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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죄 - (7). 탐식- 사소하게 여겨지는 치명적인 죄

요한복음 6:1-15, 창세기 25:27-34, 전도서 6: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2-19

말씀내용
오늘 성탄주일에 [죽음에 이르는 죄] 시리즈를 계속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강화된 방역 조치로 제한될 수 밖에 없기는 하겠으나 일반적으로 크리스마스와 연말에는 먹을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성탄 주일에 탐식을 주제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성탄절의 주인이신 주님과 깊이 연관된 주제입니다.


1. 탐식이 죽을 죄라고?
여러분은 “탐식이 죽을 죄라고?” 이렇게 묻고 싶지 않으십니까? 왜 죽음에 이르는 죄의 목록에 탐식이 들어갔을까요? 교만이나 시기, 분노나 정욕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탐식이 이 죄의 목록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더구나 오늘날 TV 프로그램을 잠식하고 있는 소위 ‘먹방’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맛집을 찾아 가는 것도 탐식입니까? 부페에 가서 좀 많이 먹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사이먼 레이험은 “만일 탐식에 대한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생각이 맞다면, 프랑스인들은 곧 바로 지옥에 갈 사람들이다”라고 풍자적으로 말합니다. 그는 뒤에서 미국인들도 지옥에 갈 것이라고 덧붙이지요. 한국인들도 그들에 못지 않을 것입니다.
C.S.루이스는 1942년에 발표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노련한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탐식의 죄를 사소하게 여기는 조카 웜우드를 책망하면서 말하는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탐식을 인간의 영혼을 낚는 수단으로 탐탁치 않게 여겼던데, 그건 오로지 네가 무식한 탓이야. 지난 일백 년 간 우리가 이룬 가장 위대한 성과는 바로 이 주제에 관해 인간의 양심을 완전히 마비시켰다는 거라구. 이제는 유럽 전체를 위아래로 아무리 훑어보아도 탐식에 대해 설교한다거나 탐식 때문에 가책을 느끼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지. 이게 다, 많이 먹는 데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맛있는 걸 찾아 먹는 데 욕심을 부리도록 총력을 집중한 결과다…자신이 평생 이런 관능의 노예로 살아왔다는 걸 알면 정말 놀라 자빠질걸. 지금은 단지 먹는 양이 적다는 사실 때문에 눈치를 못 채고 있지. 하지만 인간의 위장과 입맛을 이용해서 까탈스럽고 참을성 없고 무자비하고 이기적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양이야 얼마를 먹든 무슨 상관이냐?(17번 편지).”
스크루테이프가 묘사하는 나이든 여인은 그녀를 접대하는 사람이나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공포 그 자체가 된 사람입니다. 조금 길지만, 스크루테이프가 이 여인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인용합니다. “이 여자는 어떤 요리를 내어놓든 새침하니 살짝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어머나, 됐어요, 됐어요…… 제가 원하는 건 홍차 한 잔뿐이에요. 엷게 타 주시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너무 연하게는 말고요. 그리고 정말로 바삭바삭한 토스트를 아주아주 조그만 조각으로 하나 곁들여 주시고요”라고 말하지…… 이제 알겠느냐? 이 노인네는 자기가 원하는 게 이미 차려진 음식들보다 양도 적고 값도 싸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원하는 걸 먹으려는 결심이야말로 탐식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제 입맛을 만족시키고 있는 그 순간에도 스스로 절제를 실천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구. 이 노인네는 손님들이 북적거리는 식당에 가서도 과로에 지친 여종업원이 날라다 준 접시를 보자마자 짤막한 비명을 지른단다. “어머나, 이건 많아도 너무 많군요! 도로 가져가서 반의 반만 담아다 주세요!””
여러분은 C.S.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지적하고 싶어하는 탐식의 문제가 무엇인지 조금 눈치를 채셨습니까?


2. 오병이어의 기적을 먹은 사람들 (마 14:21; 신 18:15; 요 6:26,32-33,35,48-51,55,60,66-67)
오늘 본문은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숫자는 여인과 어린 아이들을 제외한 성인 남성의 숫자이므로 전체는 족히 2만명은 되었을 것입니다(마 14:21). 이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날 그들은 엄청난 일을 체험했습니다. 늘 먹을 것이 부족했고 지금처럼 잘 먹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그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었고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남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보인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14절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반응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로 백성을 먹였던 모세의 예언을 떠올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신 18:15). 둘째로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피하여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향했고, 예수님은 바다를 걸어 풍랑을 만난 제자들을 건져 그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오병이어를 먹은 무리는 이튿날 자기들이 왕으로 삼으려던 예수님이 떠나신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는 예수님을 찾아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오게 됩니다. 복음서에서 이토록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만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주님은 그들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려고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조상들이 만나를 먹었던 이야기를 꺼내자, 주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광야의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이제 그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 떡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32-33). 그러자 무리들은 이 떡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구하지요. 주님의 대답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주님께서 당신 자신이 바로 그 떡이라고 말씀하시자, 무리는 수근거리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수근거리는 무리를 향해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한복음 6:48–51).” 이어서 주님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자(55) 무리의 혼란은 가중되었고 그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60) 하나씩 둘씩 떠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열 두 제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66-67). 이것이 요한복음 6장의 스토리입니다.


3. 탐식이 빼앗아가는 것들 (마 5:3; 창 25:27-34)
이 본문이 탐식과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물론 원대로 배부르게 먹었습니다(11,12).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세상의 음식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먹고 영생하게 하는 참 떡인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배부름에 대한 그들의 욕구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할만큼 강력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생명의 떡으로 받아 먹고 싶은 영적 허기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탐식이 가지는 첫번째 문제입니다. 음식에 대한 욕구가 그들을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음식에 대한 그들의 욕구는 인생의 목적을 왜곡시킬 만큼이나 강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만 하면 더 이상 굶을 일은 없고 그래서 행복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음식에 대한 그들의 육적 갈망이 너무 큰 나머지,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허기를 채워주실 주님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탐식이 가지는 문제는 먹는 것이 의식을 지배할 때, 인생의 목적을 왜곡시킨다는 것입니다. 입맛과 포만감만 채워지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마치 이것 외에 인간에게는 채워져야 할 것이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음식에 대한 욕망 충족이 인생의 지배적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삶이 그것을 말합니다. 마치 먹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먹는 것에 열중합니다.
문제는 육적 허기와 영적 허기의 상관성입니다. 음식에 대한 욕구가 삶을 지배하게 될 때, 그 욕구는 현저하게 영적 갈망을 질식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먹은 무리가 보여준 태도였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떡, 주리지 않게 하는 생명을 주시는 참 떡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이 영생의 말씀에 대해, 그리고 주님 자신에 대해 귀를 막았습니다. 왜냐하면 먹을 것에 대한 그들의 갈망이 그들 안의 영적 허기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미각의 만족과 포만감은 종종 우리의 영적 허기를 무시하게 하고 영적 분별력을 둔화시킵니다.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2세의 말입니다. “기묘하게도 폭식은 욕구 억제제다. 어떤 사람의 식욕은 다른 무언가와 연계되어 있다는 게 그 이유다. 배가 불러서 먹을 것에 물리면 정의에 대한 갈망과 허기가 무뎌진다. 급기야 하나님을 바라는 욕구까지 빼앗아간다.” 탐식은 단지 영적 갈망만 빼앗아 가는 게 아니라 정의에 대한 갈망과 허기도 무디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자리가 부유하다고 느끼는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 뿐 아니라 정의에 대한 허기도 무뎌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삶의 환경의 부유함이 마음의 부유함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주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마 5:3).
하지만, 삶의 환경이 가난하다고 해서 탐식의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먹은 무리가 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먹는 것에 집착했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 지나친 욕구 때문에 그들은 참 떡인 주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는, 먹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일 수 없고,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탐식이 가지는 문제도 이와 비슷한데, 중요한 것들을 상대화시키거나 잃어버리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에서의 삶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에서는 배가 고픈 나머지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아넘긴 경솔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입니다(창 25:27-34). 어거스틴의 이 말이 여기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들은 인생의 이런 (음식의) 즐거움들을 연인의 애착으로가 아니라 사용자의 절제로 이용한다.” 에서는 자신의 배고픔을 채울 팥죽을 거의 연인의 애착 수준으로 여겨, 나는 “당신이 없으면 못 살아”라고 하며 장자권까지 넘겨준 것입니다. 에서의 삶은 탐식이 사람을 망하게 한 경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탐식은 모든 감사를 질식시킵니다. 본문의 무리는 놀라운 표적을 보고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예수님을 대합니다. 가버나움으로 찾아가서는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묻습니다(25). 이게 다입니다. 탐식은 음식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기 보다, 자기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라고 여기게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먹는 음식을 창조하고, 그것을 먹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과 감사한 마음을 둔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식탁에 앉아 먹는 사람들과의 즐거움도 앗아갑니다. 무엇을 먹느냐도 중요할 수 있지만, 누구와 먹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까? 이점에서 탐식은 사람을 사랑하게 하기 보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다시 C.S.루이스가 말했던, 자기 취향에 완벽하게 맞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미식 습관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 까탈스러운 여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녀는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그리고 이것이 그녀 자신의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그녀는 실상 탐식의 노예였습니다. 입맛을 만족시키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기에, 그녀는 접대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광야의 무리들에게도 순간적인 만족을 주는 음식 보다 영원한 만족을 주시는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즐거움이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임시적이고 순간적인 만족을 줄 뿐인 먹을 것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자기들이 지금 누구와 같이 있는지를 놓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이 주신 먹을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귀찮고 지루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먹을 것에 빼앗긴 마음은 생명 같이 중요한 ‘생명의 말씀’에 주목하지 못하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음식에 대한 지나친 욕구인 탐심은 사랑과 우정 그리고 정체성과 소속감, 의미와 같은 중요한 가치들을 공허하게 만들어버리고 우리에게 대리 만족을 제공함으로써 그 중요하고 진정한 가치들로부터 우리를 점점 떼어놓는 부정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맛있는 것을 먹음으로써, 여러분 안에 있는 채워지지 않는 영적, 정신적 허전함을 메울 수는 없습니다. 무서운 것은, 육체적으로 자기를 만족시키는 일로써 영적 허기를 회피하다 보면, 이것은 반복 상승 작용을 일으켜 점점 더 영적인 일들로부터 자신을 멀리 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인생이 만족되는 피상적인 사람으로 점점 더 변하고 맙니다. 이것은 자연스레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하고 거부하게 되는 현상으로 진행되게 됩니다. 그래서 탐식은 결국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합니다. 탐식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빼앗아갑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먹고 체험한 무리들 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4. 그리스도로만 채워지는 허기 (창 3:6; 전 6:7; 요 6:35,51,53-57; 빌 3:19)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가지는 육적 허기가 과연 만족스럽게 채워질 수 있습니까? 처음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범죄한 사건은 먹는 문제였습니다. 유혹의 순간에 하와는 즐거움과 아름다움과 지혜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습니다.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습니다(창 3:6). 하와는 그 모든 갈망이 오직 선하신 하나님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슬프게도 그녀는 이 일에서 실패했고 그것이 인류 최초의 범죄로 이어졌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전도서 6:7).” 이것은 에덴 동산 밖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은 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 욕구는 결코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실, 이 채워지지 않는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 이 욕구는 오직 그리스도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무리들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대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로 영생하게 하는 참 떡이시기 때문입니다(51).
우리는 탐식 사회를 살아갑니다. 채널마다 먹는 것에 대한 방송이 가득하고 맛집에 대한 정보들이 넘쳐납니다. 우리의 입맛도 날이 갈수록 수준이 고급화되어 갑니다. 점점 더 고급진 음식과 음료를 찾게 됩니다. 이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탐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고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이것이 내가 번 돈으로 내가 누릴 너무나 당연한 권리라고 여기는 태도를 주의하십시오. 음식과 온갖 맛있는 것들은 우리가 마땅히 누릴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함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감사함이 사라지면 이미 여러분은 탐식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또 우리는 누구와 먹는가 보다 무엇을 먹는가를 더 중요하고 즐겁게 여기는 태도가 자신 안에 있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식탁은 음식을 먹을 뿐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든지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먹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먹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눔으로써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또한 음식으로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탐식과 관련해서 말할 때, ‘까다롭게(too daintily)’ 먹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C.S.루이스가 말한 사람의 문제가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혹시 탐식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테스트할 수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대했거나 좋아하거나 원했던 것이 아닌 음식과 음료가 제공되었을 때, 그것이 여러분의 경험을 망칩니까?” 이 질문에 “네”라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은 그만큼 탐식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내가 기대했던 음식이나 음료가 제공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같이 먹고 마셨던 친구들과의 즐거운 교제의 기쁨을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끝으로 하나 더 살펴야 하는 것은, 이 먹을 것에 대한 욕구가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싶어하는 나의 영적 허기와 갈망을 무디게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방종하는 자들을 가리켜, “그들의 신은 배요”라고 말했습니다(빌 3:19). 탐식이 음식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행위임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탐식은 음식의 양이 많든 적든 그저 순간적이고 임시적인 만족만을 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만족은 육체적인 만족에 머물 뿐, 전인을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영원토록 그리고 온전하게 만족하게 하시는 분, 배부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신 참 떡이신 그리스도 뿐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참 떡, 영원히 주리지 않을 떡으로 주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크리스마스의 계절에, 음식에 눈이 팔려 참 떡이신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만족하는 은혜를 충만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어지는 성찬식에서 우리를 위해 참 떡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그 약속하신 것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한복음 6:53–57).”
교회는 우리 생애 최고의 맛집이고, 여기에 우리 생애에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진수성찬이 있습니다. 이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