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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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1).침묵시킬 수 없는 기독교

사도행전 5:12-42, 사도행전 7:54, 마태복음 5:10-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1-06

말씀내용
1. 사탄의 공격 패턴(행 4-7)
공회의 협박으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공격이 실패하자, 사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 내부에 거짓과 균열을 넣어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사탄의 공격 패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탄은 다시 공회를 통해 교회를 공격합니다. 이번에는 단지 말로만의 협박이 아닌 물리적 가해로써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가말리엘의 말대로,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무너뜨릴 수 없고, 사탄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이 공격이 실패하자 사탄은 6장에서 다시 내부 균열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이후 7장에서는 또 공회를 통해 밖에서 교회를 공격합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일어납니다. 밖에서 그리고 안에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시도는 쉼 없이 일어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공격이 사도행전의 시대에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00년이 넘는 교회 역사에서 사탄은 쉬지 않고 교회를 공격해왔습니다. 이 사실은 교회인 우리를 얼마나 경성하게 하는 말씀입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가 그저 존속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탄의 공격의 핵심은 예수의 증인으로서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벧샬롬교회로 존속하기 위해 있지 않습니다. 예수의 증인으로서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오늘 우리가 존재하며, 사탄은 바로 이 정체성과 사명의 심장부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오늘 설교 제목이 암시하듯 사탄은 결코 기독교를 침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강단에서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고,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거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구합시다.


2.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의 결말 (12-16; 눅 8:43-48)
먼저 12-16절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대해서 보여준 대응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교회에 주신 그 사건의 결과입니다. 먼저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에 의해 많이 일어났고 신자들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였습니다(12). 이것은 4:30의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온 교회는 이 일로 더욱 하나가 되었고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42절에서 ‘모이고’라고 번역된 부분은 헬라어로는 ‘계속 있었다’는 말인데, 그들은 언제나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계속 있었습니다. 모였다는 말보다 더 강한 표현이지요.
이미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온 교회와 예루살렘에 큰 두려움을 임하게 했다는 것을 보았는데(11), 이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신자들과 상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13). 여기서 ‘나머지’는 비신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보이는데, 호기심 등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도 포함하는 말일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그들과 유사한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을 더욱 두렵게 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일로 더 정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칭송하더라’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신자들을 향한 두려움은 교회를 향한 부정적 비난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오히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기록합니다(14).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교회에 거짓을 불어넣어 내부를 분열시키려고 한 사탄의 전략은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이 믿고 ‘나아왔다’고 할 때, ‘나아오다’라는 헬라어는 ‘더해졌다’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고 계심을 부각시키는 표현입니다. 불신과 두려움과 주저함을 극복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자마다 부르시고 부르시는 자들은 주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16절은 더 많은 치유와 축사의 역사가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어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솔로몬 행각으로는 부족했기에, 사람들은 침대와 요 위에 누인 병자들을 데려와 거리에 눕혀 두었고 베드로가 지나가다가 그림자라도 덮이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던 여인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입니다(눅 8:43-48). 이렇게 치유와 축사의 표적은 예루살렘 부근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교회에 거짓과 분열이 가만히 들어오게 함으로써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사탄의 시도에 대한 성령님의 대응이었습니다.


3. 고난 (17-40)
하지만 사탄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안에서 실패한 사탄은 다시 밖에서 공격을 재개합니다. 이것은 공회를 통한 박해인데, 그 정도는 4장에서 본 것보다 더 심해집니다. 본문의 직접 화법은 상황을 더 생생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주의 사자(20), 성전 경찰(23), 무명의 보고자(25), 대제사장(28), 베드로(28-32), 가말리엘(35-39)의 말이 모두 직접 화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A. 체포와 초자연적 풀려남 (17-21a, 23; 4;29)
사탄은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시기심을 십분 사용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하면서 예루살렘 주민들의 모든 관심을 사로잡고 있었으니, 종교당국자들의 눈에 곱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17절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를 언급하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의 종교와 정치를 쥐락펴락 하는 권세가들이었습니다. 특히 사두개파는 천사와 부활과 내세 같은 초자연과 영적 현상들을 믿지 않았기에 사도들에 의해 일어나는 표적이나 기사들이 그들을 거슬리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한 공회의 금령을 범한 것은, 이들에게 그럴듯한 명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만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밤 중에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풀어주며 말합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20).” 이 일은 매우 신비스럽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공회 관리들의 보고에 의하면,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23). 한편 이것은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사도행전 4:29).”라고 구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주의 사자는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 도피하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이른 새벽에 다시 당국자들의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했습니다. 성전은 공회 장소에서 400m 밖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공회원들의 불타오르는 시기와 증오에 기름을 붓는 일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신비한 풀려남의 사건은 비록 그들이 아침에 다시 체포되어 공회 앞에서 서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과 교회의 사명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을 뿐 아니라, 앞으로 일어나게 될 모든 박해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할 뿐 아니라 어떤 권세와 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쳐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체험은 이후 사도들과 교회의 삶에서 매우 소중한 믿음의 증거가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도 이런 소중한 경험을 주십니다. 언제나 하나의 법칙이나 공식처럼 작동하게 하시지는 않으시지만 말입니다.

B. 공회에서의 증거 (21b-32; 신 21:23)
결국 사도들은 다시 붙잡혀 공회에 서게 되었습니다.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성전에 서서 설교하는 사도들을 강제로 체포하지 못했다는 언급이 흥미롭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사도들이 일으키는 예수 운동에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6). 사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확신하는 가운데 체포되어 공회로 왔을 것입니다. 공회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까지 소집한 사실과(21) 대제사장이 직접 심문을 한 것은(27) 이들이 예수 운동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대제사장의 심문은 예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공회의 금령을 왜 어겼는지로 시작합니다(28). 지난 공회에서처럼(4:17), 그들은 ‘이 이름, 이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또 사도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퍼뜨림으로써,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한다고 정죄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답변해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의 답변은 공회원들이 금하고 있는 그것,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설교 자체였습니다(29-32). 아마 베드로가 대표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이 설교의 핵심 단어는 순종이고,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29-30). 공회의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순종할 수 없다. 둘째는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증언한 설교인데, 이 요지도 순종과 연결됩니다(30-32). 즉,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사람(공회)의 말을 순종할 수 없지만, 너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임금과 구주를 십자가에 달아 죽임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대조가 있습니다. 심문을 받는 사도들은 지금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공회원들을 심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한다고 정죄했는데, 사도들은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함으로써 신명기 21:23에 의거하여 하나님이 임금과 구주로 삼으신 예수님을 저주한 자들이 바로 공회원들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말을 맺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정죄의 나쁜 소식에 이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회원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함과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높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오순절의 설교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회개와 죄 사함이라는 선물을 받으라고 공회원들을 권합니다. 우리 안에서 회개가 시작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계속 나아가게 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기에, 회개와 죄사함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증인의 정체성입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을 분명하게 증언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또 다른 증인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님입니다. 순종은 복음을 믿는 순종을 말합니다. 사도들은 결국 공회원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고발합니다. 로이드존스는 사도들의 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지금은 당신들이 남을 심판하지만 곧 당신들 자신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하나님을 대면하려 합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대면하려 합니까? 당신들은 대면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을 율법의 형벌에서 구해 주실 분은 당신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이분뿐입니다. 그는 임금이요 구주요 메시아십니다. 그분만이 율법을 성취하고, 우리의 모든 원수를 정복하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여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 안 에서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공회원들이여, 우리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영혼은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이 복되신 예수밖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를 죽이고 싶으면 죽이십시오. 그래도 그의 이름은 계속될 것이며 그 이름의 권세 또한 지속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의 말이 끝났습니다.

C. 분노하는 공회원들 그리고 가말리엘 (33-39; 7:54)
이어서 누가는 공회원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여기서 ‘크게 노하다’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단 두 번 나오는데, 모두 사도행전에서 설교에 대한 공회원들의 반응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공회원들이 ‘마음에 찔렸’다고 할 때(행 7:54), 이것이 같은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마음에 톱질을 한다는 것인데, 상대를 죽이고 싶을 만큼 격렬한 반응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고, 7장에서는 결국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소방수의 역할로 가말리엘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이고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은 당대 힐렐 학파의 대표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울의 스승이었고(행 22:3), 모든 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었으니, 공회에서도 무시하기 힘든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공회 밖으로 나가게 하고는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의 요지는 지금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예수 운동에 대하여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이라면 자신들이 이 운동을 무너뜨릴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것이고, 만일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면 내버려두어도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 그의 말의 근거입니다. 그는 역사의 사례를 제시합니다. 자칭 메시아 또는 선지자라고 했던 드다라는 인물은, 그의 생전에 400명이나 추종했었지만 결국 그가 죽자 그 운동이 사라지고 말았으며, 이후 갈릴리 출신의 유다라는 인물이 로마제국의 징세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운동 역시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빈틈 없어 보이고 논리 정연한 가말리엘의 말은 세상 지혜의 최선을 보여주는 동시에 세상 지혜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좌절시킬 수 없다는 말과 사람의 일 가운데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것은 없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여기에 세상 지혜의 한계가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판단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예수 운동이, 그리고 사도들이 한 말이 참된 진리인지 거짓된 이단 사설인지, 참말인지 거짓말인지에 대한 판단에 그는 관심이 없습니다. 가말리엘의 말은 세상 지혜는 진리를 판단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세상의 어떤 지혜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진리를 왜곡할 뿐이고,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성령님께서 그 빛으로 우리를 보게 하시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 대목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죽이지 못했습니까? 가말리엘의 말이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아, 다행이다! 가말리엘 같이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 덕분에 사도들이 죽지 않았구나.”입니까? 아닙니다. 누가는 성령의 감동으로,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이끌고 주장하시는 분은 대주재이신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했지만 사도들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데 사용된 사람일 뿐입니다. 모든 상황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대주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교회도 그렇습니다.


4. 고난과 기쁨 (41; 마 5:10-12; 벧전 4:13)
가말리엘의 말을 들은 공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형과 함께,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금령을 선고했습니다.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가죽끈에 금속이나 뼛조각을 붙인 채찍질인 플라겔룸(flagellum)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플라겔룸 채찍질을 당하는 사람은 죽거나 평생 불구가 될 수도 있었지만,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한 후 공회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플라겔룸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점은 41절에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 공회 건물을 떠나는 사도들은 예루살렘 길을 걸어가면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은 메조키스트들이었습니까? 이 배경에는 지난 밤 주의 사자가 그들을 감옥에서 끌어내셨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대주재께서 이 모든 상황을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시고,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 이끌어가고 계시다는 것을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흔들릴 수 없는 이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공회원들에게 예수를 증거하게 했습니다. 공회원들의 살기어린 분노를 본 후, 공회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었을 때에도 그들은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사형선고 밖에 없다고 생각해야 마땅한 그 시간에 말입니다. 그것은 대주재이신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을 보고 계시고 주관하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
후일, 베드로는 박해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4:13).”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고난이 존재하더라도 복음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롬 5:3).


5. 침묵시킬 수 없는 기독교 (42)
오늘 말씀에서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결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42절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은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두번째로 공회의 위협을 받고 채찍질까지 당했지만, 교회는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헬라어 시제가 미완료과거형인데, 변함 없이 계속해서 했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 최고의 권위인 산헤드린 공회를 통한 사탄의 공격은 다시 실패했고, 사도들과 교회의 복음 전파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어떤 사탄의 공격에 의해서도 침묵 당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침묵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들이 침묵하지 않았고, 온갖 위협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기뻐하면서 복음을 전했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강단에서 복음은 계속 선포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과 삶을 통해서도 복음은 세상을 향해 계속 선포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파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복음은 계속 선포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기독교를 침묵시킬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