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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9). 하나님의 약속이 하는 일

시편 119:145-152, 이사야 62:6-7, 여호수아 1:7-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3-08

말씀내용
본문은 시편 119편의 19번째 연(145-152절)입니다. 히브리어 19번째 알파벳인 코프(ק)로 시작하는 8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145-146절은 ‘부르짖는다’는 말이 반복되는데, 이 단어가 ‘코프’로 시작하는 ‘코라(קרא)’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모든 상황에 있는 신자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실제적인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돈은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실제적 역할을 하는지 묻는다면 여러분은 비교적 쉽게 대답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질문은 돈이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쓸모가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쓸모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시인은 본문에서 자신을 추격하려고 조여오는 악인들을 말합니다(150). 데렉 키드너는 이 본문에서 그런 위협은 감추어지지 않지만, 그 위협은 보다 더 큰 사실에 의해 멀리서 조망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를 위협하는 현실을 더 멀리서 더 큰 사실에 비추어 보게 합니다. 그 사실은 만유 보다 크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가까이 계시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 현실을 어떻게 확인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 현실을 확인하게 하고 신자를 더 깊은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 기도 (145-148; 사 62:6-7)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일은 신자를 기도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경험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기도로 우리를 인도합니까? 먼저 145-146절을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145–146).” 두 번, 시인은 부르짖는다고 말합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시인이 처한 상황의 절박함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기도할 때, 언제나 부르짖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듯 조곤조곤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일상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절에서 볼 수 있는, 시인이 부르짖는 이유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교훈들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응답해주시면 순종하겠다는 조건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순종할 힘을 공급하는 원천이 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교훈들을 지킬 수 없어서 슬퍼합니다. 이것이 시인의 슬픔이고, 시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유입니다. 가짜 신앙은 결코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명목상의 신자의 입술에서 이런 기도는 나오지 않습니다. 거짓 신자에게서 나오는 대표적인 간구는 우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으니, 저에게 이것을 주시옵소서”하는 기도이거나 “저는 이 상황 때문에 불행해서 더 살 수 없사오니 제게서 이 상황을 끝내 주시옵소서”하는 간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저는 주를 믿습니다. 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길로 행하기를 소원합니다. 주께서 제게 응답하셔서 구원해 주셔야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달라고 부르짖는 이유가 선명합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이 시편에는 시종일관 이 은혜의 음악이 연주되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진짜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의 교훈들에 순종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147-148절에서 우리는 시인의 부르짖음이 더 간절해짐을 느낍니다.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었고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시인의 기도는 쉬지 않는 기도이고 밤을 지새우는 기도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이사야 62:6–7).”
그들은 왜 이렇게 쉬지 않고 기도합니까? 성도와 교회의 영광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만일 우리가 수고의 떡을 먹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이렇게 한다고 하면, 그 삶이 절박하구나 라고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주의 말씀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절박한 기도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시인이 날이 밝기 전까지 부르짖으며 바란 것은 주의 말씀이었고(147) 그가 새벽녘에 눈을 뜬 것은 주의 말씀을 읊조리기 위해서 였습니다(148). 시인은 자기 욕망이나 느낌을 종교적으로 포장하여 하나님의 음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음성이며 뜻이라고 포장하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런 잘못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에 정초되어 있지 않으면 이런 잘못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점에서 시인의 기도는 ‘말씀과 기도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막연한 기대, 간절한 바람과 참된 믿음을 구분해주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구하는 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하지만, 내 욕망이나 내 바람을 간절히 절박하게 구하고 나서, 내가 간절하게 구했으니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거짓 확신이며 바람이고 기대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이점에서 시인은 자신의 부르짖는 기도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에 근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고(147)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새벽녘에 눈을 떴습니다(148).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이 자기의 기도를 이끌고 가야 함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가지 않을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더 큰 재앙은 그대로 이루어졌을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욕망을 섞으려는 태도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파산하지 않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 위에 정초하는 믿음이고 우리는 그렇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A. 말씀 묵상 (수 1:7-8)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지 않는 한, 결코 기도한다고 해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타고난 지각으로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우리를 도우시는지, 가까이 오시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야경이 깊기 전에 깨어 그를 굳게 할 수 있기까지 묵상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본문 147-148절을 이렇게 풀어 씁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말씀을 바랐으나, 큰 어려움과 기막힌 싸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나약하고 천성적으로 불신하는 경향이 있으며, 게다가 저를 공격하는 많은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의 말씀에 대한 이 지속적인 묵상을 실행했을 때 이 모든 것을 고쳤습니다. 나는 낮에만 묵상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밤에도 그렇게 했나이다."
칼빈은 말씀에 대한 지속적 묵상의 중요성을 말했습니다. 148절에서 시인이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라고 했을 때 의미한 것이 말씀 묵상입니다. 우리는 정말 위급한 때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기도하려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던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로써 주의 말씀과 약속을 우리 마음에 담아두지 못했을 때, 우리는 정작 기도해야 할 때조차 기도가 겉도는 것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해가야 할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여호수아 1:7–8).”
하나님께서 이 중요한 때에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것이 말씀 묵상의 명령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 묵상은 힘든 일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고 보상이 따르는 일입니다.


B. 말씀 듣기
말씀을 묵상하는 것 외에도 평소에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설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우리가 위기의 때에 기도하려고 하지만 어디서부터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또 하나의 이유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부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고 확고히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지나가는 식으로 가볍게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소에 기도하러 와서 한 마디 하고는 넘치게 했다고 여깁니다. 설교를 깊게 듣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고 상상할 것이며, 아니면 세상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 조차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칼빈은 이만큼 말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배당에 한 번 온 것으로 대단하게 여깁니다. 심지어 너무 귀가 열릴까봐 매주 와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들은 한 번은 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자러 옵니다. 그들은 앉아있는 의자나 아니면 이 기둥들에 기대어 듣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설교를 들으러 오는 방식입니다.” 21세기 한국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이 일어났던 16세기 제네바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흥이 임한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섭고도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심령들을 하나님께서 제외시키는 법이 없다는 사실은 위로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입술을 열게 하고야 맙니다.


2. 확신 (149-152; 요 15:19; 16:32; 8:29; 14:18; 히 13:5)
우리는 이어지는 149-152절에서 시인의 확신의 면모를 보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확신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리고 그 확신은 그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확신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기도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확신일 때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확신이겠습니까?
149절에서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을 따라’는 이해가 되지만, ‘주의 규례들을 따라’라고 하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시인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정초하여 기도하는지를 봅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규례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 언약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구약 성도들은 비록 희미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구원의 근거가 바로 오실 언약의 구주인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의지했습니다. 구약 성도의 기도가 그러했다면, 하물며 신약 성도인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더 하나님의 틀림 없는 언약에 근거해야 하고 거기서 얼마나 큰 확신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힘있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근거가 되겠습니까? 이런 확신이 시인의 기도의 저변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목전에서 일어나는 현실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150절입니다.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사오니 그들은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악을 따르는 자들의 압박이 시인을 조여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까이 온 것이 현실입니다. 이 시가 다윗의 시라면,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찾으려고 가까이 오고 있던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악을 따르는 자들은 ‘주의 법에서 먼’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법에서 먼 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 늘 본능적 적개심을 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말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19).”
악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을 조여오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서, 시인에게는 또 하나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있습니다. 15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151).” 그것은 주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장소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개입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대적이 나를 조여오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 안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입니다. 신자는 어둠이 자신을 위협하고 압박할 때, 그래서 어둠에 갇혀버린 느낌이 들 때, 가까이 있는 것은 어둠만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어떻게 이 또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신비 체험으로 치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언약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알게 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님의 가까이 계심을 경험하겠습니까?
우리가 악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까이 계심을 알게 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19세기 영국교회의 현실을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과거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녀들 중에 하나님의 임재 의식(the presence of God)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눈물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주십사하고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들은 기도의 위대한 목적, 곧 하나님을 즐거워함(the enjoyment of God) 없이 기도행위 자체로 너무 쉽게 만족합니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찰스 브리지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입에서 기도가 떠나지 않았으면 여러분의 영혼은 위로가 없는 텅빈 상태일 수 없습니다.” 정녕 그렇습니다!
루터의 동역자였던 필립 멜랑크톤이 그의 개인 편지에서 루터에 대하여 남긴 말이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련으로 괴롭기 그지 없는 시대에 그 사람 같이 특이한 힘으로 부단하게 믿음과 소망을 견지하는 사람을 충분하게 칭찬할 말을 나는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운 부지런히 연구함으로 자기 마음의 정서들을 은혜로 먹이는 일에 진력합니다. 그는 적어도 가장 좋은 시간 두세 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고 하루를 넘기는 일이 없습니다. 한번은 그가 기도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 속에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충만하게 드러나는지요. 얼마나 놀라운 심령과 믿음이 그 기도 속에 드러나 있는지요! 그는 마치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것 같이 그의 간구의 제목들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마치 자기 아버지와 친구에게 말하듯이 소망과 확신이 넘쳐 있었어요. 그는 기도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을 아나이다. 그러므로 저는 아버지의 자녀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실 것을 확신하나이다. 그럴 리 없지만 만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일을 하지 못하시면, 아버지의 대의와 그와 연관된 우리의 싸움은 위험에 처하고 말겠지요. 그 일은 전적으로 아버지 자신의 일이니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섭리로 말미암아 그 일의 한 부분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우리의 보호자시니이다.” 내가 멀찍이서 루터의 이 기도를 듣고 있는데 내 영혼도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았고 사람이 친구처럼 하나님께 아뢰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기도가 그렇게 친밀한 성격을 띄고 있으면서도 장중함과 경외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면서 시편에 나와 있는 여러 하나님의 약속들을 강조하였습니다. 마치 자기의 간구들이 허락될 것을 확신하듯이 말입니다. ”
이것이야말로 다윗이 “내가 주의 말씀을 바랐다”라고 기도하면서 가진 확신을 보여주는 실례가 아닙니까? 또한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다가 오는 십자가 앞에서 이런 확신을 가지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한복음 16:32).” 그러나 이 확신은 절박한 순간, 갑작스럽게 주님에게 찾아온 확신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한복음 8:29).”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이 확신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시인이 바로 이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약속이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8).”고 약속하셨습니다. 히브리서를 보십시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3:5).”
찬송가 447장(“이 세상 끝날까지”)의 가사 3절은 얼마나 이것을 잘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주 나를 돌보시사 내 방패 되시고 / 내 옆에 계신 것을 늘 알게 하소서.
이런 확신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순간, 특별히 절박한 그 위기의 순간에 말입니다.
시인은 끝으로 152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152).” 하나님의 말씀은 반석처럼 든든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세우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세상의 악한 권세가 우리를 어떻게 위협해도, 우리는 그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가까이 계시다는 확신 속에서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생기는 지식과 확신이 아니라, 이미 평소에 그 말씀과 약속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3. 교훈과 적용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공동체와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합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합니까?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려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깊이 있게 들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촉매가 되고, 기도의 불꽃을 우리 영혼 안에 일으키며, 나아가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여기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우리 신앙 생활에서 가장 사각지대에 위치하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또 보이려고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다윗이 가장 영화롭게 보였던 순간은 그가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나 그가 왕의 보좌에 앉아 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순간은 원하고 또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 앞에서 그가 가장 영광스럽게 보인 때는 그가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그가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새 힘을 달라고 반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영혼은 얼마나 아름답고 용기 있고 멋진 모습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려운 시대를 삽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듣고 연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의 기도가 왜 힘과 확신을 잃어버리고 횡설수설하는지 아셨습니까? 시인이 누렸던 그 은혜를 우리가 누리기를 간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