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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5). 성품

요한복음 15:4-12, 에베소서 3:17-19, 로마서 8:2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4-03

말씀내용
1. 신앙의 질문들 (요일 2:20,27)
예수님을 믿는 삶에서 여러분을 가장 고심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 응답이 잘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까? 매일의 경건의 습관에서 늘 실패하는 문제입니까? 하기는 하지만, 마음을 쏟아 붇지 못하는 문제입니까? 사람을 사랑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문제입니까? 교회에서 사람들과의 사귐에서 자신을 오픈할 수 없는 문제입니까? 혹은 오래 믿었지만 여전히 어린 아이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답답함입니까?
이 마지막 질문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주님을 닮아가는 일은 이리 더딘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는 왜 진행이 되지 않는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이런 질문들을 가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여긴다는 증거이고, 이런 질문들은 대개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딱 떨어지는 답이나 기가 막힌 교리적 설명으로 단번에 충족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배운 말씀과 교리의 설명이 아무리 바르고 훌륭해도 시간이 지나야 깨닫게 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설명이 성경적으로 옳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만일 잘못된 설명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비상한 은혜가 아니면, 시간 속에서 더 나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잘못된 설명에 노출되어 있고 그것을 붙들고 사는 것은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주의 기름부음이 있는 성도들은, 성령님께서 진리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지키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요일 2:20,27). 하지만, 이것이 진리를 알고 진리 가운데서 행하려는 우리의 책임을 면제시키지는 않습니다.
오늘 제가 이 많은 질문들을 다 다루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길따름이들]이라는 큰 주제 아래, 오늘 우리가 생각할 제목은 <성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로 살아가면서 세월을 지날 때,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성품이 빚어지고 그 형상을 점점 더 닮아가는 변화가 일어나는가? 신자는 어떻게 주님의 아름다우신 덕과 성품을 닮아가는가? 또, 이 변화는 우리 노력의 산물인가, 성령의 역사인가? 이런 문제들을 주의 말씀을 따라 살펴보려고 생각합니다.


2. 구멍 난 그리스도인의 성품 (롬 8:29; 고전 6:18-20)
케빈 드영은 『구멍난 거룩』에서 거룩에 구멍이 난 이유를 세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째, 거룩해지려는 것은 율법주의자, 근본주의자 같은 구닥다리라는 낙인이 찍히는 분위기. 둘째, 교회 안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 셋째, 복음적인 것은 규율이나 의무 사항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라는 겁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롬 8:29). 그러므로 거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신자의 당연하고도 지극히 성경적인 태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된다는 점 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 않고, 그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 복음주의권의 구원 이해는 평범함을 넘어 도덕적으로 변화된 삶과는 본질적으로 연관이 없다.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이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유능하다. 하지만 그 뒤의 일에는 유능하지 못하다. 그들이 복음으로 선포하는 바가 인격 변화와 반드시 연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고든 스미스, 『온전한 성화』 p.78).” 정말 뼈아프게 들리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현상은 단지 복음주의권의 문제라기 보다, 개혁주의 안에서 더 심각해 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전인적이며, 현세와 내세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우리의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몸도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닌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에 몸으로 범하는 죄를 금하며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칩니다(고전 6:18-20). 또한 구원은 죽은 뒤에 받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을 믿는 순간 이 땅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이후 이 땅에서 성령님은 성도들의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물론 구원이 인생의 노력과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은 이와 같이 총체적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맥락에서 오늘 우리는 성품 혹은 영적 성숙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3. 영적 변화인가, 도덕적 변화인가? (5)
제일 먼저, 영적 성숙이 도덕적 성숙과는 다르다는 점을 주목하려교 합니다. 영적 성숙은 도덕적 성숙을 포함하지만, 이 두 개는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도덕적 성숙은 도덕적 변화와 갱신을 위한 의지적 노력의 결과라면, 영적 성숙은 그리스도에 대한 의존, 신뢰, 연합의 결과로 나오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원리를 예민하게 잘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 성숙을 도덕적 성숙으로 오해하게 되면, 의지적 노력으로 덕과 성품을 쌓을수록 주님의 길과는 다른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 성숙을 도덕과 동일시하면, 신앙 교육과 영적 형성을 도덕 교육으로 오해하게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가져올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주님께서 이 본문에서 강조하신 것은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이고,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긍정, 부정의 의미로 5번이나 주님은 ‘내 안에 거함’을 말씀하셨고(4,5,6,7),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2번 말씀하셨습니다(9,10).
본문의 맥락을 보십시오. 주님은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15:1-8에서 ‘열매’는 6번 나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임을 주목하십시오. 가지가 나무에서 잘려 나가면 열매를 맺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5b). 이것은 인간의 자아를 거스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언제나 주님의 이 말씀과 부딪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들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믿었습니다.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인간이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을 떠나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영적 열매, 영원하고도 하늘에 속한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어야 하고, 너희는 내 안에 거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도덕적 변화를 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영적 성숙, 나를 닮은 성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 안에 거함’으로써 맺는 열매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종종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해왔습니다. 경건한 어른은 결단하고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 성숙과 도덕적 성숙을 구별해야 합니다.


4. 내 안에 거하라.
본문에서 주님은 영적 열매를 맺으려면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즉 삶에서 영적 성숙이라는 열매를 얻는 길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말씀을 대중에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 그것도, 가룟 유다가 떠난 후 11명의 제자들에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이미 너희는 내 안에 있는 자들이니 계속해서 매일 매 순간 내 안에 거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겁니다. 어떻게 우리는 주님 안에 매일 매 순간 거할 수 있는가?


A. 주님과 소통하는 삶 (7)
그것은 주님과 소통하는 삶입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7).”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과 기도를 언급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거나 주의하지 않고 주님 안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또 주님께 내 마음을 쏟아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님 안에 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부가 연합하여 한 몸이라고 할 때, 부부 사이에 이런 소통이 없다면 어찌 서로가 서로 안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실 때, 주님은 매일 매 순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내게 네 마음을 쏟아 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께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는 삶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 성례라는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곧 성령님께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통상적인 은헤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B. 의존하는 삶—겸손과 약함
달리 말해서, “내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의존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열매를 낼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태도는 철저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율이나 자립은 없습니다. 아무도 인생에서 홀로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떠받치는 깊은 강입니다. 고든 스미스의 말입니다. “겸손함 없이는 거룩함도 없다. 거룩함에 대한 위협은 교만 하나 밖에 없다. 자율과 자립이라는 교만이다. 우리는 자립에서 믿음으로, 교만에서 약함으로 돌아선다.”(고든 스미스, p.85)
이 말은 얼마나 우리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말입니까? 우리는 자립을 원하고, 강함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믿음—의존—의 삶이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죄인의 심령이 복음을 적대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가 선호하고 추구하는 강함과 자립, 자율은 하나님 없는,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성향입니다. 마치 속 마음은 한 없이 연약한데 사람들 앞에서는 강한 척하려는 아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그 자기 방어의 방패를 내려놓습니다. 더 이상 강한 척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이제 사랑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의존하는 믿음과 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이 그의 삶의 태도가 됩니다. 더 부드러워집니다. 이 믿음과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의 삶의 표지입니다.


5. 내 사랑 안에 거하라. (9-10)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이 하시는 두 번째 말씀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9절과 10절에서 이렇게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굳이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과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구분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믿기 힘들만큼 너무 좋은 말씀이 아닙니까?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은 주님 자신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니 마음 놓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그 사랑은 부족함이 없고 측량 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까? 주님의 그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사랑에 굶주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만족하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지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실 수 있었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이제 동일한 사랑으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A. 순종—계명을 지켜라(10,11)
다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대답이 무엇이죠? 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10).”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순종입니다. 순종이야말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순종이 주는 기쁨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의 마음에 채워지는 거룩한 기쁨을 경험하셨습니까? 주님께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실 때(11), 바로 이 순종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과 사랑, 사랑과 순종은 끊어질 수 없는 신자의 삶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순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B. 계명—서로 사랑(12; 요 13:34-35; 요일 3:14; 4:8)
주님께서 ‘내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는데, 그 계명이 무엇입니까? 12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15:12).” 주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13:34-35에서 새 계명으로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에서 보듯이, 형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입니다(요일 3:14).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사랑이시듯 자신들도 사랑에 속한 자임을 드러냅니다(요일 4:8). 하나님의 성품이 그의 인격 속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6.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가기 (엡 3:17-19; 롬 5:5,8; 갈 5:16)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잠깐 정리해보지요. “내 안에 거하라! 그리고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인격 수양이나 의지적 노력으로 고매한 인격이라는 열매를 이를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의 사랑 안에 거할 때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영광스러운 초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그 동일한 사랑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근거합니다. 주님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했고 누리셨으며 그 확신에 근거해서 죽기까지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내 계명을 지킴으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라고요! 성도가 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씀과 기도라는 은혜의 통상적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예수님 안에 거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수고로운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가지인 내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만 하는, 생존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매일 매순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같은 풍성한 사랑, 은혜가 넘치시는 하나님처럼 은혜가 넘치는 성품, 품이 넓으신 주님처럼 사람들을 품어주는 가슴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난 삶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오늘 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어느 날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은혜로운 초대를 생각할 때, 신자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존재로 살아가며 그 힘을 경험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고 증명된 그 사랑을 받고 받으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주님의 게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이런 힘은 우리 안에서 절대로 그리고 결코 자가 생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삶입니다(엡 3:17).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아는 삶입니다(엡 3:18-19). 그리고 그 사랑에 반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일을 우리들 안에서 주도적으로 행하십니다. 로마서 5:5을 보지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로마서 5:5).”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확증되었습니다(롬 5:8).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님에게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주 안에 거할 수 없고 주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길따름이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갈 5:16).
19세기 말에 찰스 셀던이 쓴 세기적 베스트셀러 소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입니다. 저도 중고등학교 시절 읽고 받았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영적 성숙, 주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개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결과로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결단은 훌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좌절감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결단은 고상하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공을 했을 때만이 아니라,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조차 우리를 품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게 하고, 그 감격으로 우리를 빚으시는 성령의 역사가 끊이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실패자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계속 그러합니다. 성공적으로 주의 계명에 순종할 때에만 우리를 더 사랑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랑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로 증명되었고 보장된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는 점점 그분의 아름다우신 성품이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길따름이의 삶은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네 모습 그대로 내게로 와서 내 안에 거하라.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