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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5). 미움과 사랑 그리고 두려움

시편 119:113-120, 야고보서 1:7-8, 열왕기상 18:2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11-16

말씀내용
 우리는 각 여덟 절로 구성된 22연의 긴 시편인 119편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할 본문은 15연인 113-120절입니다. 15연은 각 절이 히브리 알파벳 싸멕크(ס)로 시작합니다. 14연에서 거룩한 결심을 한 시인이 15연에서는 율법에 대한 신실한 태도를 강조합니다. 결심을 하지만, 인간의 죄성은 두 마음을 품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찰스 브리지스는 15연의 제목을 ‘두 마음을 극복하는 사람의 행로’라고 적절하게 붙였습니다. 이 제목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는 신자를 얼마나 잘 묘사한 말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데 전념하려면, 자신의 악한 성향과 자신 앞에 올 수 있는 온갖 유혹들을 묵상하고 그것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그것이 욕망과 얼마나 얽혀 있는지 압니다.” 이런 인간의 이 마음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예레미야 17:9).”라고 묘사했습니다.


1. 미움과 사랑
신자의 미움과 사랑은 피할 수 없는 마땅한 정서입니다.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는 상반되는 두 정서는 참된 신자의 자연스러운 정서입니다.

A. 두 마음을 품는 자들(113; 왕상 18:21; 롬 7:21,23; 고후 10:5; 고전 7:35; 시 57:7; 아 2:15)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마음은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을 수반합니다. 113-115절은 샌드위치 구조를 보여줍니다. 113절의 ‘두 마음을 품는 자’와 115절의 ‘행악자들’사이에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시인의 고백이 끼어 있습니다(114). 시인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합니다(113). 두 마음은 이중적 마음(double-minded), 나뉘어진 마음(divided mind) 또는 허망하고 무익한(futile) 마음입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여기 단 한 번 나오지만,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묘사한 표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열왕기상 18:21).” 두 마음을 품는 것은 머뭇머뭇하는 태도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이런 상태에서 살아갑니까? 우리는 크게 다릅니까? 이점에서 이 본문은 우리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합니다.
시인이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갈멜산에 모였던 백성들처럼 머뭇머뭇하는 태도를 가진 자들을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두 마음은 신앙의 불확실함이라기 보다 악함 그 자체입니다. 두 마음이 악한 것이기에, 시인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너무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선자들입니다. 참된 성도의 마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한 면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미워하고 다른 한 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크리스토퍼 애쉬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말씀에 따스한 애정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 여러분은 안전하십니까?
두 마음은 죄인의 본성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새로와짐을 받지 못했을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두 마음을 품습니다. 하지만 죄인의 심령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면, 그는 자기 안에 두 법이 싸우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롬 7:21,23). 그리고 자기 안에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고 싶은 갈망이 생깁니다(고후 10:5).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고” 싶은 것은 신자의 당연한 마음입니다(고전 7:35).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싶지만(시 57:7),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관계를 잊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두 마음은 우리 영혼에 영향을 미쳐 하나님과의 교제를 무디어지게 함으로써 신앙을 무너뜨리는 가장 위험한 대적입니다. 아가서에서 말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가 바로 이 두 마음입니다(아 2:15). 두 마음이 깊어지면 신자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사라지게 됩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사탄은 안팎으로 우리 마음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안의 공상과 탐욕을 잘라내기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전념하는 목적을 지향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요소들은 어느 시대 보다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자들이 영적으로 심각하게 무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인이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미워한다고 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두 마음 품는 자들’이 반드시 드러난 악인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나름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미워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관계를 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편에 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 만큼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B. 행악자들 (114-115; 고후 6:14; 마 25:41; 잠 18:10)
115절은 행악자들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두 마음 품는 자들’입니다. 시인은 행악자들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행악자들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들의 평안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즐거이 섬기며 예배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나를 떠날지어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단호함은 어떤 좋은 의도를 구실로도 그들에게 미련을 두는 자기 기만적 자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할 수 없듯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멜 수 없다고 말합니다(고후 6:14).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41).” 그 엄숙한 날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극명한 차이는 영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두 마음을 품고 주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생각과 태도와 행동의 유일한 척도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척도가 된다면, 그 결과는 넘어지는 것 외에 어떤 결과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대인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주로 많은 시간과 깊이 사귀는 사람들은 어떤 부류인가? 설령,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행악자들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더라도, 겸손히 깨어 있는 심령으로 은혜를 구하며 감당해야만 합니다. 115절의 시인의 태도를 견지할 때, 여러분의 주변에는 선한 사람들이 붙게 될 것이고 그들이 주 안에서 여러분과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바로 113절과 115절 사이에서 시인은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114). 이 고백은 자신 안에 두 마음을 품게 하는 원수를 대항할 힘이 없다는 인정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두 마음의 원수를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는 고백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는 말씀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주께 달려가야 합니다.


2. 나를 붙드소서 (116-117; 히 4:16; 딤후 1:12; 사 28:16; 삼상 30:6; 시 73:2, 23-24; 94:18; 63:8; 고전 10:12; 눅 22:31-32; 사 41:10)
15연의 중앙에 위치한 116-117절은 핵심 간구이고, 그 내용은 ‘붙드소서’입니다. 칼빈은 “우리가 우리 연약함을 바로 바라볼 때, 하나님의 손과 그의 능력이 우리를 붙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흔들어 놓기 위해 거의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고 스스로 두 마음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중세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수련자의 준비 기간이 끝나고 수도원에 평생 갈 준비가 되었을 때 수련자가 팔을 벌리고 시편을 낭독하는 입회식이 있었는데, 이때 수련자가 116절을 세 번 낭독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약속대로 나를 붙드소서. 그러면 내가 살겠습니다. 나의 희망이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공동체는 그 가사를 반복한 다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이라고 Gloria Patri를 불렀습니다. 수도사의 헌신은 모든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만이 유지해주실 수 있다고 인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두 마음을 극복하는 삶이 신자의 결심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고 권면한 것입니다.
시인은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116). 우리가 은혜에 붙들려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살아갈수록 우리의 소망은 더욱 확실하고 견고해집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의뢰한 자를 내가 안다”고 했는데, 이것이 신자들이 필요로 하는 확신입니다(딤후 1:12). 신자의 확신의 근거는 자신에게 있지 않고 은혜로 자신을 붙들어 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이점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은 얼마나 복된 위로요 확신을 줍니까?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28:16).”
부하들이 돌로 치려 하는 위급한 상황에 처한 다윗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사무엘상 30:6).” 결코 여러분 자신을 신뢰하는 자리로 가지 마십시오. 신앙 생활의 연조가 오랠수록 그렇게 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세월이 흐를수록 나를 붙드시는 주님의 은혜의 능력을 더욱 신뢰하는 자리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붙들어 살게 하시고”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인데, 이 고백을 일생 견지하십시오.
간구는 117절로 이어지지만, 내용은 똑같이 붙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117).” 우리는 삶에서 “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시 73:2)라고 말해야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시편 94:1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편 63:8).”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편 73:23–24).”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확신입니까?
바울 사도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권면했습니다. 주님은 자신만만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누가복음 22:31–32).” 우리는 주님이 붙들어 주시는 은혜 덕분에 사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악인들에게 둘러싸인 시인은 자기 마음의 연약함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자신도 죄성으로 말미암아 두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할 때 참된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소망이 두려움과 조화를 이룰 때, 복음의 참된 확신이 거기서 흘러나옵니다. 자신만만한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는 법을 배우고, 두려움에 찬 사람은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두려워 말라는 것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께만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3. 마땅한 두려움 (118-120; 욥 4:15; 계 15:4; 히 12:28-29; 4:1)
시인은 이어지는 세 절에서, 신자가 인생을 사는 동안 품어야 할 마땅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그것은 두 마음을 품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는 두려움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심각하게 결여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앞에서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약속을 말했는데, 신자가 품어야 하는 ‘마땅한 두려움’이라니요? 모순적 언사가 아닙니다. “주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그들의 속임수는 허무함이니이다(118).” 시인은 주의 말씀에서 떠나는 것이 어떤 대가를 치루는지 보고 배웠습니다. 주의 말씀에 대한 태도 여하가 만들어내는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그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를 멸시하십니다! 119절에서는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지금 두 마음을 품은 행악자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을 볼 때, 시인은 그들과 섞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압니다. 세상은 그들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존재는 멸시의 대상인 찌꺼기일 뿐입니다. 그들의 두 마음은 결국 허무한 속임수일 뿐이고 그 정체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의 결론은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입니다(119b). 더 간절하게 필사적으로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5연에서 시인의 마지막 고백은 이것입니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120).” 두럽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뒤에 나오는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에서 두려움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앞에 있는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라고 할 때 두려움은 공포와 무서움이라는 뉘앙스가 더 강합니다. 그리고 ‘떨며’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이 단어는 여기 말고 구약성경에서 욥기 4:15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욥기 4:15).” 이것은 말 그대로 털이 주뼛하게 서는 경험으로 단순한 경외함이 아닙니다. 이 두려움은 악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생각했기 때문에 임했습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마땅한 두려움입니다.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확신을 누리지만,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정한 보응을 생각할 때 두려운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은혜를 더욱 은혜답게 누리게 해줍니다. 악인들은 결코 하나님과 그 심판을 두려워 떨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조롱하지요. 두려움은 신자의 특성입니다. 하늘 성도들의 찬송을 들어보십시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요한계시록 15:4).”
이런 두려움은 신자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가지는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서 가지는 두려움이며,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악인들이 받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을 권면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브리서 12:28–29).”성도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은 즉시 순종과 견인의 원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브리서 4:1).”
19세기의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echeyne)은 자신의 개인 신앙 고백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한 사람들이 죄악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 두렵고 떨린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듣거나 보면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 기도를 더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내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모든 죄를 나의 무력함을 깨닫는 교훈으로 삼고 두려워하는 것은 옳은 모습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탁월한 성도로 여겨졌던 사람들의 타락을 볼 때, 이런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브리서 2:3).”
데이비드 웰즈(David F. Wells)의 지적은 얼마나 정확한지요.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떨고 있을 때에만 세상과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이 공허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떨지 않으면 세상 제도가 우리에게 놀랍게 보이게 되고 즐겁게 우리를 삼키게 될 것이다.”


4. 교훈과 적용 (딤후 3:16-17; 약 1:7-8)
여러분은 두 마음을 품고 살지는 않습니까? 믿음으로, 주의 붙드시는 은혜로 두 마음을 극복하며 살고 계십니까? 붙들어 살게 해달라고 간구하십니까? 이 세상에 조금, 저 세상에 조금 마음을 두고 살지 않습니까? 육적인 것에 조금, 영적인 일에 조금 마음을 드리거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십니까?
첫째는 분별입니다. 신자의 마땅한 미움과 사랑, 그리고 두려움은 분별에 따라오는 정서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두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보입니까? 분별하십니까? 앨런 로스는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헌신하고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에 대해 이중적이고 거짓된 사람들의 존재를 현실 속에서 더 잘 인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모든 시대에 분별하지 못함으로 넘어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불경건이란, 거짓 교사와 속이는 자,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분별은 신자의 소중한 덕목입니다. 신자는 무엇이 바른 길인지 분별하고, 그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길로 가도록 자신을 보호하고 붙들어 주심을 압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둘째는 선택과 거부 그리고 미움과 사랑입니다. 바른 길을 선택하고 그릇된 길을 거부하는 것, 참된 경건을 사랑하고 두 마음을 품는 거짓된 경건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미움과 사랑은 두려움과 함께 갑니다. 신자는 두려움 가운데 불경건하고 두 마음을 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자들과 자신을 분리하여, 믿음 안에 사는 자신을 말씀으로 붙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7–8).”
두 마음을 품는 자들에 대한 미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그리고 악인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신자가 가지는 마땅한 정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시인과 같이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116)”라고 간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