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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레이스 - (2). 보상에서 은혜로!

마태복음 20:1-16, 히브리서 11:6, 누가복음 15:3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6-11

말씀내용
1. 부자 관원 그 이후 (마 19:16-30; 눅 18:18-30)
우리가 지난 주일 살펴본 누가복음의 본문은 삭개오의 이야기에 앞서, 삭개오와는 대조되는 부자 관원을 먼저 소개했습니다(눅 18:18-30). 우리가 알다시피, 그 부자 관원은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 18:22)”는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떠나갔습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은 이어서 은혜를 받은 한 부자를 소개하는데 그가 삭개오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본문은 누가복음과는 좀 다른 맥락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도 삭개오의 이야기처럼, 그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마태복음은 이 사람을 재물이 많은 청년으로 묘사합니다.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갔습니다(마 19:22). 그래서 주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몹시 놀라 묻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25)?”
당시 유대인들은 많은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이며,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놀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아 누리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베드로의 질문에서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는데, 보상이라는 주제입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떠나갔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기들은 무엇을 얻게 되겠느냐는 질문입니다(마 19:27). 오늘 주님의 비유는 베드로의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2. 보상의 관점(마 19:27-30; 20:16)—상주심을 바라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다(히 11:6).
먼저 보상을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 꾸짖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태복음 19:28–29).”
보상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적절한 동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나쁜 동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긍정을 하셨고, 히브리서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이라고 말하면서(히 11:6),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고 모든 시련을 견뎌냈는지를 말합니다(히 11). 요한계시록에서도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을 약속하시지 않습니까(계 2:7,10,17,26-28; 3:5,12,21)?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보상을 바라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태복음 19:30).” 이 말씀이 ‘왜냐하면’이 아니라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보상을 바라는 건 나쁜 건 아니지만, 천국은 그게 다가 아니야!”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주님의 비유와 장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이 비유는 19:30과 20:16의 수미쌍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19:30과 20:16은 비유의 서론과 결론으로 이 비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보상의 관점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뭔가가 더 있다는 것입니다.


3. 은혜로운 집주인의 비유(마 20:1-16)
이 비유는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부자 관원의 이야기에 삭개오의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재물이 많은 청년의 이야기에 이 비유가 이어집니다. 이 비유는 보통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고 불리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은혜로운 집 주인의 비유’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포도원 품꾼이 아니라, 은혜로운 집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이러합니다. 포도원을 소유한 집주인이 있습니다. 그는 이른 아침 6시 쯤, 포도원에서 일할 일용직 일꾼(품꾼)들을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고용합니다. 그는 아침 9시 쯤, 다시 장터에 나가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늦기는 했지만 ‘상당하게(공정하게)’ 품삯을 주겠다고 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합니다. 여기까지는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일손이 더 필요해서 그러려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 주인이 낮 12시에, 그리고 오후 3시와 오후 5시에 계속 나가서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찾아 고용하는 걸 보니 좀 이상합니다. 오후 5시면 1시간만 일하면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간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오후 5시에 나간 집주인은 품꾼을 찾기까지 합니다. 6절에 ‘나가 보니’는 3절에 ‘나가 보니’와 헬라어로 다른 말이 쓰였는데, 6절에서는 ‘나가서 찾았다’는 의미입니다. 장터에서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이 오후 5시에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사실, 집주인이 그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6)?”고 물어보지요. 여기서 ‘놀고’라는 단어는 3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게으르다’는 부정적 의미 보다 ‘할 일이 없는, 실직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7).”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핑계라기 보다, 이들이 모든 고용주에게 외면당한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품꾼들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오후 5시에 고용된 품꾼들은 시간적으로만 늦게 온 사람들이 아니라 가치면에서도 고용주들에게 외면 당한 사람들, 일하기에 부적합해 보이는 허약한 사람들이었음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 6시 해질 녘이 되어,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8)”고 말합니다. 지불 순서도 이상합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아닌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는데,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와 1시간 정도 일한 품꾼들이 먼저 한 데나리온 씩을 받습니다. 먼저 고용된 품꾼들이 이것을 보자 자기들은 분명히 더 받겠구나 생각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오후 3시에 고용된 자들, 정오에 고용된 자들 그리고 아침 9시에 고용된 품꾼들이 차례로 모두 한 데나리온 씩을 받게 되고, 아침 6시부터 수고한 품꾼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장 많이 수고한 자들이 불만을 터뜨립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 아침 6시부터 일한 한 사람의 원망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해하는데 조금의 어려움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이 상황에서 이렇게 반응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집주인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3–15).” 주인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주인은 아침 6시에 고용하면서 분명히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고(2), 아침 9시와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에 고용되는 품꾼들에게는 ‘상당하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4,5). 그들은 하루 품삯에서 시간 계산을 해서 주겠지 기대했을텐데, 모두 한 데나리온 씩을 받았으니 더 받은 셈이고 주인은 후히 베풀어준 셈입니다. 당시 일용직 일꾼은 하루 일을 하지 못하면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하루 한 가정의 생계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집주인은 품꾼들이 몇 시간을 일했든지 하루의 필요를 채워준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집 주인이 품꾼들을 구하러 계속 장터에 나간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는 포도원에 일이 너무나 많아서가 아니라, 불러주는 고용인이 없어 종일 놀고 서 있는 품꾼들의 곤경을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상 집 주인은 누구에게도 부당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약속한 것을 이행했을 뿐 아니라, 딱한 자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는 말로 이야기를 마치십니다.


4. 보상의 관점이 위험한 지점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 비유는 비유의 배경이 된 보상의 관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분명히 보상의 관점이 틀렸다거나 나쁘다고 하지 않으셨지만, 이 비유를 통해서 보상의 관점이 가지는 한계, 보상의 관점이 언제 위험해지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보상의 관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A. 보상이 비교를 만날 때 (15)
첫째 보상의 관점이 위험해지는 때는 보상이 비교를 만날 때입니다. 아침 6시에 고용된 품꾼들이 제일 먼저 약속된 한 데나리온 씩을 받아 갔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품꾼들이 다 받은 다음에 자기 품삯을 받음으로써, 비교하게 되었고 거기서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집주인이 한 시간 일한 품꾼에게 베푼 넉넉한 은혜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점에서 “이 비유의 주제는 공정한 대우를 받은 형이 아무 자격 없는 동생에게 베푼 아버지의 관대함에 분개하는 탕자 비유의 주제와 같다.”고 R.T.프랜스는 말합니다. 형이 혼자 지낼 때는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동생이 돌아오자, 문제가 터졌습니다. 형의 불만이 폭발한 것입니다.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기던 형이 자격이 되지 않지만 과분한 대우를 받는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문제가 터진 것입니다. 집주인이 원망하는 자에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5).” 악하게 본다는 말은 직역하면 ‘네 눈이 악하다’는 말인데, 시기나 질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시기와 질투는 비교에서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이 비유에서도 우리가 제삼자인 관찰자로서 이야기를 대한다면, 탕자를 가슴에 안아주는 아버지나, 한 시간을 일한 품꾼에게 그 가정이 필요로 하는 하루 생계비를 베풀어 주는 집주인은 멋지고 은혜로운 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제삼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 생활에 익숙한 우리는 자연스레 형의 자리 혹은 아침 6시부터 일한 품꾼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멀쩡히 지내다가, 은혜를 받는 누군가를 보고 비교를 하게 될 때, 불만을 터뜨립니다. 여기에 보상의 관점이 지니는 위험과 한계가 있습니다.


B. 공평함이 은혜를 이길 때
우리가 이렇게 되는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공평함이 은혜를 이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당연하게 여겨지기 시작할 때, 공평함의 가치가 그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적인 공평을 초월한다(R.T.프랜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이건 불공평해!”라고 불만을 터뜨려 보았습니까? 보통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거나,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에는 은혜를 누리지 못할 때이고, 마음에서 감사가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불행하다고 느낄 때, 그렇게 말합니다. 그때가 공평함의 가치가 은혜를 이기는 때입니다.
보상의 관점은 나쁘거나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공평함을 은혜 보다 우위에 둘 때 문제가 됩니다. 보상의 관점만으로는 천국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방식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십니다.


5. 은혜의 관점이 주는 기쁨 (눅 15:32)
이런 질문을 해보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그것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베풀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베풀어지는 은혜를 보면서 기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분한 은혜를 받은 자가 아니라, 마땅한 권리를 가진 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의 관점이 아니라 공평함과 공정함의 잣대(보상의 관점)로 대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되겠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은혜의 관점은, 보상의 관점이 충분히 제공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기쁨입니다. 은혜의 관점은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비유의 초점은 사실 나중 된 자가 아니라 먼저 된 자,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아니라 하루 종일 더위와 싸우며 일한 사람을 향합니다. 오후 5시에 고용된 품꾼은 과분한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했겠지만, 아침 6시에 고용된 품꾼은 불공평하다며 원망하며 분노했습니다. 오늘은 아침 6시에 고용이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여겼던 기쁨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형을 잔치의 자리로 초청하는 아버지는 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누가복음 15:32).” 여기서도 자비롭고 관대한 집주인의 마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보상의 관점은 비교와 원망으로 인도할 위험이 있지만, 은혜의 관점은 언제나 기쁨을 선물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이 기쁨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6. 천국은 이와 같으니 (1, 11-12)
이 비유의 시작을 잘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1).” 은혜로운 집 주인은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천국은 집 주인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천국은 보상 그 이상을 다룬다는 것을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세상에서는 보상의 원리가 통용되지만, 천국에서는 은혜가 지배합니다. 천국에서 인간의 생각은 역전됩니다. 분개한 품꾼들의 불평과 항의는, 보상이 수고에 비례해야 한다는 공평함의 가치만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공평함의 가치나 보상의 관점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경쟁이나 비교의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원리는 힘없고 쓸모없는 자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후 5시까지 어떤 주인에게도 선택 받지 못한 허약하고 병약해 보이며 쓸모 없어 보이는 사람을 찾으러 나가는 집 주인과 같습니다. 하마터면 온 식구가 굶을 뻔 했지만, 가족이 필요로 하는 몫을 후하게 넘치도록 은혜로 베푸는 주인이 천국의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지배합니다. 꽃에게 옷을 입히시고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마 6:26-29) 그의 종들에게 그들의 수고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종일 일한 품꾼들의 실망감이나 부당하다는 의식은 우리가 얼마나 천국의 은혜의 원리 보다 공로에 대한 인간적 생각에 좌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보상에 대한 전통적 관점을 보여주는, 하루 종일 일한 자들의 불평은 탕자의 형의 관점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관점입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도 우선권을 주장하거나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권리를 가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승리했고 모든 사람이 상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7. 보상에서 은혜으로! (16,27)
비유의 핵심은 하늘나라에서 공평에 기초한 보상을 받는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상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일꾼은 자신의 수고에 근거해서 받아야 할 보상을 계산하거나 짧고 적게 일한 사람들의 보상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긍휼이 언제나 보상보다 훨씬 더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강대훈).
주님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나중 된 자로서 천국에서 먼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먼저 된 자로서 천국에서 나중 되기를 원하십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7).” 먼저 된 자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보상의 관점을 견지하느냐, 은혜의 관점을 견지하느냐는 여러분이 자신을 비유 속의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오후 5시에 간신히 은혜로운 집 주인에게 발견되어 고용됨으로써 식구들을 먹여 살릴 은혜를 입은 품꾼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도록 초청합니다. 그는 은혜의 관점으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이며, 자비롭고 선하며 무한히 은혜로우신 집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 자기 인생에서 그분을 섬겼다는 사실로 감격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공평함의 기준을 넘어, 보상의 관점을 지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율법 아래 있고 덜 은혜 아래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요구를 받았던 재물이 많은 청년과 달리, 드렸다고 해도 별로 드린 것이 없는 제자들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오후 5시에 고용된 품꾼처럼, 마땅히 하나님께 요구하고 주장할 보상이 변변치 않은 겁니다. 여러분은 그리 뛰어나지도 못하고, 허약하고 병들어서 인생이 다 가도록 주인에게 부름 받지 못한 인생은 아닙니까? 그러나 감사할 이유가 있고 기뻐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게” 하시는 분이시며, 그는 오후 5시에라도 놀고 서있는 불쌍한 자격 없는 인생들을 부르셔서 공평함의 가치와 보상의 관점을 넘어 넘치는 은혜로 대우하시는 선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 드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