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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레이스 - (5). 두 부자

누가복음 18:18-30, 누가복음 19:1-10, 에베소서 2:8 / 김형익 / 주일오전설교 / 2023-07-16

말씀내용
6월 첫 주일, 삭개오의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는데, 오늘은 삭개오 앞에 등장하는 부자 관리와삭개오, 이 두 부자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질 수도 있는 오해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부자 관리는 소유 전부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삭개오는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행위로써 구원을 받은 것인가, 구원의 문제와 소유의 문제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오해입니다. 이 오해를 다루기 전에, 두 등장 인물의 에피소드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 두 부자 (눅 18:22-23; 마 19:22; 막 10:22; 눅 19:9; 18:24-25)
먼저 부자 관리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십계명을 언급하시자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누가복음 18:22).”고 하십니다. 이것은 부자 관리에게 주어진 기회였지만, 그는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습니다(눅 18:23). 마태와 마가복음의 병행 본문을 보면, 그는 결국 주님을 떠났습니다(마 19:22; 막 10:22). 그는 영생을 위해 주님께 나아왔지만, 결국 원하던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두번째 부자는 삭개오입니다. 부자 관리와 달리, 삭개오는 일반적 유대인이 경멸하던 세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를 위해 동족의 고혈을 빨아 자기 배를 불리는 세리를 창녀와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주님께서 돌무화과나무 위에 오른 삭개오에게 오셔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날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을 때, 삭개오는 과분한 은혜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이 요구하지도 않으셨지만,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누군가를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를 갚아주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이 말을 들으신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누가복음 19:9).”
결론적으로, 부자 관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고 삭개오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부자 관리의 구원 여부를 어느 정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누가복음 18:24–25).” 주님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을 부정하지도 않으셨습니다.


2.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소유와 관계가 있는가?
두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본문에서 관찰되는 바는, 두 부자는 모두 소유(재물)와 관련하여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거나 했다는 사실입니다. 두 에피소드는 모두 그들의 구원의 문제를 암시 내지는 언급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두 부자가 각기 자기들의 소유와 관련하여 행하거나 하지 않은 일이 그들의 구원과 관계가 있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가 본문을 대하는 독자들의 오해가 발생하는 지점입니다. 부자 관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까? 삭개오는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도 안 하셨는데, 자발적으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에 더하여 누군가를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를 주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구원이 소유의 유무, 또는 소유를 어떻게 처분하는가와 관련이 있습니까? 이렇게 성경을 읽는 것은 오독입니다.
그렇다면, 두 부자의 본문은 왜 구원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입니까? 주님은 왜 부자 관리에게 “지금은 아니더라도 일단 나를 따르면서, 언젠가는 소유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주님은 삭개오에게 “네가 그렇게 한다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라고 하시는 대신 구원을 선언하신 것입니까? 본문에서 우리가 외면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두 부자가 자신의 소유와 관련하여 어떤 일을 했거나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부자 관리는 소유의 전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고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자 관리는 주님을 떠나갔고(구원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삭개오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일 여기서 좀 더 까다롭게 본문을 읽는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자 관리에게 소유의 절반만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삭개오가 소유의 절반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부자 관리는 왜 그럴 수 없는가? 여기에 본문의 디테일한 묘사가 도움이 됩니다. 만일 삭개오가 소유 전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했다면, 이해는 훨씬 더 쉬웠겠지요? 본문은 소유 전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기를 거절하고 구원받지 못한 부자와 소유 전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구원받은 부자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우리는 “소유 전부를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주님을 따르고 구원을 얻는 조건이다”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소유의 1/3은 안 되나요?” 라는 질문이 나올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은 거의 의도적으로 부자 관리와 삭개오를 다르게 기록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는 소유 전부를 팔아 나눠줄 것인가, 절반을 팔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원의 문제는 소유를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처리하는가와 전혀 무관합니까? 본문은 우리의 구원이 소유를 어떻게 처분하는가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소유를 어떻게 여기는가와 무관한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3. 구원은 은혜로 얻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눅 18:24-27)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본문의 두 부자 이야기도 예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하신 것은(눅 18:25)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에 설명 드렸듯이, 당시 유대인들은 부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다는 점에서 주님의 말씀은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였고,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물은 것도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눅 18:26). 그래서 주님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눅 18:27),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 관리의 본문, 특히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라는 말씀은(눅 18:24) 부자들을 불편하게 하려고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오래 전 주일학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 “돈으로도 못 가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 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벼슬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 지식으로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이 노래는 하나님 나라에 재력과 권력과 지식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8이 밝히듯이,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이 말은 나의 믿음 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믿음 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니, “내가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아무 자격 없는 존재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이며, 은혜는 언제나 과분하고, 언제나 어메이징한 것입니다.


4. 은혜의 열매는 어마어마하다. (눅 18:18,21,22; 눅 15:29, 롬 14:8; 갈 2:20-21)
그러므로 두 부자의 이야기는 소유를 팔아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부자의 이야기에 소유의 전부 혹은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행위가 연관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자 관리를 먼저 보십시오. 그가 주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고(눅 18:18), “(십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할 때(눅 18:21), 그는 상당한 자기 의를 가지고 주님께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주님께 나아온 것은 “너는 더 이상 할 것 없어. 이미 네 행위를 보면 너는 구원을 얻고도 남아.”라는 주님의 인정을 확인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예상을 깨고, “네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해도, 너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단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킨 이 부자 관리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에서(눅 15:11-32)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고 말하는 형을 대변합니다(눅 15:29). 그렇다면 본문은, 이 부자 관리의 문제는 소유의 전부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의 훌륭함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보기에 충분히 의로웠습니다. 그 의로움이 그로 하여금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고, 순종할 수 없게 한 것입니다. 그는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을(눅 18:22)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기의 소유와 자기의 의로움을 믿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음의 총량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이 자신과 자신의 무엇을 믿는 만큼 주님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삭개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는 주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주시고 자기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을 때 이미 과분하고도 넘치는 은혜를 느꼈습니다. 이것은 삭개오가 마땅히 받으리라고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삭개오의 본문 자체는 삭개오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알았고 믿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말이 충분한 회개인지에 대해서 상세히 증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에피소드를 통해 성령께서 보여주시려는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삭개오의 태도는 그가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회심은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킨 부자 관리가 결국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음을 입증합니다(눅 18:23). 그러나 삭개오가 주님은 말씀도 안 하셨는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한 것은 그의 주인이 이미 바뀌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과분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구원하는 은혜,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인생의 주인을 바꿉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8).”라고 고백하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0–21).”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이런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삭개오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에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누가복음 15:21)”라고 말하는 탕자를 대변합니다.


5. 구원과 상급을 혼동하지 말라. (롬 4:4; 눅 18:28,29-30)
우리가 본문에서 포착하는 또 하나의 주제가 더 있는데, 상급(보상)의 문제입니다. 상급 개념은 그 자체로 은혜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이 은혜로 주어짐을 말하려고,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로마서 4:4)”라고 보수와 대별하여 말했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부자 관리는 소유의 전부를 버리지 않았고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베드로의 말대로 자신들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눅 18:28). 주님의 대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누가복음 18:29–30).” 주님은 상급의 문제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 관리가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하늘에서 (그에게) 보화가 있을’ 것이었습니다(눅 18:22). 이 하늘의 보화는 그가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에 대한 보상/상급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 관리는 단지 상급의 약속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를 거절하였기에 그는 구원과 상급을 다 잃은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6. 소유에 대한 태도는 구원과 관련이 있다. (딤전 6:9-10, 6,8, 17-19)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에서 교인들이 소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디모데에게 목회적 조언을 줍니다. 첫째는 부하려 하는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9–10).” 이것은 소유가 많은 부자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목표인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 소유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소유(돈)가 주인인 사람은 결국 믿음에서 떠날 것이라고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부자 관리가 자신의 소유에 대하여 가졌던 태도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아는” 자족의 태도가 중요합니다(딤전 6:6,8). 자족은 은혜의 열매이고 증거입니다.
바울 사도가 소유/부에 대한 태도와 관련하여 주는 두번째 경고/조언이 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7–19).” 첫번째 경고가 ‘부하려 하는 자들’과 관련된다면, 두번째 경고는 ‘이 세대에서 (이미) 부한 자들’과 관련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는 부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나 물어주겠다는 삭개오의 태도는 마음을 높이지 않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소망은 소유와 재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자 관리는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재물이 아닌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말은 그의 주인이 재물(돈)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자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부자 관리와 달리, 삭개오처럼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는 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유를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는 구원과 직결된 문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소유의 유무, 그리고 소유를 어떻게 처분했는가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열매를 맺습니다. 특별히 소유/재물에 대한 태도에서 완전하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부자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소유가 주인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가난한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 없음이 그를 소유에 대한 애착으로 인도하여 소유의 종으로 살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만들어내는 너무나 확연한 열매입니다. 구원 얻는 은혜는 소유와 재물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소유(재물/돈)에 대하여 가진 태도는 여러분의 구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7. 교훈과 적용
두 부자에 대한 말씀을 정리하면서 적용적 교훈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A. 구주(the Savior)와 주님(the Lord)이신 그리스도 (고전 6:20)
먼저 소유의 유무나 처분의 문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분명히 합시다. 그러나 소유에 대한 태도는 구원과 직결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안전 지대는 없습니다.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주인이 바뀐 사람입니다. 소유나 재물은 물론, 삶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형벌과 저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여 주신 구주일 뿐 아니라, 삶과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구주로만 인정하고 주님/주인으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비록 날마다 넘어질지라도, 회개함으로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이 자신을 참된 신자요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로 여기신다면, 아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합니다(고전 6:20).


B. 모든 것이 은혜다. (고전 15:10)
그러나 위험은 늘 존재합니다. 이 위험을 피하려면 순서를 주의하십시오. 열매가 먼저가 아니고 은혜가 먼저입니다. 은혜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자 관리와 달리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었다고 해봅시다. 베드로가 큰 부자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렇게 했지요.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와 제자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종, 돈의 노예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의 축복은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하신 하나님을 빼어 닮은 모습이 아닙니까?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죄인은 스스로 이렇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행할 때,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 그래서 우리가 부자 관리에게서 살짝 보았던 것처럼, 자기 의를 인정받고 싶어하거나 자랑하는 자리로 결코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그 은혜의 열매를 드러냄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