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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레이스 - (3). 두 죄인 이야기: 은혜가 만드는 사랑

누가복음 7:36-50, 누가복음 7:34, 디모데후서 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6-18

말씀내용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길따름이들인 오늘날의 교회가 과연 그러한가 자문해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이 유대 사회에서 가장 경건하고 반듯한 사람들이 볼 때, 세리와 죄인은 동의어였고, 매춘부들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소위 경건한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을 멸시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받으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배경으로 합니다. 7:34을 보지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누가복음 7:34).”


1. 연회장 사건 (36-39)
사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만 어울리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하신 일을 오늘 본문 외에도 두 번 더 소개합니다(11:37-54; 14:1-24). 본문에서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이름은 유대인 남자에게 흔하디 흔한 시몬입니다. 사건은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초대한 연회장에서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잠깐만 짚고 갈 필요가 있는 것은, 네 복음서가 모두 여인이 예수님께 기름을 부은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모두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 복음에서의 사건은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지만(마 26:6-13; 막 14:3-9; 요 12:1-8),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기록은 다른 사건을 가리킵니다. 시기적으로 전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후자는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사건이며, 장소도 전자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지만, 후자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은 나사로의 자매인 마리아로 특정할 수 있지만(요 12:3), 누가복음의 여인은 특정할 수 없습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서 베푼 연회에 초대했습니다. 이 연회는 고대 그리스-로마식 심포지움이었을 것입니다. 심포지움은 식사하고 나서 대화를 하고 때로는 논쟁도 하는 고급 연회입니다. 이때는 아직 공생애 초기였기에,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에 대해 단정적인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신 18:15). 당시 연회를 할 수 있는 가옥 형태는 보통 뜰이 있고 방들이 뜰을 둘러 열린 형태로 있었기에, 연회에는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한참 연회가 무르익었을 무렵이었을까요? 연회의 분위기를 갑자기 싸하게 만드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여인은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었고,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진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매춘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그녀가 연회에 들어와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 하시는 예수님의 발치에 서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기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여인이 공개적으로 머리를 푸는 행동은 당시의 관습으로 보면, 대단히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녀는 감정이 복받쳐 예수님의 발을 적실 만큼 많은 눈물을 흘렸고, 또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젖은 발을 닦았습니다. 어떻게 봐도 이것은 극도로 자신을 낮추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발에 입맞추고 그 발에 향유를 부었는데, 이 두 동사가 미완료시제로 쓰인 것을 볼 때, 그녀는 계속해서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45절에서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녀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혔는가 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보면, 어떤 사연이 있는 여인인가 보다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그 연회에 참석한 바리새인 시몬의 친구들과 다수의 유대인 남성들에게 그녀의 행동은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부적절하고 관능적인 행동으로 읽혀질 행동이었습니다. 그녀가 알려진 죄인이라는 사실도 그들의 이 판단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연회장을 순식간에 싸하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불결한 여인의 존재는 제의적으로도 경건한 식사 자리와 자신들을 부정하게 오염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은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혼잣말로 생각합니다(39). 연회장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제 숨을 죽이며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을 하시는지 지켜 보며 기다렸습니다.


2. 예수님의 비유 (40-43)
예수님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고 말씀하시자(40), 시몬은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시몬의 혼잣말에 주님은 비유로 대답하십니다. 두 빚진 사람의 비유입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같은 채주에게 빚 졌는데, 두 사람 모두 갚을 능력이 없자 채주가 두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는 너무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의 품삯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임금의 비유(마 18:23-34)에 비하면 밋밋하고 드라마틱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이어지는 적용 부분에서 강렬함이 더해집니다. 주님이 하시려는 말씀의 핵심은 주님의 질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2b)” 시몬이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쉽게 대답하자 주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하십니다(43). 여기까지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이제 주님은 비유를 상황과 사람에게 적용하십니다.


3. 두 죄인의 상이한 반응 (44-46)
주님은 바리새인 시몬과 죄인인 여인을 대조시키십니다. 여인의 행위를 통해 시몬을 고발하시는 겁니다. 시몬은 집주인으로서 자기가 초대한 손님인 예수님에게 발 씻을 물도 제공하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자기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머리털로 닦아주었습니다(44). 발 씻을 물도 예수님께 주지 않은 시몬의 행동은 당시 관습상 손님에게 큰 결례가 되는 행동이었습니다. 시몬은 손님들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손이나 볼에 입을 맞추는 행동도 하지 않은 반면, 이 여인은 손이나 볼도 아닌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끝으로 시몬은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으나,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고급 향유를 부었습니다. 시몬은 적절한 손님 환대로써, 단 하나의 행동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에게 매우 무례하고 불손하게 행동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또 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신분의 차이나 남녀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진심과 태도에서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어낸 것입니까?


4.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가? (47)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이 대조하고 비교하신 이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용서받은 죄의 차이이고 탕감 받은 액수의 차이였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 주님은 여기서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하실 때, 완료시제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여인의 죄가 지금 막 용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를 받은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과의 어떤 만남, 어떤 말씀을 통해서 이 여인은 이미 회개했고 많은 죄를 용서 받은 상태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녀는 그 큰 은혜가 고마워서 견딜 수 없어, 예수님께서 인근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신다는 소식을 알고는 그 자리에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외계인이나 전염병처럼 여기는 소위 경건한 바리새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많은 죄로부터 자신을 용서해주신 주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5. 두 죄인 (딤후 3:5)
이것이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간파하셨습니까? 이것은 바리새인 시몬과 죄인인 여자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한 사람은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죄인이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너무나 깊이 인식하는 겸손한 죄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교만한 죄인과 겸손한 죄인으로 나뉩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입니까? 바리새인 시몬 쪽입니까, 시몬이 멸시하는 죄인인 여자 쪽입니까? 그 여인은 자신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다는 사실을 알았고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복받치는 심정에 흐르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녀는 수치와 위험을 감수했고, 낮아지기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겸손한 죄인, 자신의 많은 죄가 용서받은 것을 아는 죄인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으로 대표되는 또 한 부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거나, 죄인으로 여기더라도 형식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죄용서의 경험이 아예 없거나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나 아주 조금 인정하는 수준입니다.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 모양이며(딤후 3:5) 사랑이 아니라 말과 형식입니다. 시몬이 그랬습니다. 그는 주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었기에, 발 씻을 물도, 입맞춤도, 감람유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종교적 형식이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죄사함을 경험한, 거듭난 영혼의 가장 분명한 변화이고 증거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죄가 사함 받은 것에 대한 반응이고 결과이며 증거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종교적 형식 때문에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영적 무지와 기만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경건(의 형식)이 장애물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자신의 옳음과 반듯함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은혜도, 감격도, 사랑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익숙합니다. 죄의 반대말은 미덕이 아니라 믿음이지만, 시몬은 죄의 반대말을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미덕을 쌓는 만큼 주님과의 진정한 관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시몬과 같은 부류의 죄인이 가지는 비참함입니다. 여러분은 두 죄인 중에 어느 죄인에 속합니까?


6. 주님과 관계 맺기—은혜가 만드는 사랑
우리는 “그러니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헌신하고 더 잘 섬기자”는 결론을 섣불리 내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려면, 자기의 많은 죄가 사함 받은 줄을 알고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작하지 않고, 무작정 주님을 더 사랑하자고 하면, 그것은 마음 없는 섬김, 율법주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고, 바리새인 시몬의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하기를 일평생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또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해서(롬 5:20)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습니까(롬 6:1)?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더 깊이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더 깊이 알 때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이고, 더 깊이 맺는 것이라고 도전합니다. 이 관계 없이, 누구도 주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맺는 진정한 관계를 설명해주는 한 단어는 은혜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많은 죄가 사하여진 것을 경험했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겁니다. 그녀는 이 은혜를 통해서 주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서 보듯이, 이 은혜가 사랑을 만듭니다. 여인은 은혜를 입고 경험했기에,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그녀로 하여금 수치와 위기를 감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주님은 시몬에게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신 뒤에(47) 다시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십니다(48). 그녀의 죄가 이미 사함을 받았다면 주님은 왜 그녀에게 다시 이 선언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함께 연회에 참석하여 이 모든 광경을 지켜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은 또 속으로 말합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49)”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며, 당신과 맺는 진정한 관계는 죄 사함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인 판단과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신학적으로도 정통한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아주 좋게 보아줄 때, 시몬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여인은 죄사함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신앙은 죄사함의 은혜를 통해서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만났습니까? 그는 나의 많은 죄를 용서해주신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날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나고 계십니까?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주님께 나아가 날마다 죄 용서의 은혜와 기쁨을 얻고 있습니까? 만일, 그 은혜가 놀랍고 크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죄를 조금 사함 받았다고 느끼는 것이고 우리가 자신의 죄의 크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처럼 자기의 많은 죄를 인식하고 죄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그 은혜는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은혜가 사랑을 만들어냅니다. 이 여인이 보여준 것이 그것입니다. 반면, 은혜 없는 주님과의 관계는 옳음(자기의)과 판단만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시몬처럼 판단자의 자리에 서려고 할 것입니다. 은혜가 규정하는 관계가 되지 못할 때 일어나는 두려운 현상입니다.


7. 주님이 바라시는 공동체
이 이야기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처럼 열린 결말로 마칩니다. 예수님은 시몬이 죄인으로 알려진 여자를 비난하지 않고 영접하기를 바라십니다. 여인은 이미 전에 죄 용서를 받았지만, 예수님은 시몬을 위해서 다시 그녀의 죄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시몬이 여자가 용서받은 상태임을 깨닫고 그녀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조엘 그린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여자가 개인적으로 용서를 경험하거나 하나님의 영접하심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 여자가 회복되는 것에 관심을 둔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사건에 등장하는 죄인인 여자를 교회에 받아들일 의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녀의 많은 죄를 용서하셨고, 그녀의 수치, 그녀의 약함, 그녀의 죄악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의 수치와 약함과 죄악을 용서하시고 능히 용납하십니다. 이 은혜는 공동체를 창조합니다. 데이비드 갈런드는 말합니다.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결합시키는데, 그것은 사회적 사건이다.” 은혜는 공동체를 세워갑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이런 공동체를 세워 주시기를 구합시다. 그리고 이 은혜를 받는 자리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