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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안식일, 예배의 날 - (3). 예배의 날에

이사야 58:13-14, 이사야 66:23, 시편 32: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4-30

말씀내용
우리는 《안식과 안식일, 예배의 날》에 대한 주제로 주의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번째로 ‘예배의 날’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주일에 살핀 본문을 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안식과 안식의 날 (렘 2:13; 마 11:28; 출 20:8-11; 31:13,17)
태초에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며 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창 2:3). 이날은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밤을 지내고 나서 맞은 첫 날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었으며, 안식이 본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임을 암시하는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범죄는 인간으로부터 안식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노동은 고생이 되었습니다. 이후 참된 안식을 알지 못한 채, 노동과 오락의 쳇바퀴 속에서 피로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 되었습니다. 오락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이 되었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지적대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서 해갈하려는 어리석고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렘 2:13).
이 비참한 인생에 안식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죄의 짐 아래서 안식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을 당신에게로 부르셨습니다(마 11:28). 그리고 우리에게서 안식을 앗아간 죄를 도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니, 우리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참된 안식을 몰랐습니다.”(『고백록』(1.1))
이런 큰 그림에서 하나님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내신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셨고(출 20:8-11)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표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13,17).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 선한 의도로 주신 안식일 계명은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짐과 멍에가 되고 말지요.
이 딜레마는 현대의 피로사회를 사는 우리에게도 존재하는 씨름입니다. 많은 점에서 현대 사회는 과거와 비할 수 없는 편리함으로 가득하지만, 현대인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누적된 피로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보상 심리 때문에 필사적으로 자기의 오락을 추구함으로써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쉬면 쉴수록 더 피곤하고 또 그 피곤한 쉼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일합니다. 자, 그래서 이 피곤한 세상 살이에서 믿음은 무엇이며, 예수님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바로 이 질문이 제가 《안식, 안식의 날 그리고 예배의 날》이라는 시리즈로 말씀을 상고하려는 이유입니다.


2. 여호와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 예배 (레 23:3; 사 66:23; 시 32:11; 37:4)
본문 14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안식일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즐거운 날입니다. 여러분의 경험은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네 길’로 행하지 않고 ‘네 오락’을 구하지 않으면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을 설계하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안식의 열쇠가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오락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울 수 있습니까?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이 예배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일은 예배 안에서 가장 놀랍게 이루어지고 경험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일은 현세와 내세의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안식일을 두 번이나 ‘내 성일’과 ‘여호와의 성일’이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날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율법도 안식일이 예배의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레위기 23:3).” 성회의 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성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을 마치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이사야 66:23).” 안식일은 예배의 날임이 분명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문서들을 작성한 신학자와 목사들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60문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60문) 안식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안식일에는 온종일 거룩한 안식을 취하면서 불가피한 일이나 긍휼을 베푸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른 날에 합법적으로 용인되는 세속적인 직업 활동과 오락까지도 모두 중단하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시간을 온전히 바쳐 거룩히 지켜야 한다.”
그들은 안식일에 성도들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시간을 온전히 바쳐 거룩히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점에서 주일은 성도들에게 안식의 날이자, 예배의 날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까?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시편의 두 구절을 읽기를 원합니다. 32:11과 37:4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편 32:11)…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
이 명령들은 기쁨과 사랑이 없이는 순종할 수 없는 명령들입니다. 이 명령들은 외적 행위의 의무를 이행하라는 게 아니라, 내적 의무에 대한 명령입니다. 이 명령들은 우리를 율법주의로 데려가는 명령들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는 의무 준수인데, 이 말씀은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닙니까? 공허한 예배 의식에 참석하는 일이 이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예배의 본질은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감격하여 이런 하나님은 없다고 즐거이 외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것이 예배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worship의 의미입니다.
톰 웰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배는 위대함에 대한 반응이다. 어떤 사람이 "이제부터 나는 예배자가 되겠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예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감탄과 숭배의 마음을 불러 일으킬 만한 위대한 어떤 것을 보게 될 때, 예배자가 된다. 이것이 예배자가 되는 유일한 길이다. 청교도 토마스 왓슨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하나님께 찬탄을 금치 못하게 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We glorify God, when we are God-admirers.).””
그렇다면, 예배야말로 예배자에게 최고의 즐거움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 완전히 매혹당하고 그 가치에 완전히 빠져들었을 때, 그것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내내, 여러분은 매우 행복할 것이며, 그 대상을 향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일 때,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세상에 무한히 선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존재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답에서 진술했듯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함의 절정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높이며 마음껏 예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일은 안식의 날로서 모든 일상의 일들을 그치고 멈춘 후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예배의 날입니다. 매주일마다 이런 일이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새롭게 됨을 경험하고 새 힘을 얻어 살아가겠습니까? 매주일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따라 리셋이 되는 것입니다.


3. 예배의 장애물들 (암 8:11-12)
이런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답고 듣고 상상하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이야기입니까?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는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그런 경험을 알아.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라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거나, “바로 요즘이야말로 내가 예배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살아가는 시간이야.”라고 고백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 예배는 우리에게 즐거움이 아닌 의무가 되곤 하는가, 왜 우리는 이런 예배의 기쁨에 이르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핍 내지는 왜곡입니다. 저는 10여년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지식이 왜곡되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해 보지 않은 가치를 선전하거나 칭송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지 못한, 혹은 동의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누군가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댄다면 여러분은 지겹다고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이와 같이 예배가 즐거움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거나 하나님에 대해 어떤 쓴 뿌리를 안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쩌면 한 번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이거나,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경험이 너무나 부족하거나, 어떤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치를 알고 찬송하는 유일한 애정은 그의 영광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 나온다. 예배의 잔치가 이 시대에 희귀하다면 그것은 말씀의 기근 때문이다(암 8:11-12).”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드러내려는 갈망으로 설교합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온전하게 드러낸다면,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조명하여 듣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파이퍼의 말대로, 예배의 연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둘째는 죄성에게 굴복하는 삶의 태도 때문입니다. 죄성은 아담이 범죄한 후에 모든 아담의 후손에게 주어진 죄의 성향입니다. 사람은 구원받은 후에도 다 이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성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구하는 대신 자기의 오락에서 즐거움을 구합니다. 그래서 발을 금하여 오락을 행하지 않는 것이 큰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길로 행하지 말고 네 오락을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죄성은 이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설득하고 회유하고 압박합니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 너무나 수고했어. 그래서 나는 오늘 주일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마음껏 하면서 푹 쉴 권리가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매주일 이런 싸움을 싸웁니다. 이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선하심을 맛본 사람이라면, 모든 유혹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고자 하나님께 나아올 것입니다. 나의 오락을 추구함으로 얻는 짜릿함과 기쁨 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기쁨과 만족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 죄성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는 게으름으로 나타납니다. 육체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여기고 게으름에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는 자유라든지 내 오락을 추구하는 것 뿐 아니라, 육체적 게으름도 역시 예배의 적이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예배의 적은 다른 말로 우상입니다. 하나님만을 예배의 대상으로 여기고 예배해야 하는 인간이 다른 것들을 예배할 때 바로 그것이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에배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여와 왜곡, 그리고 인간의 본성 깊이 자리하고 있는 죄성입니다.


4.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 (렘 32:39-41)
하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32:39-41을 보지요.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예레미야 32:39–41).”
여기서 선지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는 일을 결코 그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죄인의 돌 같은 마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할 수 없이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심정이 가슴에서 터져 오를 때까지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을 결코 지치지 않고 기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고 그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도취하여 결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예배에 생명과 죽음을 걸도록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은 우리에게 소망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노래할 이유가 있고, 찬송할 이유가 있으며 예배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안식의 날이 여러분에게 예배의 날이 되고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하십니다.


5. 교훈과 적용: 예배가 무너진 자의 비극 (마 25:29; 히 12:4; 창 4:3-5)
예배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이기심의 해독제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는 촉진제의 역할을 합니다. 예배 없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 없이 우리 삶에서 예배를 방해하는 내면의 장애물들과 싸워야 합니다. 이 내면의 장애물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자신을 드리십시오. 결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태복음 25:29).”는 말씀대로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그는 점점 예배에서 멀어질 것이고 그렇게 하는 만큼 그의 삶은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한 채 점점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히 12:4). 예배를 선택 사항이라고 여기게 하는 상황은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만일 예배가 이토록 중요한 것이고, 주일-안식일이 예배의 날이라면,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예배를 포기하고 타협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여러분의 인생에서 예배를 포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심지어 직업과 직장을 선택하는 일에서도 성도는 예배를 방해하는지의 여부를 고려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일, 세상에서 하루 동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것을 속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 가서 영원토록 그분만을 섬기게 된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일-안식일은 성도들에게 예배의 날로 주어졌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이 안식일에 우리가 가장 유념해야 할 관건입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타락한 뒤, 에덴 동산 밖에서 그들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의 예배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합니다. 창세기 4:3-5절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세기 4:3–5).”
저는 여기서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제물로 드렸는가를 주목하는 대신, 그들의 예배의 결과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제물만을 받고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 모두에 대한 반응을 동일하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결과는, 가인이 형제 살인이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가인의 형제 살인은 예배 실패의 결과였습니다. 예배의 실패는 이처럼 비참하고 무서운 결과를 인생에 초래합니다. 예배는 여러분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최고의 기쁨으로 매주일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은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