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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도발자들

히브리서 10:24-25, 사도행전 15:39, 히브리서 3:12-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5-22

말씀내용
2년 3개월 만에 벧샬롬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늘은 특별히 교회됨 혹은 교인으로 살아감에 대하여 주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도발자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도발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집적거려 일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거의 예외 없이 싸움이나 분노를 도발한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긍정적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1. 본문의 맥락: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히 10:22-25)-믿음, 소망, 사랑
본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암송하기도 하는 익숙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7장에서 10:18까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에 따른 속죄제사를 완성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10:19부터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의지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권면이 10:19-39의 내용입니다.
A. 권면(19-25)과 경고(26-31)와 당부(32-39)
10:19-39의 본문은 크게 권면(19-25)과 경고(26-31)와 당부(32-39)로 구분됩니다. 권면(19-25)은 ‘합시다(혹은 ‘하자’)’는 청유형 동사로 강하게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경고(26-31)는 배교에 대한 경고인데, 내용과 문체가 위협이라고 느낄 정도로 엄중합니다. 지속적으로 돌이키지 않는 죄는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당부(32-39)인데, 히브리서 기자는 과거에 이들이 겪은 고초(지금도 겪고 있는)를 떠올리며 위로와 격려로 ‘인내하라’고 당부합니다.
B. 믿음(22)과 소망(23)과 사랑(24-25)
이런 맥락에서 주어진 24-25절은 ‘하자’는 권면에 속한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2-25절에서 세 가지 권유를 합니다. 22절에서는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자’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자는 소망을 말했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겠지요? 사랑입니다. 24절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은 24절의 분사구문으로서 24절을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속죄에 기초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며 이것이 신자가 사는 방식이란 겁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보듯이,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소망은 어떤 점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엄밀하게는 교회적입니다!)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고 훌륭해도 혼자서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본문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 신자들의 삶이 사랑하며 사랑을 자극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2. 은혜의 도발자들(행 15:39)
오늘 제목, ‘은혜의 도발자들’은 24절에서 꺼낸 말입니다. 24절을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 이해하면, ‘어떻게 서로 사랑과 선행을 자극할 수 있을지(동기를 부여하도록) 생각하자’는 말입니다.
A. 분노의 발작(paroxysm of anger)이 아닌 복된 은혜의 발작(blessed paroxysms of grace)
여기서 ‘격려하다(παροξυσμός)’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단 2번 사용되었는데, 이 본문 외에 사도행전 15:39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이 구절에서 그 단어를 찾아보십시오. 격려하다라는 단어가 있습니까? 여기서 같은 단어는 ‘심히 다투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가 ‘심히 다투다’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도발하는 것입니다. 분노를 도발 내지는 격발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헬라어 단어에서 영어로 발작을 의미하는 paroxysm이 나왔습니다. 이 단어도 분노의 발작(paroxysm of anger)과 같이 부정적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이 동일한 단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형제와 자매들을 도발해야 하는데, 사랑과 선한 행위들을 하도록 도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사랑과 선한 행위들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서로를 도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점에서 성도들은 너나 할 것없이 모두 분노를 도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은혜의 도발자들입니다. 켄트 휴즈(R. Kent Hughes)는 그의 히브리서 강해주석에서 ‘복된 은혜의 발작(blessed paroxysms of grace)’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정확하게 본문의 의미를 드러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된 은혜의 발작을 일으키는 도발자들이 되는 것, 이것이 교회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싸움이나 분노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도발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B. 건강한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덕과 섬김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건강한 교회는 이런 도발자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목사나 장로만이 아니라, 교인들이 서로 그리스도인의 덕과 섬김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도발합니다. 우리는 덕과 섬김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과 분쟁과 다툼을 도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덕과 섬김, 사랑과 선한 일들을 행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도록 형제들을 도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샬롬교회의 교인인 여러분 가운데, 주님의 이 말씀으로부터 제외될 수 있는 명분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윌리엄 레인은 본문의 권유를 “사랑과 선행 그리고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상호 격려로 표현되는 서로 간의 지속적인 돌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교회 내에서 코이노니아 그룹, 청년회, 여전도회, 청장년부 등으로 구분되는 여러 모임들 안에서의 상호 돌봄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끌리게 되고 언젠가 사랑하게 될 날을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느끼기 전에 먼저 공동체 안에서 은혜의 도발자가 되라는 부르심에 충성스럽게 응답해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헌신은 신자의 성숙과 미성숙에 상관없이, 그가 신자이고 공동체의 멤버라면 피할 수 없는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돌보는 책임은 교회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멤버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3. 도발의 방편들을 생각하자.
어떻게 우리는 은혜의 도발자들이 될 수 있을까요? 서로에게 ‘복된 은혜의 발작들(blessed paroxysms of grace)’을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24절에서 ‘돌아보다’가 주 동사이므로, 본문은 “사랑과 선행을 위해 발작하도록(격려하며) 서로를 돌아보자.”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도발자가 되기 위해서 할 것은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κατανοέω)는 그 의미가 풍성합니다. 이것은 ‘면밀히 살피다, 심사숙고하다, 통찰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돌아본다는 것은 주의 깊게 생각하거나 어떤 일을 고려하는 것이며, 사려 깊은 관찰로 충분하고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도날드 거스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심사숙고하다’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저자가 호소하는 것은 명백히 사고의 집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제시된 목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것을 가장 잘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과 선행을 촉진(도발)하려면, 개인적인 노력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동료들의 필요에 민감해야 하고, 집단적인 행동이 꼭 필요하다.” (도날드 거쓰리. (2015). 히브리서 (백승현, Ed. & Trans.; 초판, Vol. 15, pp. 315–316). 기독교문서선교회.)
그리스도인은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형제들을 도발하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형제와 자매들에게 은혜의 도발자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사랑과 선행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지를 말입니다. “서로 사랑과 선한 일들을 도발(격발)하도록 고민하자.”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 방법들을 우리는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랑의 행위와 선행을 어떻게 서로 동기 부여할 수 있는지, 촉발하고 유발할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생각해 보자.”고 말합니다. 이제까지 교회생활을 하면서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얼마나 해보셨습니까? 자, 이제 우리가 어떻게 은혜의 도발자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봅시다.
A. 기도 (잠 21:1; 요일 5:14)
먼저 기도입니다. 우리는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성령님께서 최고의 은혜의 도발자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왕의 마음도 물줄기 바꾸시듯 쉽게 바꾸실 수 있으십니다(잠 21:1).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 가운데 사랑과 선한 일들을 하고 싶은 의지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한1서 5:14).” 주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보다 더 복된 기도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B.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사랑과 선행을 불일듯 하게 하시려고 사용하시는 가장 확실한 방편입니다. 특히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공예배에서는 거룩한 열정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말입니다. “내 집에서는 내 안에 온기와 활기가 없지만, 교회에서 회중이 모이면 내 마음에 불이 타오르고 불이 (나를) 뚫고 지나간다.” 여러분은 이 말에 공감하십니까? 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은혜를 받고 나누는 말씀을 통해서도 형제와 자매들의 심령에 동일한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은혜의 도발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풍성하게 거하게 하십시오. 설교와 교리 공부를 통해서 배우고 깨닫게 된 말씀을 나누는 것 뿐 아니라, 매일말씀묵상과 성경읽기를 통해서 받은 은혜를 나누십시오. 적극적으로 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이지만, 이런 선한 일은 많은 경우 소극적으로 일어납니다. 원망의 도발자가 아니라 은혜의 도발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통해서 흘러가게 할 때, 여러분은 그 말씀의 배수로가 되고 은혜의 도발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과 선행의 도발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편입니다.
C. 격려(히 3:12-13)
25절에서 우리는 ‘권하여’라는 말을 봅니다. 이 단어(παρακαλέω)는 보혜사와 같은 어근을 가진 동사입니다. 그 뜻은 ‘곁에서 탄원하다, 격려하다, 위로하다’와 같이 매우 다양합니다. 이것이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은혜의 도발자가 되기 위해 누군가의 옆에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탄원(기도)하는 것은 효력 있는 섬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장에서 이런 권면을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브리서 3:12–13).”
여기서도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하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본문 25절의 ‘권하여’와 같은 단어입니다. 격려는 결국 사랑과 선행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소극적 목적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형제가 시험에 들거나 넘어지려고 할 때, 그를 붙잡아 주어서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마귀가 밤낮 없이 교회를 허물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서로를 그렇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권하는 것은 은혜 유발자들이 가진 놀라운 도구입니다.
D. 보여줌
마지막으로 매우 조심스럽지만 보여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은밀히 행한 사랑과 선행이 드러날 때, 그것이 여러분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보다 형제와 자매들의 마음에 사랑과 선행의 아름다움을 흠모하게 해서 그들도 그런 일에 참여하게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사랑과 선행의 최고의 효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선행을 행함으로써 형제들을 자극하고 도발하십시오. 사랑과 선행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셔서 그 일에 동참하는 은혜가 있도록 구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여야만 합니다.


4. 우리 모임의 긴박성-‘그날이 가깝다!’ (히 13:7,17; 10:35-37)
25절은 은혜의 도발자 역할을 잘 하려면, 우리가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5절은24절의 분사구문에 해당하므로, 24절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25절을 분사구로 이해하여 24-25절을 번역하면,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모임을 포기하지 않고 격려하면서, 그리고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더 그렇게 하면서 서로 사랑과 선행을 도발하기 위해서 생각하고 연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당시에는 박해 때문에 모이는 것을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의 습관을 따르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모이기를 주저하거나 모임을 피하는 수만 가지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실 때, 여기에는 모이기를 폐하는 이유들을 능가하는 본질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혼자 행할 수 없으며, 신앙은 나 홀로 삶에서 성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공동체는 신앙이 자라는 토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는 지도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13:7,17).
히브리서 기자가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씀한 부분도 중요합니다.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그날이 가깝다는 긴장은 성도들이 공동체로 모여 서로 사랑과 선행을 도발해야 할 중요한 조건입니다(히 10:35-37). 그래서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신자는 더욱 더 경건을 추구해야 하며 따라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5. 교훈과 적용: 다시 교회!
저는 2018년 가족수양회에서 전했던 말씀을 찾아봤습니다. 오늘 그때 나눈 결론으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자체(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 보다 공동체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 흠잡을 데 없고 그 의도가 제아무리 정직하고 진지하며 희생적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파괴자가 되고 만다.” 저는 이 젊은 신학자의 통찰에 놀랍니다.
여러분에게는 교회에 대한 이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오늘까지 목회를 하는 것은, 제게는 교회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의 차이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가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교회의 목사나 신도들이 높은 이상을 견지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지나치게 엄격해지거나 경직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상을 포기하지 않되, 유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시간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J.R.R. 톨킨은 하나님의 미래가 위대한 지도자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때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감을 못 잡으며 어디를 가고자 하는 욕망도 없이 자신들의 빡빡하고 작은 세계 속에서 사는, 발가락에 털나고 불완전하게 생긴 자그마한 보통 사람들인 호빗들 가운데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변화시킨 주역들이었습니다. C.S.루이스의 말마따나 이들은 예기치 않은 기쁨에 놀란 피조물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초대받고 있는 여정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이 쓰기 원하시는, 평범하고 불완전한 교회들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여정—천로역정—을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G.K.체스터턴의 말을 여러분과 다시 한 번 나눕니다. “우리는 함께 배를 탔으며 함께 배멀미를 하고 있다.”
그럴지라도, 여러분은 계속해서 사랑과 선행을 행하십시오. 그리고 벧샬롬 호에 함께 타고 함께 배멀미를 하는 형제와 자매들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지속적으로 도발하는 일을 감당하십시오. 적극적으로 복된 은혜의 도발자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