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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은혜 - (3). 믿음이 이긴다

로마서 4:18-25, 고린도전서 10:13, 로마서 8:32,3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1-15

말씀내용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힘을 아십니까? 그것을 경험하셨습니까?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믿음의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20세기에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순교한 사람들의 수가 1억에 달한다고 추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세비키 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 연방, 모택동에 의한 중국의 공산화, 그리고 동유럽과 북한의 공산화 과정에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때부터 전쟁의 참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참혹한 죽음과 고문 앞에서 수그러들지 않을만큼 강할 수 있는가? 그런 극단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기독교 신앙은 과연 우리가 인생에서 겪고 살아가는 고난과 역경이라는 상황을 이길 만큼 강한가? 그리고 우리가 정직하게 물어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은 ‘내 믿음도 과연 그런 믿음인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참된 믿음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확신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이것은 장래의 은혜의 요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도 중요합니다.


1.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바라보는 시각 (히 11:6)
먼저 오늘 설교의 두 가지 전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말을 인용하여 소개하겠습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음 세 가지 것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즉,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각,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식, 그리고 내가 거기 도착했을 때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복음은 이 세 가지를 선명하게 말해줍니다. 내가 누구인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 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자녀입니다. 두번째로 신자의 인생의 목적지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인 천국입니다. 세번째로 신자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는 것은, 히브리서 11:6에서 본 대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보장된 축복입니다. 이 세 가지 관점과 인식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기 세 가지 것들 중에서 적어도 두 가지는 장래의 은혜와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다.


2. 필요 사랑과 베푸는 사랑
두번째 전제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짝 다룬 주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이유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다음 논의를 위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무언가가 필요해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삼위로 계시면서 삼위 안에서의 교제를 통해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그 어느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고, 어떤 부족이나 결핍도 없으셨습니다. 다니엘 풀러는 이것을 하나님의 필요 사랑(need love)이 충족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필요로 하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 필요 사랑은 삼위 하나님의 교제 안에서 완벽하게 충족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까? 그것은 두번째 사랑, 바로 베푸는 사랑(benevolent love)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베푸는 사랑은 그저 베풀어 주기 위한 목적 외에 어떤 다른 목적도 없는 사랑입니다. 베푸는 사랑을 받는 대상이 그 사랑에 겨워하고 그 사랑에 만족해한다면, 그로써 베푸는 사랑을 주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에 있어서 기뻐하시는 것은 그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를 통해서 표현된 그의 영광에 대해서 기뻐하시는 것이며 피조물로부터 얻어진 기쁨이 아니다.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기쁨은 그가 절대적이며 독립적인 능력으로 발휘하신 자신의 행위 외에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 자신에게 의존적인 기쁨을 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 전체에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당신의 행위 자체에서 커다란 기쁨을 느끼신다고 말합니다. 그 만큼 하나님은 당신에게 있지 않거나 부족한 무언가를 충족 받으시기 위해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런 어떤 종류의 부족함을 채움 받으시려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즉 필요 사랑을 위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이것은 우리들 인간의 미래 행복에는 암울한 그림자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행복과는 무관한, 혹은 상반되는 목적을 이루셔야 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를 채워드릴 실력이 없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는 가지고 있지 않거나 부족한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소유하고 계시는 것을 나타내는 당신의 기쁨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필요 사랑이 성 삼위 안에서 완전하게 충족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베푸는 사랑의 자유 속에서 창조하셨음을 알고 안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베푸는 사랑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그 사랑을 받고 기뻐하고 행복해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고 기뻐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3.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롬 4:17-25; 창 12:1-4)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칭의의 도리를 설명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그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18).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에 한 땅을 가리켜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1-4).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르기까지(아내 사라는 90세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큰 민족은 커녕 약속하신 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25년의 시간이 흐르고 늙어갈수록 믿음의 위기는 점점 더 깊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이 약하여져서 불신앙으로 행한 사건이었습니다. 25년의 세월 동안 이런 믿음의 부침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에 허락해주심으로써 당신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말함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의 본질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비록 우리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으며, 자신이 거기 도착했을 때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는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는 그 인식과 자각을 송두리채 흔들어버리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앞의 17절에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라고 말합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칠 뻔한 사건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없는 것’은 망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사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하나님입니다. 관건은 우리가 인생의 여정에서 무슨 사건을 만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줄 아느냐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느냐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바울 사도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로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도는 더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100세가 되었고 사라의 나이는 90세가 되었기에 그들은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이 없음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19). 믿음에 역행하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과 상반되는 현실 속에서 도리어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2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21).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다고 함으로써(22),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이런 믿음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정리하면 아브라함이 믿은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이루실 능력이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4.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 믿음의 차이 (롬 4:23-25)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특별한 믿음이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이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참된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본질상 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사도는 23-24절에서 말합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로마서 4:23–24).”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우리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믿음은 아브라함과는 달리, 과거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 강화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는 23-25절에서 신앙고백의 형태로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십자가를 멀리 내다보았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과거에 이미 일어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돌아보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차이만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현재 우리의 믿음에서 미래적 요소를 제거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은 동일한 믿음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멀리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날 구속 사건을 통해 장래의 은혜를 내다보았지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의 근거 위에서 장래의 은혜를 보장받은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브라함 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실 보장된 장래의 은혜를 내다볼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더 나은 확신으로 인도합니다.


5. 믿음과 확신 (고전 10:13; 딤전 1:20; 딤후 4:10; 롬 8:32,37; 5:5; 시 23:1-3,6)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늘 의심과 섞여 있고 종종 삶의 고난 속에서는 흔들림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처음 꺼낸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힘은 어느 정도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죽음과 고난이라는 인간의 한계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일합니까? 아무리 어린 신앙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특정한 인생의 상황을 맞닥드릴 때, 그것을 감당할 만한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은 고린도전서 10:13을 아실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우리의 믿음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상황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감당할 만한 믿음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신 것을 압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배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박해와 핍박이 심할 때 모든 신자가 다 믿음을 지킨 것은 아닙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 그리고 은을 사랑하여 자기 길로 간 데마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딤전 1:20; 딤후 4:10). 성경은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믿음이며 그런 일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어김 없이 일어난다고 말씀합니다. 배교함으로써 믿음을 버리는 사람들은 본래부터 참된 믿음에 이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그런 극한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은 여러분의 믿음은 그런 상황이 올 때 안전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써, 지금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었음을 확신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것보다 우월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장래의 은혜를 믿지 못할 장애물이 더 이상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 그리고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위의 사건에 근거해서 넉넉히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지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7).”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말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어떻게 압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롬 5:5). 죄인이고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그 사건을 알기 때문입니다(롬 8:32). 분명한 근거를 통해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근거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좀 더 나아갑니다. 이것은 죽음과 세금 처럼 우리의 조건과 상관 없이 의례히 찾아오는 장래의 일에 대한 확신이 아닙니다. 이 확신은 현재의 조건에 의해 미래의 확실성이 보장되는 확신입니다. 가령 이를 잘 닦음으로써 미래에 이가 튼튼할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현재의 조건에 의해 미래의 확실성이 보장되는 확신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그 현재의 조건은 장래의 은혜를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1–3).” 이 고백은 현재에 다윗이 누리는 은혜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어디로 이어집니까?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 23:6).” 이것은 장래의 은혜에 대한 고백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신 능력, 그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을 ‘지금’ 맛보고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인물인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면, 하물며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일을 아는 우리는 얼마나 더 장래의 은혜를 확신하고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이런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절망의 상황을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매일 이런 확신에 거함으로써 우리는 불신으로 우리 마음이 강퍅하게 될 모든 상황을 이길 수 있습니다. 장래의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들로 인한 기쁨과 자신감을 경험하는 것은 그 어떤 두려운 경고 보다 더 힘이 있어서 모든 상황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울 선한 동기를 가지게 합니다.


6. 교훈과 적용 (막 12:29-31)
말씀을 맺기 전에 우리는 장래의 은혜를 믿는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필요 사랑은 성 삼위의 교제 속에서 완전하게 충족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려고 베푸는 사랑의 동기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필요 사랑은 베푸는 사랑의 기초입니다. 이제 우리 인간에게 적용해 보지요.
우리에게도 필요 사랑이 있습니다. 채워져야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종종 연애나 결혼으로 필요 사랑을 충족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합니다. 인간의 필요 사랑을 채워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자신의 필요 사랑을 채워주시는 분임을 알게 될 때(이 때 하나님은 온전히 베푸는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 사랑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로소 베푸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주님은 첫째 되는 계명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여기에 필요 사랑과 베푸는 사랑이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인간은 자신의 필요 사랑이 하나님을 통해 채워짐을 경험합니다. 인간이 만족을 누리려면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최고의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때 완전한 필요 사랑의 채워짐을 경험하게 된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베푸는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할 만큼 베푸는 사랑을 조건 없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만족하고 일평생 그리고 영원토록 만족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원하시고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의 만족도 보장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보다 복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복과 은혜를 누리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