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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 초자연적 공동체의 탄생

사도행전 1:15-2:13, 에스겔 37:9-10, 에베소서 2:20-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8-28

말씀내용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십니까? 성경은 교회를 초자연적 공동체라고 소개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신약 교회의 탄생을 보여주는데, 그 이야기가 교회의 초자연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교회의 초자연적 특성을 모르면, 사람들은 교회를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조직으로 만들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교회들을 수도 없이 보고 경험합니다. 일례로, D.A.카슨의 말을 생각해보지요. “교회는 자연적인 친구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자연적 원수들로 구성된다. 우리를 함께 묶는 것은 공통된 교육, 동일한 인종, 비슷한 소득 수준, 비슷한 정치적 견해, 공통된 조상, 똑같은 억양, 동일한 직종 땨위가 아니다. ..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서로를 사랑하는 초자연적 원수들의 집합체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면,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가 어울릴 만한 사람들—자신과 비슷한 교육수준, 재산수준, 사회적 수준에 있는 사람들을 찾고 그들과 어울리려고 할 것입니다. 소위 유유상종입니다. 그런 친밀한 만남에 힘쓰면 힘쓸수록 그들은 교회의 초자연적 특성을 훼손하고 결국 교회를 허물게 되는 것입니다. 친교를 통해서 말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교회가 넘쳐납니다. 교회의 초자연적 특성은 비단 사귐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기원과 모든 속성이 초자연적입니다. 본문을 통해 그것을 살펴보지요.


1. 말씀이 이끄는 공동체 (1:15-26; 눅 22:32; 시 69:25; 109:8; 잠 16:33)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에는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아우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총수는 약 120명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분부하심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1:12-14). 그들이 처음부터 기도하는 공동체였다는 것이 아마 첫번째 요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1:15-26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그 공동체는 말씀이 이끄는 공동체였습니다.
기도하던 중,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까지, 당신을 부인하여 실추되었던 베드로의 리더십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21장 참조). 베드로는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신 주님의 말씀대로(눅 22:32), 형제들을 굳게 세우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봅니다. 베드로는 이때부터 대략 41년경 예루살렘을 떠날 때까지(12:17)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 지역에서 유력한 리더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120명의 첫 성도들이 기도하던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나서 한 말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결한 유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은 40여일 전에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혔고 이튿날 십자가에서 처형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은 사흘째 되던 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뵌 이래 40여일 동안 그분을 뵈었고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라는 말씀과, 그들이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승천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이 낯선 상황에 남겨진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또 유다의 빈 자리에 대한 그들의 심정은요? 그들에겐 많은 질문이 있지 않았을까요? 유다는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도 고치고 권세도 행하던 동료였을 뿐 아니라(눅 9:2), 그들의 재정을 맡을 만큼 동료들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요 12:6; 13:29). 그는 베드로가 17절에서 말한대로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70명의 제자 뿐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에게도 친숙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후회 끝에 비참하게 자살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신뢰를 받던 그 인물에 대한 설명, 해석이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혹 나도 유다처럼 언젠가 변질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없었겠습니까? 보통 어떤 조직이나 모임에도 이런 유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이것이 심해지면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 조장되고 조직이 와해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 시기적절한 위기 관리는 모든 조직에서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계셨다면 상황은 조금 다를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남겨진 그들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지도자라면, 이런 위기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무언가 나서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말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들은 그가 그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예상했을 수 있습니다. 예상대로 베드로는, 모두가 의문과 두려움을 품고 있는 바로 그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그가 리더로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많은 설교가 나오는데 1장 15-22절은 베드로의 총 11개 편의 설교 가운데 첫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구약 특히 시편의 본문에 철저하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1:16).” 다윗의 시편이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유다와 그의 배반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분석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다가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게 되었을까, 어디서 그가 마음을 고쳐 먹은 것일까, 예수님께서 그를 섭섭하게 하셨던 일이 과연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들이었지만, 베드로는 그런 식의 인간적인 분석을 넘어, 이 일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과 계획의 일부였다고 말합니다. 18-19절에는 괄호가 있는데,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의 일부라기 보다, 누가가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 독자들에게 설명하려는 삽입부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베드로는 먼저 시편 69:25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시편 69편은 원수들의 공격을 받는 공동체를 대변하여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원수 편에 가담한 자로서 공동체를 공격했습니다. 이 구절과 함께, 베드로는 시편 109:8을 인용했습니다.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시편 109:8).” 악한 지도자들을 저주하며 새 지도자를 세워 달라는 기도입니다. 베드로는 이 시편의 말씀들이 “성령님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한” 것이라고 함으로써(16) 유다의 배신과 죽음이 정해진 마땅한 일이니 더 이상 의문과 두려움에 혼란스러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안합니다.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울 사람은 주님이 분부하신 대로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 즉,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제시합니다(21-22). 이 조건은 베드로의 심사숙고의 결론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분부에 근거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조건에 부합하는 두 사람을 천거했는데, 바사바 또는 유스도라고 불리는 요셉과 맛디아였습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던 70 제자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열 두 사도의 빈 자리를 채운다는 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이 자리에 세워진다는 것은 사오 십일 전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른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예수님처럼 자신도 그 죽음을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사도로 선출된다는 것은 명예를 넘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희생이 요구되는 자리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의 택하신 자가 될지 묻기 위해 기도했습니다(24-25). 기도 후, 그들은 제비 뽑아 맛디아를 열두 번째 사도로 선출하였습니다. 제비뽑기는 구약 시대에 흔히 행해지던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언도 말씀합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 16:33).” 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이 제비뽑기 방식은 더 이상 신약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워드 마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이런 방식이 가능했으나, 성령이 오신 후에는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인도를 통해서 분별하고 선택했다. 더욱이 사도들은 이후에 일꾼을 뽑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들의 마음 가운데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지했다(참고. 5:3, 9; 13:1–2; 15:28; 16:6–10 등). 따라서 제비를 뽑는 것은 더 이상 기독교 공동체가 따라야 할 본이 아니다.”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맛디아를 선출한 이야기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것은 탁월한 리더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베드로의 의견이나 다수의 의견을 좇아서 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열두 사도를 채운 일은 사도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순종하려는 사도들의 결의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분부를 감당하기 위해서, 전열을 정비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을 이끄는 것은 리더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끄는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초자연적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첫번째 특성입니다.


2. 성령이 오셨다 (2:1-13; 겔 37:9-10; 출 3:2; 13:21; 계 21:8)
2장에서 우리는 이 공동체가 소위 신약 교회로 탄생하는 결정적 사건을 만납니다. 소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열흘 쯤 지나 오순절이 왔습니다. 유월절, 초막절과 함께 유대인의 3대 절기인 오순절은 유월절에서 50일이 지나서 맞이하는 절기입니다(정확하게는 유월절과 무교절 후에 오는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고,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50일째 날이었습니다). 본래 유월절에서 7주를 지난다고 하여 칠칠절이라고 불렸는데(출 34:22; 신 16:9–11), 이것이 날의 수로는 50일째였기에 헬라어로 오순절(펜테코스테, πεντηκοστή)이라고 불렀습니다(πεντήκοντα=오십).
중요한 것은 이날 120여명의 길따름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입니다. 그들은 그날도 ‘다같이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1). 그 장소는 그 다락방이었는지(1:13), 주변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성전 곁의 한 장소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모두가 들었습니다. 그 소리가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했다’고 하니 그 소리는 엄청난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늘로부터’ 임하는 소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는’ 것이 그들 모두에게 보였습니다. 이 이상한 현상은 청각과 시각으로 경험한 일이었고 그들 중 몇 사람에게만 보여진 환상이나 환각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바람과 불의 현상은 모든 사람이 듣고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바람은 구약성경(ר֣וּחַ)과 신약성경(πνεῦμα)에서 성령님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특별히 에스겔 선지자가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을 향해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고 했을 때, 마른 뼈들이 살아나고 극히 큰 군대를 이룬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겔 37:9-10).
불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셨고(출 3:2) 불기둥으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출 13:21). 또한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계 21;8).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형벌 대속의 심판 덕분에, 신자들에게 불 세례는 파괴적이기 보다 은혜로운 능력의 세례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객관적으로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 자신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절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우리는 여기서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를 만납니다. 이 용어는 사도행전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섬기는 사역에 적합하도록 사람들에게 능력을 허락하실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다음 설교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마는,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성령님께서 그들을 강력하게 사로잡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벌어졌습니까? 그들이 무아경이나 지적 혼돈에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성령의 임함과 충만은 겁쟁이들을 용감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교만한 자들을 겸손하게 변화시켜주었습니다. 문제는 이 사건이 그들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입은 제자들은 각기 다양한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나라와 민족의 다양한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는 이 희귀한 현상을 접한 주변의 큰 무리 가운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때는 오순절이었습니다. 6월 초순의 오순절은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었기에, 3대 절기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순례자가 예루살렘을 찾는 절기였습니다. 이점에서 오순절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는 역사적 사건을 행하시기 가장 적합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5절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9-11절은 순례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 간단한 목록도 보여줍니다. 북아프리카의 리비아로부터 메소포타미아까지 로마제국의 원근 각처에서 온 순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오순절 아침에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난 곳 방언’으로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습니까? 아람어나 헬라어야 당연하게 들을 수 있었겠지만, 그 먼 동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듣다니요? 그것도 그들의 난 곳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닙니까?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본문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고(7)’ ‘다 놀라며 당황하였습니다(11).’ 그들이 보기에도 이것은 이성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배우지도 않은 외국어로 말을 하다니요? 소동하던 사람들이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한 점을 보아(11), 제자들은 그 외국의 언어들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놀라는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조롱하는 적대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3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3. 적용과 교훈 (엡 2:20-22; 창 11:1-9; 출 34:22; 행 2:41)
이렇게 본문의 내용을 살폈습니다. 자, 그래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사도의 빈 자리를 채우려고 맛디아를 뽑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봤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사실이 그 뒤의 모든 이야기들을 가능하게 하였고, 모든 것들을 설명해줍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없이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가 그렇고, 오늘날의 교회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성령이 강림하실 때, 이렇게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기적적 현상들이 동반된 것입니까?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사람들 위에 임하는 모습, 그리고 외국어 방언 현상이 왜 중요합니까? 이것들은 다 이성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초자연적 현상들입니다. 성령님은 조용하게 각 사람 위에 오셔서 그들 안에 새 마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영적 분별력을 주시면서 교회를 탄생시키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조용히 오시는 대신, 순례자들로 가득한 예루살렘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기적들과 함께 오셨습니다. 교회는 몇 사람이 모여서 만든 결사체가 아닙니다. 그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120여명의 예수님의 길따름이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와있던 순례자들, 예루살렘 사람들 뿐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들은 우리들에게 교회는 그 기원과 특성 면에서 초자연적 공동체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령님이 임하시자, 신약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영적이고 초자연적 모임이고 공동체인 교회에 속한 자들입니다.
오순절 사건의 핵심은 방언(외국어)이나 바람, 불의 현상에 있지 않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과 같이 구속역사에서 단회적인 결정적 사건입니다. 이 성령님이 교회에 부어지심으로써 초자연적인 공동체인 신약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아무도 성령님이 탄생시킨 교회를 죽일 수 없었고 이 교회 운동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 황제도, 20세기에 일어난 공산 혁명도 말입니다.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교회가 살아남았고 지금도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창조하신 초자연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연적, 인간적, 이성적 판단과 잣대로 평가되거나 측정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0–22).”
성령님의 오심으로 탄생한 신약 교회는 지금도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중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 여정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성령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잣대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 초자연적인 공동체를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 지금 우리가 함께 한 곳에 모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이 두려운 일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동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교회에 참여하고 계십니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그 영광을 누리기를 구합시다.
뿐만 아니라, 외국어 방언이 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들려졌다는 사실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고대에 바벨탑을 쌓으려고 하던 자들을 하나님은 흩으시려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창 11:1-9). 성령님이 오셔서 신약 교회를 탄생시킨 날은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은 맥추의 초실절로(출 34:22), 밀 농사의 수확을 시작하고 감사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새 시대의 영적 추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 명이 더하여졌습니다(2:41). 하나님은 언어의 혼잡으로 흩어진 백성을 이제 교회를 통해 모으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싸인입니다. 천하 각국의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제자들이 외국의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열방의 추수라는 교회의 초자연적 사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오순절에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에 걸맞는 사명을 수행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보여주실 것을 기대합시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만들어 가실 교회를 기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