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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1B). 말씀의 길로 행하는 사람

시편 119:4-8, 신명기 10:13, 신명기 6:2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3-16

말씀내용
성경 전체가 그렇지만, 시편은 특히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깊이 연결된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1편에서 말씀했듯이,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시 1:2). 그리고 지난 주에 살핀 것처럼, 119:1-3은 복있는 사람은 주님의 길로 행하는 사람이며 그것은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 확인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나뉘어진 마음이 아닌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1-3절은 119편의 서론이자 전제로서 복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진술했는데, 이 본문은 전체 176절에서 유일하게 기도가 아닌 진술이고, 4절부터 마지막까지의 내용은 모두 시인의 기도입니다.


1. 교리에서 기도로
오늘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할 점이 여기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1-3절에서 교리를 진술한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4-176절에서 기도를 이어갑니다. 짧은 교리 진술과 긴 기도, 이 구조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인은 교리에서 기도로 옮겨갑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가 우리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성경에 근거하여 체계적으로 잘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는 교리는 반드시 기도로 옮겨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배우는 성경의 교리가 기도로 옮겨지고 있는지,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도의 무릎을 꿇게 하는지, 여러분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바른 교리를 제대로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로 나아갈 수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가를 짚어볼 필요도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문제일 수도 있고, 배우는 사람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지적 추구의 성향에 머무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기도로 옮겨질 수 없는 교리 학습은 배우는 사람 안에 부정적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 지적 교만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리를 강조합니다. 신앙의 내용을 가지지 않은 신앙은 기독교 신앙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성경에 근거하여 이해하고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 때문에 위험도 증가합니다. 교리 학습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신앙의 성장, 경건이 깊어지지 않는다면, 영적, 지적 교만이라는 다른 부정적 결과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목사나 신학자들 처럼 이점에서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헬무트 틸리케의 표현을 빌면, 그들은 2인칭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일을 버리고 3인칭으로만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3인칭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2인칭으로 하나님을 말하는 자리로 나아가, 진리에서 찬양으로, 교리에서 기도로 전환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코이노니아에서 여러분의 말씀 나눔에서도 이것은 부분적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많이 말하는 만큼에 비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는 시간을 좀 더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고, 혹은 교리를 배우고 저녁 시간 쯤에 그 말씀을 반추하며, 하나님께 조용히 나아가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매우 좋은 경건의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설교를 듣고, 교리를 배울 때, 뭔가를 배우고 깨달았다는 지적 만족과 즐거움에서 멈추지 않게 되고, 하나님과의 사귐의 기쁨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시도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제 4절부터 우리는 시인과 함께 그 기도와 고백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2.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고,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소서.”(4)
시인은 그의 긴 기도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4).” 주의 법도는 잘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라고 시인은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 태도는 119편 전체에 흐르는 태도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포함하는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오는 주일 설교를 ‘권위’라는 제목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권위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온 세상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따름이들의 삶에서 절대적 위치를 지니는 유일무이한 권위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거나 그 말씀의 본뜻이 이렇다 저렇다고 자의적 해석을 하여 편의에 맞추어 순종을 하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20세기 중반의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그 시대의 독일교회가 보여주던 이런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단히 특별한 것을 명령 하시니 그것은 참된 것일거야. 하지만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해. 예수께서 명령하면서 요구하시는 것은 율법적인 복종이 아니라 한가지 곧 믿음 뿐이라는 것이지.”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주님의 모든 말씀을 의도적으로 희석해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복종’이 없습니다. 지금 시인이 보여주는 태도는 전형적인 단순한 복종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록한 유명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Da quod jubes et jube quod vis)"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크게 논쟁을 벌였던 인물이 있는데 펠라기우스입니다. 펠라기우스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기도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 기도문이 인간을 의지가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로 묘사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자기가 복종할 능력이 없음을 알았기에, 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라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은 무엇이든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라는 것입니다. “주께서…잘 지키게 하셨나이다”라는 시인의 기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에 우리의 마음을 실을 때, 우리 역시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도한 대로,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순종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희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할 은혜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 시인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취해야 하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특별히 시인은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잘’은 8절에서 ‘아주’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은 힘, 능력, 풍부함을 의미하고 ‘매우 크게’ 혹은 ‘심히’라는 뜻을 가집니다. 시인은 적당히 하나님의 법도를 지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너무나 잘 지키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주의 법도, 즉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4절을 읽을 때,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4절에 대하여 자신의 기도를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오, 하나님의 법도들을 지키려면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는 경건한 진지함이 있어야 합니다. 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근신하며 헌신하는 마음의 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뜨겁고 줄기찬 사랑이오니 그것을 제게 주옵소서. 오, 위로부터 난 지혜를 주옵소서. 그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이다.(약3:15).”
여러분은 어떻게 이 기도에 여러분의 기도를 싣고 혹은 더하겠습니까?


3. 주의 길로 행하기를 사모하라(5-8)
이제 우리는 5-8절을 한 단위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5절에서 시인은 자신에게 주의 법도를 잘 지킬 능력이 없음을 재차 확인합니다. 그래서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 안에 잘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기도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기도를 하는 사람은 위대한 성도이다. 주의 길로 행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만이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여러분은 이런 기도를 드려보셨나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 이 시인의 기도 말입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갈망합니다. 저로 주의 말씀을 지키게 해주소서.”
앞에서 말했듯이, 지금 우리 시대는 권위를 상실한 시대이고, 단순한 복종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지키면 된다는 통념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기에 사탄은 “너희는 연약하니 그리 힘쓰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만큼만 해도 잘 하는거다”라는 메시지를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사탄의 속이는 메시지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 너희는 연약하지. 그래서 성령께서는 너희 연약함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며(롬 8:26), 믿음을 행사할 정당한 이유를 생각하도록 가르치신단다.”
그래서 시인은 6절에서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6).”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단어는 ‘모든’입니다. 시인은 “어떤 중요한 명령들만은 제가 주의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계명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주의한다’는 말을 사용하지요. 이것은 ‘자세히 보다, 무언가를 돌아보거나 자세히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주의 모든 계명에 자기의 두 눈을 고정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having my eyes fixed on all your commandments, ESV). 이렇게 하면, “부끄럽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119편에서 시인에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시인은 31절과 80절에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좀 부정적으로 들리기 쉽지만,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마지막 날에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거짓된 신자나 위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결연하게 자기의 두 눈을 하나님의 말씀의 길로 행하는데 고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할 것은 우리의 두 눈을 주의 모든 계명에 고정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7).”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의로운 판단’을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의로운 판단은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을 의미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말씀의 길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이 가르치는 의로운 판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의로운 판단을 배우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배우는 사람은 ‘정직한 마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마음이 정직해야 이 말씀을 통해서 주의 판단을 배울 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위선적이거나 이중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그들을 데려갈 수 없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정직한 마음, 주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서 주의하는 태도, 순종을 위해 은혜를 구하는 마음,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태도로 주의 길, 말씀의 길을 걸어가는 자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는 감사와 기쁨이 충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순종하는 사람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이제 8절입니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8).”주의 율례들을 지킨다는 말은 의로운 판단들을 배운 결과요, 열매입니다. 그런데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표현은 조금 의아합니다. 왜 시인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일까요? 이것은 뒤집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길로 행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말한 것 이거나, 4-5절에서 표현했듯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앨런 로스는 4절과 8절에서 같은 단어(מְאֹד ‘잘, 아주’)를 사용한 것을 주목하면서, 여기에는 시편 1편의 구조에서처럼 두 길이 소개된다고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말씀의 길로 ‘잘’ 가든지(4),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버림을 받든지(8) 두 개의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두 길이 있다는 것은 시편 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분명하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22연으로 이루어진 119편의 그 첫번째 연에서 이 서론적 내용을 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교훈과 적용—두 길 (마 7:13-14; 신 10:13; 6:24; 약 1:22-25)
말씀의 길로 행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방향성을 잃지 않고 전심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길입니다. 이 길은 전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망령된 삶의 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80여년 전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 길을 값싼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말을 인용합니다. “값싼 은혜란 헐값에 팔리는 용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값싼 은혜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은폐해주는 값싼 덮개를 발견한다. 그러고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지도 않고,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생생할 말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의 설교요, 공동체의 징계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찬이요, 개인의 참회가 없는 죄사함이다. 값싼 은혜는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다.”
구구절절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는 길을 지적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추상적인 한국교회라는 말 대신 우리 자신을 적용하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말씀의 길로 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본회퍼가 말한대로, 값싼 은혜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함께 살펴본 이 시인의 기도에 동참하여 그 말씀의 길로 함께 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시인의 기도에 구절 구절 공감하십니까? 이 기도에 여러분의 마음을 실어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이 시인의 기준은 너무나 높고 어렵고 이 시인은 너무 완벽주의적이라고 느끼십니까? 그래서 현실적인 기준에 맞추어 이 기도를 조정해야 한다고 느끼십니까? 또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이 모든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내가 얻어야 할 의의 기준을 충족시켜 주셨으니, 이제 내가 해야 하는 것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라고 말함으로써, 말씀의 길로 행하지 않을 명분을 얻고 싶으십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씀의 길로 가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마 7:13-14).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의 길로 행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의 길로 행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이 모든 명령과 규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명기 10:13).”
이 말씀들도 들으십시오. 그리고 아멘으로 받으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신명기 6:24).”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야고보서 1:22–25).”
우리는 119편을 계속 상고하면서 이 길이 얼마나 행복한 길인지, 그리고 이 시인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