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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3). 성경을 먹어 치우는 그리스도인

시편 119:97-104, 베드로전서 2:2-3, 야고보서 1:2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10-19

말씀내용
시편 119편의 열 세번째 연은 히브리 알파벳 멤(ם)으로 시작하는 여덟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앞 12연에서 세계가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 있다고 말한 시인은 13연에서 바로 그 말씀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라는 사실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13연에는 간구의 기도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시인의 고백만이 있습니다. 95절에서 시인은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결과가 어떻게 자기 삶에서 나타났는지 말합니다. 그것은 지혜와(98) 통찰과(99) 명철(100)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하늘의 지혜’라는 제목에 담았습니다. 하늘의 지혜라는 말은 이 땅을 살아가는 지혜이지만 하늘에서 주어진 지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그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본문은 처음 네 절(97-100)에서 말씀을 통해서 얻는 지혜를 말하고, 뒤의 네 절(101-104)에서는 그 지혜가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 성경을 먹어 치우는 그리스도인 (97; 고후 3:15-18)
97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 119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표현이 11번 나오고(47,48,97,113,119,127,140,159,163,165,167), 한 번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나옵니다(132).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려지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표현도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119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표현들은 하나님 자신으로 읽어도 크게 의미가 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그 말씀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저는 시편 119편 강해 시리즈의 제목, [내가 사모하는 말씀]을 가져왔습니다.
시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말씀, 주의 법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고 말합니다. ‘종일’이라는 말은 말씀에 대한 시인의 사랑을 얼마나 강조하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연인을 종일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중요한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인격과 말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불을 붙여 주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하는 주의 말씀을 종일 읊조립니다. 묵상하고 연구한다는 의미입니다. 핵심은 그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거듭난 성도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본능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3장에서 수건이 덮여 있어서 영적 분별력과 영적 즐거움을 막고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는데, 그들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들을 옥죄는 의무들의 요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수건이 벗어지면, 즉 거듭나면 사람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얼굴의 영광을 봄으로써 즐거움과 자유함 그리고 내적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고후 3:15-18).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것은, 주의 법을 사랑하고 거룩하게 묵상하는 일은 우리의 인격과 성품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성경을 먹어 치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마치 좀약을 넣지 않은 옷장에서 좀벌레가 옷을 먹어 치우는 것처럼 성경말씀에 게걸스럽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좀 벌레처럼 성경말씀을 먹어 치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는 하늘의 지혜를 얻어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로 그 지혜로 창조되었고(잠 8:22-31; 시 104:24) 그 지혜로 굳게 서 있기 때문에(89-90), 그 지혜를 얻는 사람은 이 세상의 도덕적, 영적 질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한 구절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매일 그리고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묵상하는가? 그 말씀이 기쁨이 되는가? 그 말씀으로 인해 주님을 향한 사랑에 불이 지펴지는 경험을 하는가? 그 말씀이 삶의 길을 안내하는 것을 경험하는가? 아마 이런 것들이 시인이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이유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대한 시인의 체험과 고백을 이렇게 기록하게 하심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은혜의 경험으로 우리를 초대하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성경을 먹어 치우는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시인은 성경을 먹어 치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결과를 보여줍니다.


2. 말씀이 주는 하늘의 지혜 (98-100)


A. 원수보다 나은 지혜 (98; 마 13:54; 11:25; 엡 6:11; 마 26:41; 6:13)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먹어 치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축복된 결과 중 첫번째는 원수 보다는 나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98절입니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98).”
예수님께서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에 놀라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마 13:54).”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지혜를 얻으셨습니다. 유대 관원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지혜로 예수님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하늘에서 얻은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혜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아니라 겸손한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태복음 11:25).”
원수는 물론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지만, 성도에게 사탄 보다 더한 원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탄은 간교한 영물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에베소서 6:11).”고 권면했습니다.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려면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원수 보다 나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고(마 26:41; 막 14:38; 눅 22:4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6:13).
너무나 많은 경우, 지혜가 없어서 넘어지고 시험에 들곤 합니다. 우리를 깨어 기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잠자는 우리의 영혼을 깨워 각성하게 할 뿐 아니라, 원수 보다 지혜롭게 하여 시험과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줍니다. 말씀을 먹어 치우는 사람은 원수보다 지혜롭습니다.


B. 스승 보다 나은 명철함 (99; 행 4:13)
둘째로 말씀을 먹어 치우는 사람은 스승 보다 나은 명철함을 얻습니다. 99절입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99).”
명철함은 큰 의미에서는 지혜와 대동소이하지만, 특별히 통찰,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치우는 것을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라고 표현하지요. ‘늘’이라는 시간 부사도 주의하십시오. 때때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린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읊조린다’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주의 말씀이 늘 자신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보통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묵상과 구별됩니다. 성경의 묵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고, 그것은 마음의 생각을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고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채워 넣는 것입니다. 묵상에 대한 제임스 패커의 설명은 기독교의 묵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묵상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 방식, 목적과 약속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며 곰곰이 살펴보고 적용하는 활동이다. 묵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임재 아래 의식적으로 행하는 경건한 사고 활동이다. 묵상의 목적은 하나님에 관한 자신의 정신적, 영적 시각을 밝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완전하고 합당한 영향을 주도록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십시오. 시인은 늘 주의 증거들을 늘 묵상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어찌 모든 스승 보다 나은 명철함이 그의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의 인격과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는 것을 존 번연 보다 더 잘 보여준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존 번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흠정역으로만 연구했습니다. 그는 영혼이 흠뻑 빠져들 때까지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아름다운 시로 충만합니다. 산문체 중에 가장 감미로운 [천로역정]을 읽을 때, ‘이 사람은 정말 살아있는 성경이네!’라고 우리가 말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어디든 그를 찔러보십시오. 성경의 피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성경의 정수가 그에게서 흘러나옵니다. 그는 성경본문을 인용하지 않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온통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문 없는 범인(행 4:13)’,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땜장이였던 존 번연이 350년 이상 꾸준히 읽혀지는 베스트셀러의 작가이고 그 외에도 60 여권을 저술한 사람인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말씀도 동일합니다.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 똑똑한 공회원들, 이스라엘의 선생들 앞에서 그 모든 스승 보다 나은 명철함으로 담대하고 조리 있게 복음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서 주신 지혜 때문이었습니다.


C. 노인 보다 나은 분별력 (100; 약 1:22; 수 1:8; 단 1:8,17,20; 요 7:17)
세번째로 주의 말씀을 먹어 치우는 사람이 얻게 될 결과는 노인 보다 나은 명철함입니다. 100절입니다.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100).” 여기서 명철은 분별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100절에서 특별히 강조된 것은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음의 대상만이 아니라, 행함의 대상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여호수아 1:8).” 우리는 또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삶에서도 이것을 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하고 그렇게 행했을 때(단 1:8),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다니엘 1:17,20).”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행함으로써 주어집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한복음 7:17).”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행할 때, 그는 인생을 살아본 노인들이 가지는 분별력을 넘어서는 분별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어지는 네 절(101-104)에서 볼 수 있습니다.


3. 말씀 묵상이 주는 변화 (101-104; 시 19:10; 벧전 2:2-3)
100절을 기점으로, 초점은 말씀 묵상에서 말씀의 순종, 실천으로 옮겨갑니다. 어떻게 하면 악한 길로 가지 않고 악한 인생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처음부터 악하게 살려고 작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자기를 지킬 힘이 없어서 무너지고 넘어지다 보면 소위 악인이 되기도 합니다. 실력이 없는 것이지요. 101절을 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101).” 제임스 보이스는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자신의 길을 순결하게 유지하는 많은 가치 있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순결한 길, 즉 올바른 길은 죄악된 길의 반대이며, 죄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주의 말씀만이 우리를 악한 길로 행하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이 기능과 관련하여 유명한 경구가 있습니다. “이 책이 우리를 죄에서 지켜주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이 책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오직 두 길 가운데 하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하늘의 지혜가 주는 실제적 결과는 영리한 처세가 아니라 경건함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지혜는 사변적이거나 지적 유희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지혜는 실천적이고 윤리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신앙 감정(affection)은 주의 말씀을 통해서 더 형성되고 강화되고, 주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열망을 더 깊이 가지게 되면서 악한 길로 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치우는 성도들은 그가 사회의 어느 영역에서 살아가며 일을 하든지 그는 그 사회의 선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모범 시민으로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지혜는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킵니다.
102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02).” 여기서 의도적으로 시인은 ‘주께서’ 가르치셨다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행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르치시므로 우리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103절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 여기서 시인은 자기에게 새롭게 생긴 후천적 미각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꿀 보다 달게 맛보는 미각은 전적으로 후천적인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겨자를 대하는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곤 합니다. 먹으면 바로 뱉어냅니다. 그러나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겨자의 맛을 알게 되고 그것을 점점 더 좋아하게도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9:10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편 19:10).”
여러분은 이 후천적 맛을 경험했습니까?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 맛을 알았었는데 지금은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건강의 상태가 나빠지면 입맛이 사라질 수 있듯이, 영적 건강함도 영적 입맛과 함께 갑니다. 영적 미각이 약해지면, 내게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베드로전서 2:2–3).”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꿀보다 달게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인을 포함하는 구약의 성도들이 정죄하는 율법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꿀보다 달게 느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들은 그 말씀이 문자 조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행복을 위하여 마음판에 새겨준 말씀이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언약의 말씀, 약속의 말씀 인줄 알았기에 그 믿음으로 말씀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영적 미각은 우리의 영적 건강의 바로미터입니다.
끝으로 104절입니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104).” 명철은 감정에도 현저한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꿀 보다 단 것을 경험하는 사람의 마음은 곧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되고 그 사랑에 불이 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치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악과 모든 거짓을 미워하는 감정과 그것을 멀리하는 의지가 발동합니다.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신앙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은 어느 정도입니까? 성경에 대한 여러분의 경험은 어떻습니까? 성경이 지루하고 그다지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런 마음의 상태라면 여러분은 죄와 거짓과 악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지적 만족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마음이 녹아져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부터 주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발동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는 원수 보다 지혜롭고, 모든 스승 보다 명철하며 노인 보다 명철한 하나님의 사람, 경건한 어른으로 세워져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당장 하나님의 말씀으로 달려나오셔야 합니다. 다시 그 말씀이 내 마음과 생각과 걸음과 삶을 지배하도록, 다시 꿀 보다 단 그 말씀의 맛을 맛보기를 원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마음에 불을 붙여 주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고 구하십시오. 그 말씀을 먹어 치우는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지금 즉시 말입니다.


4. 교훈과 적용 (딤후 3:15-17)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중단 없이 행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토록 매일 밥을 먹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매일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순종하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고, 모든 스승보다 명철하게 하며, 노인 보다 분별력 있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 말씀이 모든 악과 거짓으로 행하지 않도록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먹으면 먹을수록, 그 말씀으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여러분은 이 시인이 ‘꿀보다 더 다나이다’라고 한 고백을 여러분의 고백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래리 크랩은 『하나님의 러브레터』라는 책에서, 성경 66권 모두가 자기를 향해서 쓰신 하나님의 러브레터라고 이해했습니다. 성경은 그에게 지겹지 않고 마음을 들뜨게 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에 불을 지펴주는 러브레터였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성경을 그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주는 바울 사도의 확신 가득한 권면을 여러분도 들으십시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15–17).”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성경 보다 더 좋은 양약은 없습니다. 금생과 내생에서 말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성경을 먹어 치우는 사람들이 되도록 양육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성경을 먹어 치우는 그리스도인으로 성경이 약속한 모든 은택을, 하늘의 지혜를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