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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레이스 - (7). 복음의 언어로 말하라

고린도전서 2:10-14, 로마서 8:6, 빌립보서 4: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7-30

말씀내용
1. 두 개의 언어 (고전 2:10,13; 마 16:16-17)
여러분은 복음의 언어를 알고 계십니까? 복음의 언어를 알아듣고 그 언어를 구사하십니까? 이 말은 약간의 은유입니다. 만일 제가 인도네시아어로 설교를 한다면 소리를 들을 수는 있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배우지 않은 외국어이니까요. 복음도 하나의 외국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7-2:13에서 바울 사도는 지혜라는 말을 15번 사용하면서(헬라어 성경에서 15회, 개역개정역에서 21회) 두 종류의 지혜를 대조합니다. 세상 지혜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데 하나님의 지혜는 복음을 가리킵니다. 사도는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고 말합니다(고전 2:13). 영적인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고 복음입니다.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는 말은 성령으로만, 성령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신자는 성령님이 그 안에 내주하시기에 복음을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복음을 이해한다면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마 16:16-17).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이자 신비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총명해도 자신의 지혜로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배우지 않은 외국어처럼 복음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1992년에 상담가이자 작가인 존 그레이(John Gray)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100만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남자는 화성인이고 여자는 금성인이기 때문에 서로의 언어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단순하고 기발하며 명쾌한 비유를 통해 남녀 사이의 갈등을 설명하고 해결하고자 합니다. 남녀는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에 소통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들인 것처럼 달라서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매주일 교회당 안에서도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말로 설교하고 있고, 한국말로 복음이 설명되기에 알아듣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사귐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책을 읽고 나눔을 한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방금 같은 설교를 듣고 나누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말로 나눔을 하고, 동일한 낱말, 단어들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든 소통이 한국말이기에, 인정하기는 더욱 어렵겠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언어의 문제 즉, 복음의 언어를 알아듣고 알아듣지 못함에 따른 차이가 존재합니다.
비유가 한계는 있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복음은 컴퓨터의 운영체제(Operating System)와 같아서, 그 운영체제 안에서 모든 것이 돌아갑니다. 예배, 설교, 교제, 섬김, 사역 등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 안에 복음의 운영체제가 깔린다는 것은 그 영혼이 거듭났다는 말이고, 거듭난 영혼이 육(세상 지혜)으로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일—복음—들을 깨닫고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PC를 구입해도 윈도우즈라는 운영체제를 설치하지 않는다면, PC는 무용지물일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PC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들을 많이 구입했다고 할지라도, 운영체제인 윈도우즈를 설치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녔고, 말씀을 많이 배웠고 심지어 교회 봉사를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성령이 계셔서 그가 복음을 깨닫고 이해한 일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은 유익하게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적 용어를 구사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언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며 전혀 구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은 컴퓨터에 비교하면 일종의 운영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국말로 복음과 신앙의 도리를 배우고 말한다고 할 때, “내가 복음, 그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알아듣고 있는가? 복음의 언어를 아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복음의 언어를 알아듣고 있다면 여러분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는 것이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인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대답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 두 개의 생각하는 방식 (롬 8:6)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신비인 복음은 비록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를 통해 설명되지만,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듣다가 어느 주일에 설교가 진정으로 들리기 시작했던 때가 있습니까? 물론 이전에도 알아듣는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짜 복음이 들리기 시작했고 그 복음을 알아듣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 안에 거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언어를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완전히 새롭고도 큰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 변화는 생각하는 방식의 변화입니다. 오늘 두번째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6).”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두 가지 생각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두 생각의 결과는 사망과 생명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육신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ESV스터디바이블의 설명입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 본성의 특징이 되는 것들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끊임없이 원하는 것, 즉 믿지 않는 세상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세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조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육신의 생각은 일관되게 그런 방식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생각이 그렇게 돌아가는 사람은 결국 죽음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반면, ‘영의 생각’은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복음의 언어를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 바로 이 일,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한 사람은 복음의 언어를 알아듣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고 복음의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복음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생각이 영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육적으로 돌아간다면, 그 사람이 참으로 거듭나서 성령님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을 예를 들어 설명하지요.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어떤 해가 가는지 유익이 가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신의 최우선 관심사로 작동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반대로, 자기 이익과 손실, 자신의 유불리에 대한 계산이 제일 먼저 자동적으로 됩니다. 이런 생각은 반드시 말로 표현됩니다. 물론 둘 다 한국말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두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는 전혀 다른 언어가 될 것입니다. 전자는 복음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세상적 언어(세상 모든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일 뿐입니다. 언어는 그 안에 있는 생각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3. 복음의 언어의 실제
복음의 언어의 실제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이 교회라면, 교회는 복음의 언어가 소통되는 곳입니다. 가령, 복음의 언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지(고전 15:10)!” 그러나 세상의 언어는 “나의 나 된 것은 내 노력과 수고의 결과이고 약간의 운이 따랐을 뿐이지!” 정도로 말합니다. 복음의 언어가 흘러나오는 내면의 생각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립니다. 세상에서 흔해 빠진 자기 잘남과 성공과 성취와 실력을 자랑하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약함과 실패와 고난을 기뻐하고 자랑합니다. 이것이 영의 생각이 만들어내는 복음의 언어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조직의 의사결정은 거의 다수의 의견을 따르거나 유불리에 대한 계산과 사람들의 합리적 지혜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의사결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원리가 다수의 의견이나 합리적 주장과 인간적 계산 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사람은 “무엇이 더 효율적이며 합리적이지?”라고 묻기 전에 먼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 기준은 무엇이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만일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안에서 “왜 나의 성공과 성취를 알아주지 않는거지?”라고 묻는다거나, “왜 자기의 약함과 실패와 고난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하는데?”라고 반문한다면, 또 “하나님의 뜻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는 거잖아?”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슬프게도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한국말을 사용하고 있어서 서로 소통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외국어를 서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정에 적용해 보면 보다 분명하게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부 가운데한 분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한 분은 아직 주 안에 있지 않다고 가정해 봅시다. 두 사람은 많은 점에서 좋은 관계 속에 있을지라도, 근본적으로는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의 영역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신앙의 영역은 우리 삶의 한 영역으로 축소될 수 없고,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믿는 배우자는 “나의 필요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채워졌어!”라고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지만, 불신 배우자는 “당신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한, 나는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믿는 배우자는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적 섭리를 생각하므로 일관되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신 배우자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태도가 수없이 돌변합니다. 부부가 구사하는 언어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4. 복음의 언어 능력은 성장한다.
여기서, 복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잠깐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령, 오래 전에 거듭났지만, 복음의 언어 능력이 성장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초보적인 차원에서 복음을 깨달았고 이해하지만, 복음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훈련이 없을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는 부모와 가족들의 언어를 들으면서 “엄마, 아빠”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들은 언어들을 문장이 아닌 낱말, 단어의 형태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거듭난 사람도 기본적으로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음으로써, 복음에 충실한 설교를 들음으로써, 단어와 문장들이 축적되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조금씩 복음의 언어를 익혀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복음의 개념들, 단어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배우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정확하게 의사를 표현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 구주와 주님, 중보자, 성령, 삼위일체, 세상, 마귀, 죄, 은혜, 칭의, 중생(거듭남), 회 심, 믿음, 선택, 구원, 성화, 교회, 교제, 계시, 성경(말씀), 세례, 성찬, 언약, 속죄, 구속, 심판..등 성경의 개념과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교리 교육이 하는 일입니다. 만일, 교리 교육을 받지 못해서 개념들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늘 적당히 조금은 틀리고 조금은 맞는 문장으로 말을 하고 기도도 그렇게 하게 될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언어와 복음의 언어가 섞이게 되고, 심한 경우, 번영 복음의 개념과 참 복음의 개념이 섞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거듭났을지라도, 가르침과 배움이 없을 때 복음의 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게 됩니다. 개념과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 다음에 그는 문장으로 말을 하기 시작하고 복잡한 문장으로도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바른 말씀과 교리의 교육을 통해서 복음의 언어 구사 능력이 자라갑니다. 점점 더 복음의 언어로 말을 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5. 은혜의 정서가 복음의 언어를 유창하게 만든다. (빌 4:8)
은혜의 정서가 복음의 언어를 품위있게 하고, 따뜻하게 만들며, 빛나게 합니다. 복음의 언어에 은혜의 정서가 더해질 때 비로소 성도는 유창하게 복음의 언어를 구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고 이제 단어와 개념들의 정확한 의미를 배웠기에 말을 잘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복음의 언어를 유창하게 또는 수려하게 구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언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은 은혜의 정서인데, 이것은 대개 성품의 문제입니다. ‘그의 내면으로부터 무엇이 흘러나오는가? 어떤 정서, 어떤 은혜로움이 흘러나오는가?’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드리지요.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빌립보서 4:8).” 이런 생각이 지속적으로 깊어질 때 내면과 성품이 변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성화되어감에 따라 우리가 구사하는 복음의 언어도 점점 유창하고 품위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언어는 낙심한 사람을 위로하고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며 포기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줄 것입니다. 이것은 살리는 언어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 모두가 자신에게 적용해 보시길 권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언어를 얼마나 잘 사용하십니까? 외국어를 간신히 배워서 하는 것처럼 더듬더듬하는 것이 아니라,충분히 편안하게 자신의 언어처럼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가 잘 들리십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같은 언어로 영적 진리를 설명하실 때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니고데모와 같은 자리에 있습니까? 복음의 언어를 구사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 같은 수준에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유창하게 은혜롭게 말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정리하면, 첫째,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교회에 앉아 있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설교는 졸리기만 하고 들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는 하겠는데 소위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자면, 그것은 거듭나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b)”고 했고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을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거듭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셔야 합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힘써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은 거듭나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약 1:18; 벧전 1:21).
둘째, 분명히 은혜를 받고 있지만, 깨달음이 깊어지지 않고 있다고 느끼고 성경의 개념과 단어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여러분은 더욱 힘써 말씀과 교리를 배우는 일에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실제로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이런 자리에 수 십년 씩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설교를 듣고 교리를 잘 배우십시오. 제가 권하는 책들도 구입해서 열심히 읽으십시오.
세째, 복음의 언어를 어느 정도 깨우쳤다고 느끼신다면, 여러분은 이제 은혜의 정서를 담기 위해 날마다 거지와 같이 가난한 마음으로 간절히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대단히 위험한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저 말만 잘 하는 위선자이거나, 탕자의 형 처럼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아침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은혜를 구함으로써, 은혜의 정서가 여러분의 내면에서 흘러나와 복음의 언어를 빛나고 힘있게 만드는 것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고, 생각은 영적으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십니까? 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십니까? 세상은 돈이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강함을 높이고 정체성의 근거로 삼고 싶어 하지만 성경은 약함과 고난과 죽음이 유익이며 이것들을 자기 정체성의 근거로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언어는 이런 가치들을 깊이 있고 풍성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한국말을 모국어로 사용하기에 한국인이듯이, 우리가 복음의 언어를 구사한다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일 것입니다. 언어는 그가 속한 나라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언어가 장착되지 않았다면, 그는 오직 세상에 속한 사람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복음의 언어를 사용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