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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레이스 - (4). 잔치로의 초대

누가복음 14:15-2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6-25

말씀내용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관한 진리들은 거의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깨고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관한 진리들은 내 생각과 꼭 맞는다고 느끼고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아, 내가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구나!”하는 깨달음이 오는 날이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복음을 알고 깨우치는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새삼 깨닫고 감격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이런 순간은 일생에 한 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매주일이 우리 모두에게 그런 날이 되기를 바라며 말씀을 전합니다.


1. 배경: 바리새인 지도자의 초대 (1-14)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배경을 잠깐 살펴보지요. 예수님은 다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으로 식사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떡 잡수시러’라는 말은 식사 초대를 받으셨다는 말입니다(1).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수종병이 든 사람이었습니다. 수종병(hydrops/dropsy)은 체액의 과다로 팔과 다리, 피부가 부어 오르는 병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과연 이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안식일을 범할 것인지의 여부를 지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주셨고 안식일의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잔치에 관한 두 개의 교훈을 주시는데, 첫째는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 높은 자리 대신 끝자리에 앉으라는 것이었고(7-11), 둘째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새인에게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 부자 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12-14).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행한 은혜 베풂은 부활의 때에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말씀을 듣던 한 사람이 말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15).” 아마 이 사람은 바리새인 중 하나였을텐데, 바리새인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 참석하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의미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즐겁게 먹을 사람들 중에 자신이 당연히 포함되리라고 생각하는 손님들의 자신감과 자아도취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구원의 확신과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한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이 본문에 기록된 큰 잔치의 비유인데, 비유의 초점은 ‘누가 결국 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입니다. 종말을 잔치에 비유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 정서를 반영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님의 결론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생각을 무너뜨립니다. 누가 그 잔치에 참여할 것인가? 종말의 천국 잔치에 자기는 참여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모든 사람이 거기에 포함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초청하신 하나님을 멸시하고 세상 일에 몰두함으로써 스스로 그 잔치로부터 배제될텐데,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경멸함으로써 스스로 배제되는 것입니다.


2. 원래 초대를 받았던 손님들 (12, 15-20; 신 20:7; 24:5)
당시 큰 잔치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중 초대가 행해졌습니다. 처음 초대장에는 세부 정보를 제공하고 초대받은 사람의 참석 약속을 확보하는 내용이 담겨 있고, 두번째 초대장은 만찬 당일에 보내졌습니다. 처음 초대를 수락하면 잔치날의 초대장에도 응답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주인은 일차 초대에 응한 사람의 숫자에 맞추어 고기와 음식의 양을 준비했기에 일차 초대에 응했다가 당일에 초대를 거절하는 일은 매우 무례하고 드문 일이었으며, 이것은 초대한 사람의 명예를 손상하는 모욕 행위로까지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 하나, 당시 잔치의 초대장이 누구에게 보내졌는가는 잔치를 베푸는 사람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고 증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앞에서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12)”고 하신 것이지요. 이 비유에서 잔치를 베푼 사람이 처음에 초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청중들이 공감할 만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일차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인은 잔치 당일 종을 다시 보내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전하는(17) 이차 초대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두번째 초대를 거절합니다. 여기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첫째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라고 말합니다(18). 이 사람은 상당한 재산가로 보입니다. 그는 당시 흔한 부재 지주이거나 도시의 부자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인물은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라고 핑계를 댑니다(19). 당시 보통의 농부들은 소 한 겨리 또는 두 겨리를 소유했는데, 이 사람은 소 다섯 겨리나 필요로 할 만큼 대단한 농지를 가진 부유한 농부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지 소를 시험하러 갈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이날 소를 시험하러 간다고 말함으로써 초대를 거절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런 핑계는 중고차를 구입했기 때문에 지금 매장에 가서 차의 종류와 연식을 살펴보고 시동도 걸어봐야겠다고 하면서 아내와의 저녁 약속을 취소하는 남편과 같다고 말합니다. 세번째 인물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말합니다(20). 모세의 율법에서 신혼은 군대를 면제 받을 조건이기는 하였으나(신 20:7; 24:5) 잔치에 오지 못할 정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일차 초대를 승낙했던 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소위 상류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 일치하게’ 잔치 당일의 이차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초대한 사람을 모욕한 셈입니다.


3. 두번째로 초대받은 손님들 (눅 14:21-22; 7:34)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자, 집 주인이 노합니다. 그리고는 그 종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합니다(21). 집 주인이 지목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집 주인은 보란듯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신체 장애인들을 찾아 데려오라는 겁니다. 왜 이들입니까? 예수님은 여기서 당신의 메시아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눅 7:34).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비유 속의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들은 가난하거나 신체적 장애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종은 주인의 말대로, 시내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들과 신체 장애인들을 잔치 자리에 불러온 뒤에,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된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라고 보고합니다(22).


4. 초대하고 초대하고 초대하시는 하나님 (22-23; 15:11-32)
이제 여러분은 여기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그래, 그만하면 됐다. 이젠 잔치를 시작하자.”라고 할 듯 싶은데, 주인은 말합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 주인은 세번째 대상들에게 종을 보냅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는 대단히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그들은 멸시 받는 직업, 혈통, 종교적 부정, 가난 그 어떤 원인 때문이든지 사회적으로 멸시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들을 더 불러오라고 지시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강권하여 데려다가’입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폭력을 수반하지는 않지만, 거의 억지로라는 뜻을 포함하는 매우 강력한 단어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두번째도 그렇지만 세번째로 이 잔치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자기들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주인의 큰 잔치에 초대받을 것을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잔치 자리에 데려오려면 강권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을 설득하고 집요하게 강요해야만 그들을 설득하여 잔치 자리에 앉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주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격 없는 자들을 잔치 자리에 초대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눅 15:11-32)에서도 아버지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 모두를 잔치 자리에 들어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자고 초대하고 부르는 아버지입니다.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22)”라는 종의 말은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속해서 구원 받을 자들을 찾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집 주인은 자기 잔치에 사람이 가득하게 차기를 바라며, 자격 없는 자들을 초대하고 또 초대하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불리셨지만, 우리가 보듯이 바리새인들의 초대에도 응하심으로써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잔치의 자리에 초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5. 큰 잔치는 열릴 것이다! 연기되지 않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일차로 초대받은 손님들이 오지 않겠다고 거절을 했다고 해서, 집 주인이 잔치를 연기하거나 취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종말의 날,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불리는 천국 잔치는 결코 연기되거나 취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하늘의 큰 잔치가 열릴 것을 알고, 준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큰 잔치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이 가져다 주는 궁극적인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큰 잔치를 예비하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특이한 점은, 주인이 많은 종들을 보내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의 종만을 보낸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하늘의 잔치를 예비하고 그 자리에 사람들을 초대하기 위해서 보냄 받으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암시합니다. 그 종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초청에도 응하셨지만, 일반적으로 “저들은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죄인과 세리들과도 한 상에 앉아 잡수시면서 그들에게 천국 잔치의 초대장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 잔치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믿어지지 않는 초대를 믿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어떤 합당한 이유로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그 잔치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잔치는 그 날에 열릴 것이고 연기되지 않을 것입니다.


6. 말도 안 되는 은혜에 어리둥절한 사람들! (24; 창 12:1-3)
예수님의 청중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그날의 잔치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연히 그 잔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복의 잔치에 참석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잔치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그 자리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처음의 초대장이 주어질 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지던 다른 사람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결국 그 잔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사실, 여기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주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먼저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처음 초대를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을 부를 때,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1-3).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이 번번이 그 초대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초대장은 이제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플랜 B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말씀하셨던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상상도 할 수 없던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멸시하던 바로 그 이방인들에게 말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바로 이 구속의 경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을 초대하신 바리새인의 지도자와 그런 생각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사랑 어린 경고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유대인—이방인의 구도에서만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지금도 자신이 장차 천국 잔치에 들어가 앉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합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무서운 경고로 마치는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24).” 사랑하는 여러분, 이 비유는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못마땅하게 여기시거나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뿌리 뽑으시고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확신이며,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믿을 수 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수반합니다. 구원을 당연시하고 습관처럼 여기는 태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국 천국 잔치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들어와 앉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이런 사람들은 나와는 안 맞아!”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불편해 하는 그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 불편함에 대해서 조금 말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가졌던 생각이기 때문이고 우리 본성에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서 이런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경험한다면, 그 불편함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나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한데, 저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생각과 태도입니다. 비유 속의 큰 잔치는 종말의 천국 잔치의 그림자이고, 이 세상에서 그 잔치의 성격을 보여주는 곳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불편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뭐지? 내가 왜 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일반적인 유대인들에게 죄인과 세리는 불편한 존재였고 함께 앉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천국 잔치에서 너희는 그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종이 가져온 초대장을 받고는 하나 같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이건 말도 안 돼!”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기에는 너무나 좋은 소식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을 향한 주님의 경고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고 함께 먹는 것이 불편하니? 그렇다면, 너희는 종말의 천국 잔치에 앉게 되더라도 불편하다고 느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될거야. 왜냐하면 교회와 그곳은 조금의 차이도 없거든.”
삶의 자리가 너무 부요해서 은혜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보다 비참한 인생이 있을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비즈니스와 가정사에 얽혀 이 초대장을 한 번 정도는 무시해도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당연함과 익숙함이 가져온 부주의이고 경솔함입니다. 당연함의 자리에 은혜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지금은 너무 부요해서 은혜를 느끼지 않는 비참한 사람들이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이 비유에서 그 잔치에 결국 앉게 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온 초대가 말도 안 되는 은혜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초청을 받고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기에는 너무나 좋은 소식에 당황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종말에 그 천국 잔치에 앉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