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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3). 권위

누가복음 5:27-28, 히브리서 11:8, 마태복음 19:16-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3-20

말씀내용
우리는 [길따름이들]이라는 큰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고 있습니다. 길따름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고 협착한 길,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길로 행하는 사람이며, 이 길을 가는 동안 악한 자 마귀의 시험을 또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길을 가는 주님의 길따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권위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권위에 기대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길따름이가 아니더라도, 권위는 인생을 사는 모든 책임 있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 권위가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길따름이는 특히나 권위 아래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여정은 권위를 따르는 여정입니다. 그렇다면 그 권위를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1. 단순한 복종 (눅 5:29)
오늘 읽은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레위는 교역이 많은 가버나움의 세관에서 세리로 일하던 사람이었고, 그는 후일 첫번째 복음서인 마태복음을 쓰게 됩니다. 세리라는 직업은 동족의 고혈로 로마의 세수를 늘려주고 자기들의 배를 불린다는 이유로 유대민족에게는 많은 미움을 받는 대신, 상당한 부를 거둘 수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그날,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는 사실이 레위의 부유함을 살짝 보여줍니다(눅 5:29). 본문은 레위가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 세관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은 퇴근 후에 따로 만나자고 약속을 잡으신 뒤에,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레위도 그의 일터의 현장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부르심은 단순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을 들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복종이었습니다. 레위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거나 혹은 가버나움 세관의 상사에게 잠깐 나갔다 와도 되냐고 허락을 구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레위만의 독특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부르셨던 다른 제자들도 동일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이 단순한 이야기가 잘 이해가 되십니까? 레위가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자신의 인생을 접고 주님을 따른 것이 이해가 되시는가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레위는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요?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말은 레위가 자기 인생을 걸고 주님을 따라갔다는 말이 아닙니까? 누군가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 부름을 받고 자기 인생을 걸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부르심과 복종이라는 이 대응의 유일하게 타당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은 부르는 분이시다. 세리가 따라 나서는 것은 그래서다. 예수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직접적이고 근거를 댈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 만남에서 증명된다.” 그의 말대로, 이 사건은 부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 외에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분이셨고, 레위가 그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 혹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그 의미가 너무나 퇴색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부자가 되고, 더 건강해지고, 더 편안하게 살자고 교인이 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저 교인이 된 겁니다. 교회에 등록을 했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포기하거나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말이 낯설기만 합니다.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더 부자가 되고 더 건강해지고 더 편안하게 사는 인생의 목적은 교인이 된 뒤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길따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사람을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전과 후가 변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 인생이 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따름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라”는 단순한 부르심 앞에서 우리는 그분을 따름으로써,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감으로써 응답할 뿐, 그저 ‘교인이 되는 것’이나 신앙고백을 따라하는 것으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따름은 내 인생에 새롭고 절대적인 권위가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름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름으로 응답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모든 삶에서 주님의 절대 권위에 복종하며 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길따름이의 삶은 권위 아래 사는 삶이고 권위를 따르는 여정입니다.


2. 아브라함의 단순한 복종(창 12:1,4; 히 11:8; 창 22:2)
구약성경도 이런 인물들을 많이 보여주지만, 특별히 아브라함을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이 한 음성을 듣는 것으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기록합니다(창 12:4). 당시 지금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는 하지만, 이 75세의 노인이 자기 삶의 터전을 떠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 겁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가나안 드림이라는 게 있었거나 가나안이 번영을 약속하는 땅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역사학자 벤 윌슨에 의하면, 갈대아 우르는 우르크와 함께 인류 최초의 고대 도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문명 세계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야 할 타당한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브리서 11:8).” 이 설명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한 것인데, 그 순종은 말씀하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순종한 이유는 그 음성의 주인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긴 지 사십 년 쯤 지나, 그는 일생일대의 도전에 직면합니다. 100세에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이 이제 십대 소년이 되었는데, 이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겁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이 명령도 놀랍지만, 아브라함의 반응은 더욱 놀랍습니다. 그는 이튿날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산으로 아들 이삭을 데리고 출발합니다. 그리고 사흘째 그곳에 이르러, 산에 올라 정말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로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사실, 설명 불가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외에 다른 설명은 불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듯이,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복종했습니다.


3. 길따름이는 권위 아래 사는 사람이다.
레위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권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권위는 사람을 움직이고 따르게 하며 심지어 인생을 걸게 합니다. 인간 창조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지요. 본래 인간은 권위 아래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 당신의 권위 아래 인간에게 에덴 동산과 피조 세계를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도,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존재인 인간을 자리매김합니다.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게 된는데, 그 범죄는 하나님의 권위를 박차고 나간 것이었습니다. 권위를 억압과 올무로 여긴 것이고, 이 태도는 아담의 후손인 모든 죄인의 본성적 경향이 되었고 이것은 인간 사회의 고질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비록 타락했어도 인간은 권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부모라는 권위를 먼저 만나고 성장하면서 선생님의 권위와 기타 사회 질서 속에서 여러 권위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권위들은 자녀와 제자들 안에서 타락한 인간 안에 있는 권위에 대한 뿌리 깊은 반항심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점점 권위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사춘기 때 그 성향은 폭발적으로 표출됩니다. 자신이 권위 자체가 되려고 합니다. 그 누구의, 어떤 권위도 먹히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쌓은 지식과 학위, 물질과 부, 경험과 경륜이 확보되면 될수록 인간의 이 탈권위적 태도는 점점 더 견고해집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탈권위가 아니라, 자신 외에 다른 권위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성향입니다. 이런 경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자녀들을 기를 때, 권위를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래 전에 본 미국영화인데, 제목도, 배우도,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마는, 아주 인상적인 부분을 기억합니다. 아침에 가족이 식사를 하는데, 엄마는 우유를 먹으라고 아이에게 말하지만 아이는 먹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왜 싫어하는 우유를 먹어야 하느냐?”고 따지고 듭니다. 그때 엄마가 말하지요. “엄마가 먹으라고 하니까 먹는 거야!” 이게 권위입니다. 언제나 모든 사안에서 “무조건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따지지 말고 먹으라면 먹어!”라고 하라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권위는 이해를 넘어서서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녀들에게 권위를 합당하게 가르치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험하고 살아가게 될 사회생활은 권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부모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첫째 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언약 백성의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권위임을 가르치는 명령입니다.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언약 백성, 구약의 길따름이들의 출발점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특히 오늘 말씀에서 레위를 부르실 때의 장면도 동일한 것을 보여줍니다. “나를 따르라”는 권위있는 부르심 앞에 단순히 복종하는 것, 이것이 길따름이들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회심은 죄인이 하나님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는 첫번째 반응입니다. 회심 없이 교인이 된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드러내게 됩니다. 주님의 권위에 대한 인정과 그에 대한 단순한 복종은 그들에게 불가능합니다. 사실, 길따름이가 아닌 것이지요.


4. 절대 권위: 그리스도와 성경 (마 7:29)
예수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에게 궁극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신 분의 권위는 그들의 삶 전부를 지배합니다.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제자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말로만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아래서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스스로 권위를 주장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님처럼 권위 있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태복음 7:29).”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그들의 말을 시작했지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되, 그것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하셨지,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구약 선지자나 또는 당대 유력한 랍비들을 인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어떤 선지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를 따르라,”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어떤 선지자도, 신약의 어떤 사도도 이런 권위로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필연 성경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을 자신의 최종적, 절대적 권위로 인정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가 수요기도회에서 시편 119편 말씀을 상고하고 있는데, 이 긴 시편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칭송하는 내용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그 말씀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절대적 권위로 인정하신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절대 권위로 삼고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문제를 여러 방법으로 논증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 설교에서 하려는 일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은 논증을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조만간 시작할 교리 강의에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에 해당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1장을 성경으로 시작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경의 권위가 분명하지 않다면 뒤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1장 5항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인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의 가슴 안에서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인 역사로 말미암는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의 교리’라고 말합니다. 중생하고 회심하게 하신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완고한 의지에 역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본성적 반감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 마음을 녹여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설득되고 확신하고 항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한 사람은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자신의 최종 권위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길따름이에게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최종적이고 직접적이며 실제적인 권위로 인정할 뿐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절대 권위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자신 외에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던 죄인이 다시 하나님의 절대 권위 아래로 들어와서 사는 것입니다. 길따름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 곧 성경의 권위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


5. 믿음과 복종 (마 19:16-22)
정말 주 그리스도와 성경이 길따름이들의 삶의 최종적이고 절대적 권위라면, 길따름이인 우리가 주님과 그 말씀에 대하여 취할 태도는 단순한 복종이 아닙니까? 레위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의 삶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들만입니까? 모든 길따름이들은 구약시대이든, 신약시대이든 그 권위에 단순한 복종으로 응답하며 그 권위 아래서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매일 맥체인캘린더를 따라 성경의 일정 부분을 읽고 묵상할 것을 권합니다. 모일 때마다 우리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가정예배에서 자녀들이 말씀을 배워야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다 행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을 믿음과 복종을 요구하는 절대 권위가 아닌 이해와 지식의 대상으로만 여길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똑같지는 않지만, 예수님께 나아왔던 부자 청년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마 19:16-22). 그는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태복음 19:21).” 우리가 알다시피, 그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에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습니다(마 19:22)”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 청년의 일을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여기에서 우리와 부자 청년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부자 청년은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부자로 살되 내적으로 내 재산의 구속을 받지 않고,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믿음 안에서 예수와 친교를 맺을 거야”라는 혼잣말로 자기의 슬픔을 달래기보다는 오히려 슬퍼하며 떠나감으로써 복종과 믿음을 버렸다. 이점에서 청년은 대단히 솔직했다. 그는 예수를 떠났고 이 솔직함은 실로 불복종에 기인하는 친교, 곧 예수님과 피상적으로 맺는 친교 보다 더 유망한 솔직함이다.”
이 말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까? 그 청년은 믿음과 복종, 즉 주님을 믿는 것과 따르라는 명령에 대한 단순한 복종이 별개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혹은 습관적으로, 신앙이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주님의 명령을 영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핑계로, 기타 이런 저런 명분으로 믿음과 복종을 분리시키는데 너무나 익숙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복종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곳에서는 자기 정당화라는 값싼 은혜가 예수님의 부르심이라는 값비싼 은혜를 계속해서 밀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레위나,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던 부자 청년이나 동일한 부르심을 받았고, 그들은 모두 그 부르심의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하여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이점을 우리가 오늘 배우기를 바랍니다. 길따름이에게 있어서 믿음과 복종, 주님을 믿음과 주님과 그 말씀에 대한 단순한 복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6. 교훈과 적용 (요 8:32; 고후 5:14; 갈 5:1,13; 출 21:1-6)
말씀을 맺기 전에, 한 가지 오해만 정리하려고 합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길따름이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 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이 권위 아래 사는 삶이 억압적이고 답답한 삶일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그 말씀의 권위 아래 산다는 것, 그리스도께 매인다는 것은 억압과는 정반대의 삶입니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죄에 묶인 죄인을 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 스스로 그 권위에 매이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린도후서 5:14a).”라고 고백한 것을 들어보십시오. 또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라디아서 5:1,13).”
심지어 구약 율법에도, 면제년이 되어 자유를 얻게 된 종이 주인과 처자를 몹시 사랑하여 자유의 권리를 스스로 버리고, 자발적으로 주인을 섬기는 평생의 종이 되겠다고 서약하는 규정이 나옵니다(출 21:1-6). 사랑에 매이면,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을 하되 억지가 아닌 기쁨으로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신자에게 절대 유일의 권위이자, 기쁨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단순한 복종으로 그 모든 주의 말씀에 반응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유롭고 행복한 길입니다.
결론적으로 묻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주님의 길따름이입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서 권위를 발견합니까? 여러분을 보고 “당신 위에 있는 그 권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부모의 삶이 주님과 그 말씀의 권위 아래 사는 삶임을 인정합니까? 오래 전,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염려했었는데,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다름 아닌 따름, 단순한 복종이 없는 기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믿음도 하나의 복종이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주님께서 레위를 부르셨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믿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따름으로써 그 겨자씨 같은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는 주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한, 첫걸음을 떼려고 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믿음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복종하는 첫걸음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지만 아직 제대로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말할 수 없는 분들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또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씨름하는 분들도 주님의 이 부르심에 단순한 복종으로 응답하십시오. 지금까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분들에게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힘과 능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님을 안다면, 이 시간 다시 응답하십시오. “제대로,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하여 따르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상황이 어떠하든지, 지금이 바로 “나를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앞에 단순한 복종으로 반응해야 할 순간입니다. 그 절대 권위 앞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