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죽음에 이르는 죄 - (4). 분노-비뚤어진 사랑의 죄

사무엘상 20:30-34, 마태복음 5:21-22, 창세기 27:1-4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1-21

말씀내용
여러분은 많이 분노하는 편입니까? 여러분은 분노라는 감정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우십니까? 혹시 여러분 안에는 언제라도 끓어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분노가 잠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최근에 누구에게 분노했습니까? 과연 분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1. 가장 일상적이면서 가장 위험한 죄 (마 5:21-22)
분노는 가장 일상적이면서 가장 위험한 죄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거의 매일 발생한다는 점에서 가장 일상적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분노가 경우에 따라서는 살인을 일으키고, 설령 물리적 살인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인격적 살인을 함으로써 사람의 인격을 심하게 훼손하기 때문에 파괴적이고 위험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노를 살인과 연결 지어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21–22).”
분노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있는 오늘날에는 분노조절장애(간헐적 폭발장애)라는 질병도 많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폭력적이 되는 가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사를 하려고 냉장고를 들어냈는데 그 뒤에서 식칼이 여러 자루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올 때면, 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식칼을 얼른 냉장고 뒤로 던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쁜 술버릇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분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충동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분노하는 사람은 자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격적 살인을 수없이 저지름으로써, 그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망가진 가정들이 너무나 많고 대부분의 경우 그 배우자나 자녀들이 희생되고 또 다른 악한 사이클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분노는 일상적인 데 비하여 그 결과가 너무나 파괴적입니다.


2. 사울의 분노 대(對) 요나단의 분노 (삼상 20:30-34; 삼상 18:10-11; 시 7:11)
우리는 오늘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삶에서 분노라는 치명적인 죄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울의 교만은 시기를 낳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만은 일만 죄의 뿌리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리에 일단 자기가 앉고 보면 죄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주목함으로써 시기의 죄에 빠졌을 뿐 아니라, 다윗을 향하여 분노했습니다. 그 첫 사건이 사무엘상 18:10-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악령에 시달리자 다윗은 여느 때처럼 수금을 탔습니다. 그때 사울은 다윗을 행해 창을 던져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분노는 이후에도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윗을 죽일 방도만을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기 딸들을 다윗에게 주는 일도 불사할 만큼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분노는 식지 않습니다. 결국 다윗은 더 이상 사울 옆에 있을 수 없게 되었고 요나단은 초하루의 제사와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 사울의 의중을 확인해보게 됩니다. 그에 대한 사울의 반응이 본문 30-31절입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사무엘상 20:30–31).”
이것은 어떤 아버지라도 자기 아들에게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요나단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니었음에도 사울이 이렇게 격하게 반응을 하는 것은 다윗을 향한 그의 분노의 수위가 더 이상 조절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죽을 일을 행한 게 무엇이며 왜 죽어야 하느냐고 아버지에게 따져 묻습니다. 이때 아들 요나단에게 돌아온 아버지 사울의 대답은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사울은 일평생 이 분노의 감옥에 갇혀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분노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분노가 나옵니다. 요나단의 분노입니다. 34절입니다.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사무엘상 20:34).” 요나단의 이 분노는 어떻습니까? 이것은 정당한 분노였습니다. 사실 분노는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시 7:11).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선한 분노와 악한 분노를 구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죄인이 물론 완전히 의로운 분노나 완전히 선한 분노를 드러낼 수는 없겠지만, 주로 분노의 동기에 의해서 선하다거나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요나단의 분노는 정당한 분노였습니다. 이 분노의 동기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창을 던졌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이기적 동기로 인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무고한 다윗을 향한 아버지의 모욕적 언사와 행동 때문에 분노했습니다. 불의하고 부당한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런 일에서 분노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 사울의 분노와는 대조적인 요나단의 정당한 분노였습니다.


3. 분노의 본질과 분노를 일으키는 우상 (창 25:23,28; 27; 시 7:11)
그럼 분노의 본질을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왜 분노하는가?”입니다. 사울의 분노의 동기는 자기의 왕위(나라)를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반면 요나단의 분노는 다윗을 무고하게 죽이려는 아버지의 불의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노의 본질을 좀 더 살피기 위해서, 이삭 가정의 이야기를 잠깐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삭은 리브라로부터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창 25:23). 그러나 아이들을 기르면서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창 25:28). 이삭이 나이 들어 눈이 어두워졌을 때 에서를 불러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오면 먹고 그를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창 27). 이 일을 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에서가 사냥하러 나간 틈에, 야곱이 에서인 척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채게 합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고 물러난 후,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 이삭에게 왔을 때, 이삭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심히 크게 떨었습니다(창 27:33). 놀라운 것은, 이삭이 야곱에게 준 축복을 취소하고 에서를 축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아들에게 속은 아버지 이삭의 반응의 전부입니다. 반면, 에서는 대성통곡하며 분노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결심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합니다(창 27:41-45).
동일한 사건에 대해 이삭이 분노하지 않았고 에서가 분노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삭은 이 사건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에서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요한 우상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분노함으로써 오랜 세월 분노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보통 교만은 겸손의 관점에서, 탐욕은 너그러움(베풂)의 관점에서 비교될 수 있지만, 분노는 사랑의 관점에서 설명되지 않습니다. 분노의 반대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분노는 사랑이 왜곡된 한 형태, 비뚤어진 사랑의 죄입니다. 분노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나 사물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제임스 스미스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 간절히 바라는 것, 갈망하는 것이 우리를 정의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위협이 언제나 존재하기에 분노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자신의 중요성과 안정감을 위해 사람들의 인정이나 좋은 명성이나 지위 같은 것을 찾는다면, 무언가가 당신이 그것을 소유하기를 방해할 때 당신은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내게 된다.”
분노의 본질은 사랑하는 어떤 것을 지키기 위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분노합니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분노하고 적게 사랑하면 적게 분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은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편 7:11).”라고 말합니다.
다시 사울의 이야기로 가봅시다. 사울은 왕위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토록 다윗에게 분노했습니다. 왕위는 사울의 우상이었고, 사울은 끝내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반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기에, 왕위가 다윗의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분노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삭과 에서는 어떻습니까? 이삭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에서를 더 사랑했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더 우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에서가 우상이었던 것이지요. 반면, 에서는 자기 배를 사랑했고 힘을 사랑했으며 지금이라는 현실을 사랑했던 사람이고 그것을 빼앗긴 것 때문에 야곱에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4. 복음은 분노를 이긴다.
분노가 비뚤어진, 왜곡된 형태의 사랑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원래의 아름다움으로 복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할 때, 분노는 자연스럽게 멀어지지 않겠습니까? 분노의 해독제는 엄격한 금욕주의나 차가운 무관심이 아닙니다. 가장 사랑할 만한 대상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왜곡된 사랑을 치유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할 만한 대상은 누구이고 무엇입니까?
청교도 목사 헨리 스쿠걸이 그의 책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했던 멋진 말입니다.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그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으로 측정될수 있다.” 사울의 가치는 그가 사랑했던 왕국, 왕위 즉 권력과 힘으로 평가될 수 있고, 에서의 가치는 그가 사랑했던 배, 힘, 그리고 눈 앞의 현실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삭은 놀랍게도 자기의 우상이 에서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분노를 이기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만한 대상인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쿠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만큼 가치 있고 탁월한 존재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우리의 모든 왜곡된 사랑을 종식시키고 우리를 모든 분노로부터 자유 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과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으시도록 끈질기게 하나님을 추구할 때 우리의 내면에서 악한 분노는 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잘못된 사랑에 대한 대가를 이미 다 치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좋은 소식이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거짓되고 일시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대상을 목매어 사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참되고 영원하며 우리를 위해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만을 우리의 궁극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 외에, 분노라는 치명적인 죄를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5. 정당한 분노 (삼상 17:26,28)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된 분노를 사라지게 하실 때, 우리 안에서는 드디어 올바르고 정당한 분노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나단에게서 잠깐 본 그런 분노입니다. 만일 우리가 정의, 인격, 하나님의 영광 등이 짓밟힐 때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섬기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폭로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분노를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은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사무엘상 17:26b).”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비겁하고 악한 분노도 나옵니다. 다윗의 큰 형 엘리압의 말입니다.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사무엘상 17:28).”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 앞에서는 두려워 침묵하던 엘리압이 막내 동생 다윗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압은 자기가 보여주어야 할 모습이지만 정작 자신은 두려워서 취하지 못하는 그 모습을 다윗이 보여주는 것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왜곡된 사랑의 대상인 우상을 발견하고 깨뜨린 사람은 이제 정당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어제 이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몹시 힘들어 오후 시간까지도 끙끙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거실을 청소하면서 제 주변에 어지럽게 쌓아둔 책들을 좀 정리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때 제 안에서 분노의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느라 끙끙거리는 내가 보이지 않나? 이 중요한 일을 하는 나를 방해하다니!”하는 생각이 분노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팀 켈러도 자신이 설교를 준비할 때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 유독 심하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많은 목사들이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이 중요하고 심지어 거룩한 일이라고 여길 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노가 제가 섬기는 우상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설교라는 우상,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다는 우상 말입니다. 누구도 나의 이 우상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이쯤 되면, 위험수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룩한 일이라고 해도, 아무리 고상한 목적을 가진 아름다운 일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설교자가 되는 것, 설교를 잘 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 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렇게 한 두 시간을 허비한 후, 제 안의 우상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나서야 말씀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설교를 잘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좋은 설교자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좋은 아들이 되는 것, 제 아내에게 경건한 남편이 되는 것, 여러분에게 경건한 목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모처럼 분노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다가 분노를 터뜨리고 마는 제 연약함을 보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저를 한껏 낮추어 주셨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6. 실제적 지침들
말씀을 맺기 전에 몇 가지 지침을 드리고 싶습니다.
A. 용서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 (엡 4:26-27; 약 1:20; 잠 30:33; 엡 4:31-32; 마 18:22; 히 10:17)
첫째는 용서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에베소서 4:26–27).” 해가 지도록, 밤새 분노하지 않는 것, 우상을 발견하고 회개함으로써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은 것이 중요합니다. 밤새 분을 품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마귀에게 틈을 주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분노의 포로가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약 1:20). 분노의 감정이 밤새 우리의 내면에 축적되는 일을 허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압니다. 이렇게 축적된 분노와 원한의 찌꺼기가 얼마나 많은 결혼생활과 가정생활, 그리고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망쳐 놓았는지 잘 보지 않습니까?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잠언 30:33).” 우리 마음이 반복 재생장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마음은 밤새도록 분노의 상황을 무한 반복 재생하면서 우리 안의 분노를 휘젓습니다. 결국 분노가 점점 더 커져서 다툼과 사고를 만들어낼 때까지 말입니다. 이것이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적극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용서하기를 속히 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우리 안에서 분노의 피를 끓게 하는 불이 됩니다. 이것이 쌓이면 쌓일수록 점점 분노의 비등점—끓는 점—에 빨리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분노와 원한의 찌꺼기가 쌓이지 않게 하십시오. 용서는 분노의 최적의 대안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최선이 아닙니다. 억누른 분노는 언젠가 무섭게 터지고 맙니다. 용서만이 분노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1–32).”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마 18:22). 용서가 분노라는 감옥에서 우리를 건져주는 묘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브리서 10:17).” 용서만이 우리를 이 기억에서 자유 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내게 행한 옛 죄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분노에 머무는 경험을 잘 압니다. 하지만 용서는 기억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복음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맛보고 경험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B. 분노의 원인을 살펴보라.
둘째로, 분노의 원인을 늘 살펴보십시오. 자신의 과도하고 비뚤어진 애정이 누구를, 혹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이게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무엇을 그렇게 사랑하기에 분노하는가?”를 물으십시오. 가령, 우리는 자녀들보다 자신을 더 사랑할 때, 자녀들의 불순종에 악하게 분노하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우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노의 원인을 찾아낼 때, 우리는 분노한 자신 안에서 우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찾아낸 우상을 내려놓게 됩니다. 분노의 원인을 살피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에게 잘못한 대상을 용서하게 되고, 또 내가 분노했던 그 대상에게도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C. 분노의 자기 중심성을 인정하라.
끝으로, 분노를 어떻게 표출하든지 그것이 분노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이 요나단에게 했던 것처럼 함부로 공격적으로 말하거나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분노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는 약자일 경우나 큰 다툼이나 사고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상대를 무시하고 침묵함으로써, 혹은 삐져서 며칠, 심지어 몇 달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분노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는 적어도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정당화할 수도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분노의 더 야비한 복수에 불과합니다.
모든 악한 분노는 자기 중심성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노는 언제나 공정하지 않습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과는 다른 의미에서 매일 분노하며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죽음에 이르는 죄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여러분의 내면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이 분노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매일 우리는 우리의 분노에 대해서 자기 중심성을 회개해야 하는 사람들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매일 회개함으로, 우리 자신이 매일 용서함을 받은 죄인임을 경험하십시오. 이 복음의 경험이 우리를 그 고질적 분노의 죄악으로부터 건져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