생을 그 자리에서 맴돌게 됩니다.


5. 우리의 행복을 위한 율법? (신 6:24; 마 22:37-40; 요삼 2; 롬 8:38-39; 시 23:1-2,4)
저는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해질까?”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을 안고 본문을 봅시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명기 10:13).” 여러분은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서 자유를 앗아간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행복과 율법을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까? 하나님은 “네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6:24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창조 때부터 변함 없이 동일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님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던 장면을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답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대답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더 사랑할수록, 이웃을 더 사랑할수록, 더 행복할거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일차적 행복입니다.
성경은 일차적 행복과 이차적 행복을 구분하여 말씀하기도 합니다. 요한삼서 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이 사랑하는 장로 가이오를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이 짧은 기도의 내용에는 영혼의 잘됨과 범사에 잘됨(강건함을 포함하여)이 있습니다. 영혼의 잘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된 행복이지만, 범사에 잘됨은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바라는 바, 그러나 보장된 것은 아닌 요한의 바람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이 말씀은 죽음과 고난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차적 행복을 보장한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장된 약속은 있습니다. 일차적 행복과 연결되어 있는 바, 영혼의 잘됨입니다.
그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1–2).” 얼마나 멋진 고백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어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고 말합니다(시 23:4a). 부차적 행복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해(받음)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b).”라고 이어집니다. 이것은 일차적 행복과 연결됩니다. 보장된 약속입니다.


6. 일차적 행복은 확장되고 확장된다.
인간이 본래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보장하시는 행복은 확장되는 성질이 있습니다. 부차적 행복은 개인적이고, 때론 다른 사람을 시기와 질투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일차적 행복은 언제나 주변의 관계들을 더 깊이 사랑하는 관계로 확장시켜 줍니다. 흠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은혜를 누리는 행복은 누군가를 더욱 사랑하게 함으로써 더 깊은 만족과 기쁨, 그리고 참된 행복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일정한 조건이 만족되어야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랑으로 관계를 맺고 결속을 경험할 때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따라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진정으로 부차적 행복의 우상들이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는, 때론 응답이 없을지라도,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애쓰고 분투할 때 일차적 행복은 자라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조차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써 행복하셨다고 감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그러할 수 있습니다.


7. 교훈과 적용
A. 우상을 자백하고 버리기
저는 오늘 행복이라는 우상을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 말 잘 듣는 자녀, 힘이 되어 주는 가족, 월급을 많이 주는 좋은 직장, 건강, 성공적인 사역,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휴가..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요한은 가이오가 범사에 잘 되기를 기도했는데, 이런 것들은 범사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우상은 나쁜 것이다.” 이 말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우상은 술이나 도박, 무분별한 성적 일탈과 같은 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선물들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누리십시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마십시오. 그것이 행복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위해 분투하는 자리에서 누리는 행복을 말씀합니다. 모든 부차적 행복의 조건들이 채워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채워지지 않아서 그 일차적 행복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 순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를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행복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어 왔던 것들이 무엇입니까? 이것 때문에 항상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들던 그것은 무엇입니까? 어리석었던 우상숭배를 인정하고 애통함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여 우상을 내려놓겠습니까? 아니면 이 기회를 무시하고 여전히 내게는 이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그 우상을 붙들고 살겠습니까?
B. 더 깊은 갈망이 필요하다.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짜 행복에 이르고 행복을 누리는 여정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 여정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은 거의 언제나 약함과 실패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오늘 제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감당할 수 없는 노력을 치루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도 극복할 수 없는 자기 중심적인 죄들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자유함, 우리의 실력과 상관 없이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과 용기가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좁은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쇠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 즉 목마름과 배고픔에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교회당 안에 앉아있으면서,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깨우고 자극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너무 피상적이거나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제게 사랑에 빠진 사람을 주십시오.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입니다.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 배고픈 사람, 사막 속에서 목말라 하며 영원한 나라의 샘을 찾아 한숨짓는 사람을 제게 주십시오. 그런 사람을 제게 주십시오.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입니다. 그러나 냉랭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느끼시겠습니까?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행복을 누리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을 듣고 단순히 벧샬롬교회의 교인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 갈망이 일어납니까? 그런 꺼지지 않는 깊은 갈망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할 마음이 있으십니까? 단순히 누군가의 관심과 돌봄의 대상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처럼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돌보기를 시작하려는 갈망이 내면에서 일어납니까? 예수님처럼 자기 방어적이 되지 않고 자기 희생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서는 일차적 행복이 주어지고 자라납니다. 이 사랑을 위해 분투하십시오. 그것을 갈망하십시오. 그 갈망을 구하십시오. 래리 크랩이 자신의 책,『행복』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대화를 가상적으로 기록한 것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아름다움이 보이느냐?”
“네, 조금이요. 그런데 제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희미하게만 보입니다.”
“너는 아직도 너의 작은 이야기 안에 머물러 있구나. 너는 네 인생에서 부차적인 것들을 얻으려고 근근이 살아가는구나. 인생이 잘 돌아갈 때 느끼는 즐거움은 내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지 못하게 한단다.”
“그렇지만 예수님, 저는 주님의 희생적 사랑이라는 더 큰 이야기를 보기 원합니다. 제가 맺는 관계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원해요. 그렇지만 너무 자주. 때로 너무 처참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방식에 언제까지나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네가 실패를 깨닫고 고백할 때, 용서하고 힘을 주는 내 사랑의 소망 안에서 너는 쉴 기회를 얻을 것이다. 나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춰라. 나의 부활을 경축하라.”
“그동안 저는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생수를 홀짝거리기만 한 것 같아요. 제가 주님의 그 사랑을 차고 넘치도록 마음껏 충분히 마셔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흘러가게 할 날이 과연 올까요?”
“좁은 길을 계속 걸으렴. 너를 위한 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