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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안식일, 예배의 날 - (2). 안식의 날에

이사야 58:13-14, 골로새서 2:16-17, 시편 16: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4-23

말씀내용
주일은 안식일입니까? 지금 성도들은 구약성경의 안식일에 대한 가르침을 주일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옳습니까? 이런 질문들은 때로는 불편하게 할 수도 있지만,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질문들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구약성경의 강조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주일이 안식일인가 하는 문제는 상당한 논쟁적 주제이지만, 저는 여러분을 논쟁의 복잡함으로 이끌지 않고 주일이 기독교의 안식일이라는 점의 핵심 근거를 제시하는 수준에서 입증하고, 주로 적용의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주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다. (골 2:16-17; 겔 45:17; 창 2:3)
주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입니다. 구약성경의 안식일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통해 성취되었으므로 신약 성도들은 안식일 준수로부터 자유롭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려면, 율법의 안식일 규정이 의식법에 속하는지, 도덕법에 속하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첫째로, 안식일 명령은 항구적인 도덕법인 십계명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의식법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안식일 규정이 의식법인가, 도덕법인가 하는 논란이 있는 이유는 두 종류의 안식일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로새서 2:16–17).”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은 의식법에 속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구약시대의 음식과 관련된 정결규정이나 날들과 관련된 것들을 말한 것입니다. 의식법이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과 함께 완성되었기에, 더 이상 신약 성도들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규정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안식일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두 종류의 안식일이 있습니다. 일주일 단위로 돌아오는 안식일과 유대인의 연중 절기와 관련된 안식일입니다. 유대인의 절기 중 안식일로 지키라고 한 날은 일년에 7일이 있었는데, 무교절 첫 날과 일곱째 날(출 12:16), 칠칠절(민 28:26), 초막절의 첫 날과 여덟째 날(레 23:34-36), 나팔절(레 23:23-25), 속죄일(레 16:31)입니다. 바울 사도가 언급한 안식일은 바로 이런 절기에 관련된 안식일들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이라고 한 것은 에스겔 45:17에서와 같이 전형적인 유대인의 기념절기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에스겔 45:17).” 바울 사도는 이런 안식일이 의식법에 속한 것이므로 폐지되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식법 안에 있는 안식일들은 폐지되었으나 도덕법으로 주어진 일주일 단위로 주어지는 안식일은 폐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이 안식일은 모세 율법 이전, 창조 때에 주어진 창조 질서에 속한 규정이라는 점입니다(창 2:3).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시간 질서는 7일 주기로 만드셨고 제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날이 다 똑같다고 할 수 없도록 한 날을 복 주셨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21장 7항)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적극적, 도덕적, 영구적 명령을 내려 7일로 구성된 일주일 중 하루를 특별히 안식일로 지정하셨고 그날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지키게 하셨다. 그날은 창세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는 일주일의 첫날로 바뀌었는데, 성경에서는 주의 날이라고 하며, 기독교의 안식일로 세상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토요일이었는데, 왜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가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진술하듯이, 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심으로써, 새 창조인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육 일 창조 사역을 완성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부활로써 구속이라는 새 창조를 완성하신 그 날을 기념하여 신약의 교회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입니다.


2. 괴로움의 날인가, 즐거움의 날인가? (출 31:12-17; 막 2:27)
여기서 안식일 딜레마가 시작합니다. 주일이 기독교의 안식일, 안식의 날이라면, 이 날은 분명히 여느 날과 같지 않으며 같을 수도 없는 구별된 날입니다. 게다가 안식일 계명은 십계명에서도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명령입니다. 지난 주에 언급한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 즉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항이고,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라고 할 만큼 이 계명은 중요했습니다(출 31:12-17).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해도 되고 하면 안 되는 조항들을 수두룩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결국 많은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짐과 어려운 멍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무거운 짐과 어려운 멍에를 메우려는 것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까? 아니지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좋은 규정이 짐과 멍에가 된 것입니까? 지금도 많은 사람이 안식일을 말할 때,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중학교 시절 율법주의적 가르침 아래 있었을 때, 힘들다고 느꼈습니다. 다만, 회심한 이후에 주일에 즐거움으로 누리기 시작했던 것은 큰 변화였습니다.
온늘 본문을 보십시오. 안식일 규정을 언급하는 이 본문을 지배하는 개념은 즐거움입니다. 13절에 ‘즐거운 날이라’ 그리고 14절에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나옵니다. 안식일이 즐거운 날이 되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으려면, 놀랍게도 ‘네 발’을 금하고 ‘네 오락’을 구하지 않으며, ‘사사로운 말’을 금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안식일 지키기를 포기하거나 타협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날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 대로 즐거움의 날이 되지 못합니다. 게다가 교회의 지도자들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요구하거나 강요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억압의 날로 여겨 지기도 합니다.
안식일의 딜레마가 여기 있습니다. 왜 즐거움의 날이 괴로움의 날이 된 것입니까? ‘즐거움의 날을 지켜라’라고 명령을 주시니까, 그리고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는다고 하시니까, 마치 억지로 즐거워하거나 즐거운 시늉이라고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즐거움을 주시려고 사귐의 기쁨을 주시려고 안식일을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로 때문에 안식을 취할 필요가 없으셨음에도 창조의 육일 이후 칠일 째 안식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막 2:27). 사람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태복목사는 아담이 창조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아담아 오늘은 내가 공식적으로 정한 휴일이다. 나는 오늘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너와 시간을 보내며 특별한 교제를 갖고 네게 복을 줄 것이다. 나와 함께 쉬자. 내 안에서 쉬자.” 당연히 이게 웬 복인가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날 아담과 하와는 원 없이 즐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순전한 즐거움은 범죄하기 전까지 만이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 동산에 쫓아내셨고, 노동은 고생이 되었습니다. “노동은 복이고 고생은 인간의 불행이다.” 아브라함 혜셀의 말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노동이 고생이 되자, 인간의 죄성은 더욱 더 안식일을 고생에 대한 보상심리로 여기도록 작동했을 것입니다. “나는 쉬어야 해, 나는 하고 싶은 걸 원 없이 할 테니 아무도 나를 말리지 마. 이 날은 나의 권리야!”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안식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을 대체할 ‘자기 오락’의 대상을 찾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문에서 말씀한 것은, ‘네 오락’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향하지 말라는 것이니, 죄인에게 이것이 달콤하게 들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갈등의 날이 됩니다. 괴로움의 날이 될 것인가, 즐거움의 날이 될 것인가? 내 오락의 날이 될 것인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인가?


3. 안식일 없이 안식 없다. (시 16:1-3)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삼위 안에서 누리시는 넘치는 기쁨을 주시려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특별히 하루를 온전히 쉬면서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제정하신 날입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서의 안식일은 유효합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세상이 경험하는 안식일은 고생을 멈추고 자기 오락을 추구하는 날로 전락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오락은 결코 인간에게 마음의 안식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일평생 고생과 오락 사이를 오가며 피로가 쌓여가는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본래 누려야 하는 기쁨, 삼위 하나님의 기쁨은 눈곱 만치도 경험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안식 다운 안식 없는 삶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안식 없는 인생들에게 참 안식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안식 없는 불행한 삶의 원인인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믿는 성도들은 본래 안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율법주의의 주일성수 계명으로 힘들었던 제가 그날을 즐거움의 날로 경험하기 시작한 것은 회심 사건이었습니다. 예배 드리는 것이 기쁨과 감격이 되었고, 종일 성도들과 지내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저녁예배를 마치고는 친구와 함께, 집과는 반대 방향인 여의도로 향하는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며 기쁨에 겨워 찬송을 부르던 기억도 납니다. 즐거움이 강요와 의무를 이긴 것입니다. “오늘 종일 교회에서 보냈으니, 내일 피곤해서 어떻게 월요일을 시작하나?”하는 걱정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즐거웠으니까요! 주일에 열리는 축구경기가 있어도 잠깐 유혹이 되긴 했겠지만, 제 마음과 몸은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윗의 고백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편 16:1–3).”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가지는 본능적 감각입니다. 하나님이 7일 주기로 정하신 창조의 시간 질서 가운데 안식일을 정하시고(창 2:3) 엿새 동안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제칠일에 안식하셨듯이, 우리도 모든 노동을 그치고 안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0:9-11). 애굽에서 종 되었던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매주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야말로 안식 없는 세상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이 없다면, 거기에는 안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대로 안식일이 지켜질 때, 안식을 누림도 당연합니다. 나아가서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우리의 삶의 질과 우리의 신앙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당연합니다.


4. 안식일 지키기 (신 18:20; 시 118:24)
본문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인 지시를 합니다. 첫째는 오락을 추구하는 쪽으로 발걸음을 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성일’이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그러니 오락을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라는 겁니다. 오락이 나쁘다거나 죄악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취미생활이나 오락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합당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안식일인 주일은 주님의 날(The Lord’s day), 여호와의 성일입니다. 주님이 이 날에 금하시는 것은 ‘네 길’과 ‘네 오락’입니다. 자신의 날로 삼지 말라는 말씀이고 하나님 없는 자기만의 일정을 계획하지 말라는 것이며, 하나님과 상관 없는 즐거움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안식의 날에 자기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 즉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가 되었던 삼위 하나님의 사귐 안에서 충만하게 누리셨던 하나님의 기쁨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또 하나 금하신 것은 ‘사사로운 말’입니다. 이 의미는 단순히 농담이나 유머를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사로운 말’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말을 가리킵니다. 동일한 표현이 신명기 18:20에만 한 번 나옵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신명기 18:20).”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지 않은 말을 제 마음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하나님은 금하셨습니다. 언제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만, 안식일에 하나님은 이것을 금하셨습니다.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이지만, 특히 설교하는 목사들이 유념해야 할 말씀입니다.
안식일의 핵심은 일상의 노동을 그치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입니다. 그날은 즐거움의 날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편 118:24).” 하나님의 이 의도를 놓치고 많은 규정들을 만들어서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어 누릴 수 없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즐거움의 날로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4b)” 땅의 높은 곳까지 경작지가 되게 해 주셔서 먹을 것이 풍성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될 때,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경작하던 땅을 상속해서 그 소출을 먹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일지라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5. 안식일을 맞이하라. 신부처럼, 여왕처럼!
안식일은 구약 백성에게나 지금 우리에게나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안식일을 맞이하고 보내는가는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테스트입니다. 결국 우리의 일평생 안식일을 어떻게 즐거이 보내는가가 우리의 믿음을 서고 넘어지게 할 것입니다. 안식일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가지고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하는 분들은 자신에게 즐거움이 있는지,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지 마음을 살펴야 하고, 구약 백성들에게 성전이 우상이 될 수 있었듯이 자신에게 안식일이 우상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또 안식일을 그저 예배만 드리면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원하는 것을 하면서 보내면 된다고 여기는 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안에서 얻어야 할 즐거움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을 버리고 있으며, 자기의 오락을 우상으로 삼고 있음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여기서 제가 조금 구체적인 적용을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안식하다’라는 히브리 말은 ‘그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진정한 안식은 그침, 멈춤이 없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멈추는 것은 기본 전제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이 그리 한가하지 않지요. 월요일에 해야 할 일을 토요일에 다 마치지 못하게 되는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학자 마르바 던은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선택을 이렇게 조언합니다. “이럴 경우 우리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그 일을 끝내기 위해 토요일 늦게까지 일하거나, 월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거나, 안식일의 시간을 얼마간 사용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온전한 하루를 쉽과 예배에만 쓰는 것을 매우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필요에 못 이겨 (필요는 정말 은혜의 반대이다!) 나의 쉼과 기쁨의 날을 망치기보다는 거꺼이 첫째나 둘째를 선택할 것이다.” 또 그녀는 예배 외에 안식일의 활동에 관해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주일에는 숲속으로 하이킹을 가거나(이럴 때는 언제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보며 그분을 찬양하게 된다.) 친구들과 함께 산책을 한다(이때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대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우리는 안식일인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는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의 설계 비밀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아브라함 헤셀의 말처럼,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에 조율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여왕 혹은 신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토요일 저녁에, 마치 여왕이 시간이 되면 방문을 하시는 것처럼, 혹은 기다리던 나의 신부가 그 시간이 되면 찾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기고,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멈추고 그 일이 다 끝나서 마치 할 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안식일, 신부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현재 상황에서 온전함을 경험하고 있지 못할지라도 안식일 그날 만큼은 믿음으로 온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일을 완성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안식일의 신부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을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경험하고 고백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참된 안식, 즐거운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의 말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생기 넘치는 신자 중에 주일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보내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