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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3). 새 시대의 표적

사도행전 2:14-36, 요엘 2:28-32, 시편 16:8-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9-04

말씀내용
오늘은 설교를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오순절 신약 교회 탄생의 날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모인 대중을 향해서 전한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드러낸 최고의 복음 설교였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 본문에 근거한 설교였습니다. 모호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명쾌한 설교였습니다. 설교의 결실도 대단했습니다. 41절에서 보듯이, 그날 설교를 들은 3천명이 믿고 세례를 받고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오순절 아침에 일어난 기이한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소동했고 놀랐으며 당황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시각적 현상 외에도, 이 갈릴리 사람들이 각 나라와 백성의 언어로 말을 하는 기이한 현상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현상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그 필요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는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이것은 술취함의 현상이 아니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15). 아침 9시(제 삼시)인데 무슨 술취함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베드로는 불과 7주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십자가 처형 사건으로 청중들을 인도하여, 거기서 처형되신 나사렛 예수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이며 온 세상의 주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이자,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을 천명하는 설교였습니다. 대럴 벅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마지막 시기의 표징이며, 주의 날에 다가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지위가 회복된 것 즉 십자가형으로 죽었던 그가 이제 하나님 옆에 앉아 주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중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임을 선포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본문 중심의 설교 (욜 2:28-32; 시 16:8-11; 110:1)
1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도 그랬지만(행 1:16-22), 이 설교도 철저하게 구약 본문에 근거한 설교였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세 본문을 사용합니다. 첫째로 17-21절에서 요엘 2:28-32을 인용하면서, 요엘 선지자가 주의 날 이전에 모든 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질 것을 예언한 말씀이 오늘 성취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25-28절(29-32절은 해석과 적용)에서는 시편 16:8-11을 인용하면서, 이 시편은 다윗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합니다. 세번째로는 34-35절에서 시편 110:1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승천(높아지심)과 왕적 통치를 말씀합니다.
이렇게 구약의 세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베드로는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새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성경 본문에 근거한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의 근거, 새 시대의 표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2. 새 시대의 표적들
A. 성령이 오셨다 (17-21; 욜 2:28-32; 렘 31:34; 요일 2:20,27; 눅 23:44)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리는 첫째 표적은 성령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요엘 2:28-32을 인용하는데(17-21절) 성령의 감동 아래, 의도적으로 요엘의 본문을 변형시켜서 인용합니다. 베드로는 요엘 2:28에서 ‘그 후에’라고 한 것을 ‘말세에’라고 바꿈으로써, 요엘이 예언했던 ‘그 후’가 바로 지금, 오늘이라고 선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말세’라는 말은 예수님의 오심으로(사역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시작되었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역사의 마지막 기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말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자녀들, 젊은이들, 늙은이들, 남종과 여종들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성령님께서 백성들에게 임하셨지만, 특별한 사람들에게 제한적이었고 부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도록,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육체에게,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차고 넘치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새 시대, 새 언약의 우월성입니다.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라는 말씀은 특별한 영적 지식의 은사가 주어질 것을 말합니다. 환상과 꿈은 하나님께서 구약 선지자들에게 초자연적 계시를 전달하시는 일반적 수단들입니다. 예언과 환상과 꿈, 모두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식이 주어질 것을 암시합니다(렘 31:34).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1서 2:20,27).”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셔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교회에 주신 목사와 교사의 직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에서 덧붙여지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령이 부어지는 사건은 하늘과 땅의 기사와 징조를 동반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19–20).” 여기서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라는 말은 어느 때, 어느 시기를 가리킬까요? 이 시기는 초림이나 재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내신 때부터 그 나라가 완성되는 날까지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입니다. 복음이 최초로 선포된 때로부터 마지막 부활의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7주 쯤 전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대낮에 해가 어두워지는 사건을 경험했었습니다(눅 23:44). 19절에서는 ‘피와 불과 연기’가 땅의 징조라고 말하는데, 이들은 모두 새 시대를 끝내는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입니다. 그래서 대럴 벅은 “피, 불, 연기, 어두워진 해, 피가 된 달이 나란히 놓인 것은 만물이 대변동과 심판 속에서 있음을 보여준다”고 정리합니다.
그렇다면 이 무시무시한 심판의 징조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21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요엘 선지자는 ‘주의 이름’이라고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켰는데,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주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가공할 우주적 심판이 언제 닥치더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를 믿는 믿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B.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 (22-36; 시 16:8-11; 110:1)
새 시대의 두번째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2절은 먼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주이심을 증언하셨다고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역사적 인물이심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사용된 것입니다. 7주 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에서 볼 수 있었던 바로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행하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통해서 그가 주이심을 증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큰 권능들과 경이로운 일들(기사, wonders)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표적들(signs)이었습니다.
23-24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연히, 어쩌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서 처형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씀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그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법 없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유대인이 율법이 없는 이방인을 가리켜 표현입니다(롬 2:12; 고전 9:21; 눅 22:37). 유대인들이 로마 총독과 로마 군인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지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인간의 최고법정에서 행한 판결이 뒤집힌 것입니다. 24절에 ‘사망의 고통’에서 고통은 출산의 고통인 산통을 의미합니다. 마치 임신한 여자가 태아를 자신의 몸에 계속 둘 수 없는 것 처럼, 죽음의 심연이 더 이상 구속자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고 주님이시기에, 그의 부활은 필연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다시 이것을 구약성경의 예언으로 입증합니다. 시편 16:8-11을 인용한 것이 25-28절입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25–28).”
베드로가 이 시편을 인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죽음의 영역에 계속 남아 계실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이고, 둘째로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들이 다윗의 시편 예언과 같으므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말한 것이지만, 그것은 다윗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베드로는 못박아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부활을 암시하는 27절입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27).”
베드로는 29-32절에서 시편 16:8-11을 해석합니다. 모든 유대인이 알듯이, 다윗은 죽어 장사지내졌고 그 묘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음부에 버림을 받지 않고 육신이 썩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다윗에게 한 약속일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메시아이고 주님이신 분을 향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그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31절은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예수님에게 사용합니다. 그는 구약 성경에서 예언되었고 약속된 그리스도—메시아인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활에 대하여 예수의 증인들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32).”
정리하자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메시아가 되셨다는 게 아니라, 메시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미 지상 사역 동안에도 메시아셨다는 것입니다.
그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하늘로 높임을 받으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33절은 다시 오순절 아침의 그 기이한 현상, 성령강림 사건으로 돌아와 그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33).” 결국 17-21절에서 요엘서를 인용하여 한 그 말씀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교회에게 부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교회에게 세례를 베푸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끝으로 다시 한 번 시편 110:1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34–35).” 시편 110편은 왕의 대관식에서 사용된 시편으로 추정되는데,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것은 하늘에 올라갔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부활처럼 승천도 다윗에게 해당하는 말씀일리 없습니다. 이 말씀은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만유의 주이심을 온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정한 시기에 오셔서 모든 원수를 당신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설교의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36).”
이 말은 예수님이 부활 이전에는 주가 아니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활 후, 예수님을 보좌 우편에 올리심으로 그의 신분을 확인시켜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이 이러하다면, 이제 이 설교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7주 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나사렛 예수가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주님이시라면, 그분께 복종하고 그분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조롱하고 배척할 것인가? 그들은 생각해야 하고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분은 마침내 오셔서 만국과 만민을 심판하실 주님이십니다.


3. 성령세례(행 1:5; 눅 3:16; 마 3:11; 막 1:8; 요 1:33; 행 11:16; 고전 12:13)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간단하게라도 설명이 필요한 세부적인 주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새 시대가 왔다는 표적이라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예루살렘에서 같이 기도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한 것과 같은 성령 체험이 필요한가, 사도행전 2장에서 본 오순절의 체험은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체험이 되어야 하는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런 체험을 하셨습니까? 그 체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오순절 성령강림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사건이고(행 1:5) 세례 요한이 말한 성령세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세례라는 용어가 많은 오해와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용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중생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성령세례’를 체험했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엄청난 축복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중생 후에 받는 제2의 축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단, 신약성경에서 성령 세례를 언급하는 구절은 모두 일곱 구절입니다. 그중 네 구절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 내용입니다. 그중 한 구절은 누가복음 3:16입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누가복음 3:16; 참고, 마 3:11; 막 1:8; 요 1:33).” 세례 요한의 이 말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사도행전 1:5에서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11:16은 이 말씀을 다시 언급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두 여섯 구절입니다. 이제 한 구절이 남았는데 그 해석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고린도전서 12:13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2:13).”
오순절파는 이 구절을 성령세례로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근거는 다른 여섯 구절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하였지만, 여기서는 성령님이 세례를 베푸시는 것처럼 ‘한 성령님에 의해 세례를 받아’라고 읽혀 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헬라어로 읽으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로 읽어야 하고, 다른 여섯 구절과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고린도사람들이 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이 말은, 믿고 신앙을 고백함으로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시고(중생)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죄에 대한 애착과 죄의 권세를 깨뜨리게 하시는(성화의 첫 단계) 신앙 생활의 처음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웨인 그루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님께서 신약교회에 부어 지심으로써(성령세례) 신약교회를 탄생하게 한 단회적 사건입니다. 신약교회의 출생과 관련하여 성령님이 부어 지신 사건입니다. 비유하자면, 교회는 오순절에 부어진 성령의 저수지와 같아서,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때 그들은 그 저수지에 몸을 던져 성령세례를 받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신약교회에 일어난 성령세례는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단회적 사건인 것입니다. 신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교인)가 된다는 것은 성령님이 부어 지신 그 영광스러운 교회—성령의 저수지에 몸을 던져 다 함께 그 성령님을 마신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설명이지만, 성령세례에 대한 오해와 혼동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4. 교훈과 적용 (요 14:26; 15:26; 고전 12:13)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신약교회는 무엇보다 말씀이 이끄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날 베드로는 신비하게 보이는 특별한 능력으로 구약성경에 뿌리를 내린 놀라운 설교를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베드로의 지성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복음 14: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한복음 15:26).”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베푸신 성령세례 사건이자, 새 시대가 왔다는 표적이었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교회도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향하여 새 시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표적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요엘의 예언대로, 남녀노소, 신분에 상관없이 성령이 모든 육체에게 부어지는 것이 새 시대의 표적이고 그것은 교회에서 경험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고, 이 세상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임재인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해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시작된 새 시대, 하나님 나라의 표적은 가히 혁명적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회적 구분을 무색하게 하고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한 가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2:13).”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전북 금산교회의 이야기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금산교회는 1908년 ㄱ 자로 지어진 목조건물로 유명합니다. 남녀 유별을 위해 ㄱ자로 건축한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금산교회 초기 신자 중, 거부이자 지주인 조덕삼(1867-1919)이 있었고 그의 마부 이자익(1882-1959)이 있었습니다. 이자익은 경남 남해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먹고 살려고 전북 김제로 와서 조덕삼이 거두어줌으로 조덕삼의 마부가 된 사람입니다. 이자익은 조덕삼의 아들이 공부할 때 어깨 너머로 글을 배웠습니다. 본래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시작한 금산교회가 성장하게 되면서 첫 장로를 선출하는데 놀랍게도 주인 조덕삼이 아닌 마부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게 됩니다. 조덕삼은 15살이나 어린 자기 마부 이자익을 장로로서 존대하고 잘 섬깁니다. 그러다가 그의 자질을 눈여겨본 조덕삼은 학비를 전액 후원하여 그를 평양신학교로 보내 목사가 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후에 금산교회의 장로가 된 조덕삼은 목사 이자익을 금산교회로 청빙하여 목사와 장로로 함께 교회를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교회는 이 세상에 새 시대가 왔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알리는 표적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 어떻게 이런 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 교회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나누는 모든 사회적 기준과 구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자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그런 교회의 영광을 누리며 이 세상을 향하여 새 시대가 왔고 새 시대를 끝내는 심판의 날도 가까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