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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은혜 - (4). 미완의 인생을 완성하시는 하나님

시편 119:68a, 디모데후서 4:6-8, 신명기 3:2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1-29

말씀내용
1. 내 인생의 마지막 말 (시 119:68a)
여러분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고 느낄 때, 어떤 말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물론 미리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 것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는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 신앙을 반영할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성경의 많은 고백들 가운데 이 고백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많습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라고 말입니다. 이 고백은 기도응답을 수만 번 받았다고 알려진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가 자기 아내의 장례식에서 전한 말씀의 본문이었습니다. 그는 심한 류마티스를 앓는 아내의 치유를 위해 오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이 기도만큼은 그가 구한대로 응답하지 않으셨고 아내의 생명을 데려가셨습니다. 하지만 조지 뮬러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고 아내를 데려가신 것이 하나님의 최상의 응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아내의 장례식 설교 본문으로 이 구절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떻게 모든 것이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을 베푸신 일들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고백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 그리고 비록 죽음 앞이지만 아직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았으며 그것을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완성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만 가능한 고백인 것입니다.


2. 믿음의 본질은 미완성
인생의 마지막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언제 어떻게 그 시간이 나에게 찾아오더라도 나는 당황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중 다수가 “왜 이렇게 빨리요?”라고 묻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생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믿음은 언제나 연약하고 의심이 다소 섞여 있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신앙이 시간을 통해 점점 더 견고해지기는 하겠지만, 우리의 연약한 믿음은 임종의 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너무 일러요. 저는 아직 마치지 못한 게 있다구요”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반대로, 여전히 바라는 것의 성취를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개 사람에게는 성취와 완성을 향한 의지, 끝마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죽음은 아직 끝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모든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신자의 성화가 죽음과 더불어 완성된다는 가르침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성화는 일생에 우리의 노력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음과 함께 은혜로 성화를 완성해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은 본래 미완성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본질상 바라는 것이기에 미완성은 믿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만일 바라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현실이 되었다면, 거기에 믿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이기에, 미완성은 믿음의 본질입니다.


3. 성경 인물들의 사례
성경은 믿음의 인물들의 삶을 통해 믿음의 본질이 미완성임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세 사람, 그리고 신약에서 한 사람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지요.


A. 아브라함 (히 11:13)
먼저 아브라함입니다. 히브리서 11:13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브리서 11:13).” 본문의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넓게는 이삭과 야곱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죽었을 때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을 주지 않으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들은 그 땅을 소유하고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손을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이 주시고 그 자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약속을 받았을 뿐이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이 마치 자기에게 이미 성취된 것인 양 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B. 모세 (신 3:27)
우리는 모세의 삶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로 등장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고 광야 40년 동안 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광야 생활 막바지에 발생한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모세의 가나안 입성을 불허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더 이상 구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결국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의 99%를 이루었지만 그 완성과 성취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압 비스가 산 정상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하게 하신 일은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명기 3:27).”
모세가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지막에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많은 성경 독자들은 모세의 삶에서 이 대목을 매우 아쉬워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믿음으로 얻게 될 더 나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물리적 장소로서의 가나안 보다 더 나은 성, 하늘에 있는 영원한 성을 그를 위해 예비하셨고 모세를 그곳으로 직접 인도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의 삶은 미완성의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삶을 완성하셨습니다.


C. 다윗 (대상 29:10-19)
다윗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선한 바람을 거절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집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어하는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념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마지막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역대상 29:10–16).”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이보다 아름다운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일로 마음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보면, 자기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에, 자기가 자기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다고 고백하는 다윗은 자기의 왕권, 자기의 부와 재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뭔가를 드린다는 그 마음 조차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림자 같이 있다가 사라지는 인생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어지는 다윗의 고백도 중요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우리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 그 마음을 준비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오며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권면과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준비한 것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라(역대상 29:17–19).”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낌 없이 드렸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주의 백성들도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제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동일한 마음을 주셔서 자신과 백성들이 드린 물질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의 이 고백들은 뭔가를 이루지 못한 사람의 아쉬움 같은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성취하고 이룬 사람처럼 자기 인생에 대하여 만족스러움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삶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만족함으로 인생을 마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만족함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왜 이렇게 빨리 저를 데려가십니까?”하는 아쉬움 섞인 질문도 없습니다. 믿음은 인생을 가장 잘 산 사람처럼, 하나님이 부르실 때 만족함으로 그 부르심에 응할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임종을 앞둔 성도에게 하는 일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삶은 미완성일지라도 만족하는 삶입니다.


D. 바울 (딤후 4:6-8; 롬 15:23-24)
이제 신약의 인물 가운데 바울 사도를 살펴보지요. 그는 자신의 영적 아들이요 제자인 디모데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 4:6–8).”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는 사도는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것처럼,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교회에게 한 말을 보면, 그가 원하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로마서 15:23–24).”
사도는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스페인은 사도가 생각하는 땅끝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완수하기를 원했습니다. 성경은 바울 사도가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로마에서 석방되었다가 다시 마지막으로 투옥되기 전에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자신의 열망을 성취했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사도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사명을 완수했다고 말할 때, 그가 원하고 바라던 모든 것을 성취했고 완성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의 시간이 다가온 것을 아는 바울에게는 여전히 바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사모합니다. 이것이 죽음을 앞둔 성도 안에서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사도의 선교 사역은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때 완수될 것입니다.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바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을 완수한 사람처럼 만족하며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죽음 앞에서 믿음으로 취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4. 완성하시는 하나님 (계 1:8; 22:13; 요 19:30)
우리는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과 바울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누구도 인생의 시간 안에서 완성의 마침표를 찍은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생이 미완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본질도 미완성입니다.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포함하여 어떤 사람의 죽음을 때이른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룬 것이 없으니까, 완성한 것, 성취한 것이 없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인생은 미완입니다. 우리의 몫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우리가 잠깐 쉴 때 하나님은 우리 미완의 인생을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오메가라고 불려질 수 있습니다(계 1:8; 22:13). 하나님은 처음이실 뿐 아니라 마지막이 되십니다.
인류 역사에서 완성의 마침표를 찍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크게 외치고 운명하셨습니다(요 19:30). 죽음의 자리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가 누구입니까? 인간은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생각하면서 J.R.R.톨킨의 단편 [니글의 이파리]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니글(Niggle)은 “깨작거리거나 비능률적으로 일하거나 … 쓸데없이 시시콜콜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여기서는 톨킨 자신을 가리킵니다. 화가 니글에게는 꼭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파리 하나에서 시작해서 나무 한 그루 전체의 이미지, 그리고 그 나무 뒤에 펼쳐진 멋진 세계를 그는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니글은 이 그림을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만큼 큰 캔버스를 준비했습니다. 언젠가 죽기 전에 이 그림만은 꼭 완성하고 싶었던 니글은, 화폭에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진척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니글이 나무 전체 보다 이파리 하나에 너무나 공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니글의 착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니글은 이웃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너무나 자주 붓을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니글은 자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날도 어김없이 한 이웃이 자기 아내가 아프니 비 내리는 차가운 밤거리를 달려 의사를 불러달라고 부탁합니다. 결국 그 부탁을 들어준 니글은 독감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니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립니다. 불쌍한 니글은 엉엉 울며 소리칩니다. “아직 완성하지 못했단 말이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대목입니까?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니글은 하늘나라 기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두 가지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세월을 허송하고 평생 이뤄놓은 것이 없다고 꾸짖는 엄한 공의의 목소리가 하나이고, 또 하나의 목소리는 니글이 한 일을 잘 알고 있으며 그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쪽을 선택했으니 잘 했다고 말하는 자비의 목소리입니다. 그렇게 하늘나라의 가장자리에 거의 이르렀을 때, 니글은 상급처럼 보이는 뭔가를 보고 그곳으로 달려가는데 거기에는 니글이 평생 꿈꾸던 것이 서 있었습니다. 커다란 나무, 그가 그리고 싶었던 상상 속의 그 나무가 완성된 모습으로 서 있는 겁니다. 나무의 배경까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니글은 천천히 팔을 들어 활짝 벌리고 말합니다. “이건 선물이야!”
니글은 고작 이파리 하나를 그리고 죽었고, 니글의 미완성 작품은 사람들의 주목도 별로 끌지 못하고 있었지만, 영원하고 참된 곳에서 니글은 놀랍게 완성된 자신의 나무가 상상의 산물이 아닌 영원히 살아 즐길 수 있는 실재로 자기 앞에 선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톨킨의 단편 『니글의 이파리』의 줄거리입니다. 우리는 뭔가 성취하려고 꿈꾸지만 이룰 힘이 없고 그러다가 인생을 마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잊혀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 영원한 실재가 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불현듯 죽음의 순간이 찾아올 때, 이파리 한 장 그리고 간다는 생각에, “아직 완성하지 못했단 말이예요!”라고 니글처럼 울부짖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믿음으로 행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그 일은 그곳에서 완성된 실재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행한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선한 수고는 아무리 단순하고 사소할지라도 하나하나가 영원무궁한 가치를 가집니다. 이것이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이 보게 될 열매입니다.
지금 의미 없어 보이고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 작은 일들을 믿음으로 행하십시오. “평생 이파리 하나 그렸다”고 말할지라도,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믿음으로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 작은 일 조차 완성하지 못하는 우리들이지만,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성해주시는 ‘진짜 나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미완의 인생은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5.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으로 사는 기쁨 (합 2:4b)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b)”고 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장차 하나님께서 미완처럼 보이는 역사를 완성하실 일,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에서 하나님을 위해 뭔가 대단한 일을 이루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저 이파리 하나 처럼 작은 것에 매달려 깨작거리다가 죽음의 시간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장래에 하나님께서 이 작은 일을 완성하실 은혜를 바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 감격스러울 순간을 종종 생각합니다. 그 믿음으로 저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다고 느낄 때, 제 삶을 완성해주실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을 완성한 것처럼 만족하며 죽음의 강을 건너가기를 원합니다. 죽음의 순간 만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로, 그리고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낙심하지 않고 두려울 것이 없으며 불안하고 초조함으로부터 자유하게 오늘이라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우리 미완의 삶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이 주실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이 여러분의 삶에 만들어내는 기쁨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자리가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라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