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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죄 - (3). 시기-자신과 공동체를 죽이는 죄

사무엘상 18:1-9, 잠언 14:30, 마가복음 7: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1-14

말씀내용
1. 교만의 열매, 시기
우리는 지난 주일, 죽음에 이르는 7대죄 가운데 첫째인 교만의 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아의 우상을 그 자리에 두고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번번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불순종은 피치 못할 상황이나 무지와 오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싫은 것이고,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만은 일만 죄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만이 가져오는 열매로 시기의 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볼 것입니다. 시기가 교만이 만들어낸 열매로서의 죄라는 사실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시기의 뿌리는 교만이고, 시기가 맺는 꽃은 증오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간과하면 시기의 죄를 피상적으로 밖에 다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사울의 삶 속에서 교만이 만들어낸 시기의 죄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2. 사울과 요나단 이야기
우리는 사울이 아말렉을 이기고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는 사실을 봤습니다(삼상 15:12). 그의 불순종은 깊어져 갔고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으며 사무엘은 이 일로 근심하며 밤새 부르짖었습니다(삼상 15:11). 하지만 사울은 자기를 위한 기념비나 세움으로써 영적 무지와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의중은 관심 밖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리석음을 낳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나단과 사울이 다윗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대하는지, 그 극명한 차이를 대조시켜 보여줍니다. 본문은 다윗을 향한 사울의 시기심이 처음으로 표출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먼저 지난 주의 본문과 오늘의 본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사울의 불순종이 있은 후,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새 왕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고,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됩니다. 이 즈음, 사울은 악령에게 시달리게 되는데 사울의 신하 중 하나가 수금을 잘 타는 다윗을 추천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사울 곁에 있다가 그가 악령에 시달릴 때 수금을 타서 그를 진정시키곤 합니다. 이어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기는 대사건도 일어납니다. 이것이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윗이 어떻게 사울의 군대의 장이 되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A. 요나단 (1-4; 20:13-16; 23:16-18)
먼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태도입니다. 요나단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소년을 보았습니다. 추정컨대 요나단은 왕의 아들로서 이미 전쟁을 치르던 용사였고 다윗은 소년에 불과했으니, 요나단이 다윗보다 꽤나 연장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자 요나단은 목동에 불과한 소년 다윗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고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다고 1절은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또 한 사람의 요나단을 떠올립니다. 18세기의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그가 목회 현장에서 깊은 영적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때, 인디언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병든 몸으로 그의 목사관에 와서 그와 교제를 하게 됩니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 보다 15살이 많았고 브레이너드가 에드워즈의 목사관에 온 것은 1747년, 브레이너드가 29살 때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전기를 쓴 이언 머레이의 말입니다. “지난 5년 동안 에드워즈는 특별히 경건의 본질이라는 주제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것은 동료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그의 회중으로부터도 고립되게 만들었다.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브레이너드가 왔을 때 그는 거의 낯선 사람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마음과 영혼의 본능적 일치가 있었다. 에드워즈의 영혼은 자극과 위로를 받았다…브레이너드의 존재는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Iain Murray, Jonathan Edwards: New Biography, The Banner of Truth, 1988, pp.305-306).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설교를 들을 기회는 없었지만 그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는 그가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감히 흉내낼 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탁월하게 경건했던 지성적 천재 조나단 에드워즈는 15살이 어리고 병들어 죽게 된 청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놀랍도록 사랑했습니다. 브레이너드의 사후에, 그의 일기를 출판하게 된 동기를 이언 머레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브레이너드가 참된 선교사의 모범으로만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과 살아있는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읽혀지고 알려지기를 원했다.”
여러분이 조나단 에드워즈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윗을 대한 요나단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실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은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다는 말을 3절에서 또 강조하면서,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본문은 그 언약의 내용을 말하지 않지만, 4절에서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준 행위를 통해서, 자기가 기대하던 왕의 자리가 다윗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20:13-16과 23:16-18은 이 언약이 왕위가 다윗의 것임을 요나단이 인정하는 것이었음을 확증해 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요나단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 질문을 잠시 남겨두고 사울의 이야기로 가보겠습니다.
B. 사울 (5-9; 막 7:22; 잠 14:30)
다윗을 대하는 사울의 태도는 그의 아들 요나단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사울은 결국 이 뛰어난 소년-청년을 군대의 장으로 삼게 되는데, 온 백성과 사울의 신하들이 다 합당히 여겼습니다(5). 어느 날,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마치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거리로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며 악기들을 가지고 사울 왕과 승전한 이스라엘의 군대를 환영을 합니다.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7). 그리고 바로 그날, 사울은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분노하며 말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8)?” 6절은 그 여인들이 환영한 자는 다윗이 아니라 사울 왕이라고 분명히 말하지만, 사울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그 날 후로 다윗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9). ‘주목했다’는 이 단어가 시기와 관련해서 중요합니다. 시기라는 죄의 본질은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기를 뜻하는 영어 envy는 ‘자세히 보다’라는 어원을 지닌 라틴어 invidia 에서 나온 말입니다. 시기는 사울이 지금 보여주듯이, 누군가를 찜찜하게 보는데서 시작하는 죄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실 때 ‘악한 눈’을 말씀하셨는데 대부분의 성경은 이것을 ‘시기’나 ‘질투’로 번역했습니다(막 7:22). 시기는 누군가를 악한 눈으로 보는 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왕자 요나단이 다윗을 향해 가졌던 태도와 왕 사울이 가졌던 태도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왜 요나단은 다윗의 성공을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그의 성공 때문에 자기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을 만큼 시기했던 것입니까? 이들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언 14:30).”


3. 시기의 본질
결국 시기는 무엇입니까? 신원하 교수의 설명입니다. “시기는 일곱 대죄 중에서도 ‘가장 야비하고, 더럽고, 잔인한 죄’라고 불리는데, 상대가 잘될 때 앞에서는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돌아서서는 배 아파하며 그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기는 자기 행복을 위해 친구의 불행을 제물로 삼는 잔인하고 비틀어진 자기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독일어 schadenfreude라는 단어는 시기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이 단어는 고통을 의미하는 schaden과 기쁨을 의미하는 freude의 합성어로 ‘남의 고통을 즐기는 악의적 기쁨’을 의미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정확히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schadenfreude는 남의 행복을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시기의 이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schadenfreude야말로 인간 본성의 가장 나쁜 특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schadenfreude로 표현되는 시기의 죄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오는 상대적 기쁨과 만족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즉 저 사람이 성공해서 기분이 나쁘고, 저 사람이 망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 자신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무 상관도 없고 변화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쁜 눈으로 ‘주목하는’ 상대방 때문에 기쁘고 화도 납니다.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 말도 시기의 심상을 잘 간파한 말입니다. 그래서 시기는 우리가 가지는 우월감과 열등감이라는 감정과 연결됨으로써, 우리의 자아와 마음의 상태 심지어 인생 전체를 좌우하게 됩니다. 사울이 바로 그 사례입니다.
시기는 불행을 보장합니다. 그날 이후 다윗을 주목하게 된 이래로 사울은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기에, 그리고 다윗이 잘 되기를, 심지어 다윗이 왕위에 앉기를 소망했기에, 다윗의 성공을 보는 것이 즐겁고 기뻤을 것입니다. 그는 영이 통하는 깊은 우정을 만났기에 행복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사울과 요나단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인가?” 우리는 아무도 사울 같은 인생을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4. 내 안의 우상 찾기
시기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울의 시기가 처음 발동한 것은 여인들의 칭송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사울이 칭송을 받지 않았습니까?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비교했습니다. 다윗이 자기보다 더 칭송을 받았다고 느꼈기에 불쾌했습니다. 시기는 내가 가졌거나 가지지 못한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자기가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가령, 내가 자동차가 없다는 것은 단순히 소유가 없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부족하거나 결함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을 치장하는 외적 소유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심리입니다. 시기는 가지지 않은 것 때문에 자신이 덜 존경받을 만하고 덜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느낍니다. 이점에서 시기는 자신의 자아를 파괴하고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내 옆의 누군가의 성공을 주목하면서 나 자신에게는 정작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쾌해하고 분노합니다.
질투는 대개 삼각관계의 사랑에서 이해하기 쉽습니다. 내 소유라고 느끼는 제삼자(인격이나 물건)를 놓고 질투는 일어납니다. 하지만, 시기는 너와 나 양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슬픔, 즉 친구의 기쁨에 진심으로 기뻐할 수 없게 하는 슬픔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라는 슬픔은 실망감이나 자신에 대한 불만족으로 나타나고, 누군가에 대한 불필요한 비판이나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예리한 시각으로 표출됩니다.
자기의 존재 가치를,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 확인하는 것, 이것이 시기가 발생하는 토양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천천인데, 다윗이 만만이라는 칭송을 받았기 때문에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울의 시기가 발생한 지점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다윗보다 더 많은 것을 얻지 못한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기억하십니까? 영화에 등장하는 살리에리를 생각해보십시오. 궁정 악장이었던 그는 어리고 방탕한 천재 모짜르트를 보았던 날부터 인생 내내 불행하고 슬펐습니다. 살리에리의 안에서 발동한 시기는 그를 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모짜르트와 실력으로 겨루기 보다는, 차라리 그를 망하게 하고 없애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울의 인생이 정확히 이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람들의 칭송, 그리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다윗이 살아있는 한, 자신은 불행함을 벗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기는 이렇게 인간을 경쟁의 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가두어 놓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는 일찍이 위대한 작곡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그 십자가 상을 내려 불에 태웁니다. 그리고 그는 모짜르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화신을 파괴하겠노라고 말하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결국 시기는 자기 파멸을 완성합니다.
시기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비교와 경쟁의 게임에 예속시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비교와 경쟁의 게임은 상대방을 제거함으로써만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기하는 사람의 옆에는 언제나 그를 불행하게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비교 우위에 섬으로써만 자기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합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나 그 위에 누군가가 있으니 어떻게 자기 존재의 의미를 비교 속에서. 발견하고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평생 비교하고 불안하고 누군가를 비판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만 하고, 분노하고 증오합니다. 결국 이렇게 망가지고 파멸합니다.


5. 처방—복음 안에서 자족하는 삶 (롬 5:8; 시 23:1; 딤전 6:6; 롬 12:15)
시기는 비교라는 우상을 섬기는 죄입니다. 그 옆에는 늘 비교의 대상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내가 너보다 낫다, 나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합니다. 이것이 자기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존재가 과연 남보다 나음으로써 가치가 있고 더 존경을 받을 만 하고 사랑을 받을 만 합니까? 우리의 존재 가치가 그런 것입니까? 그런 가치가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누군가와 비교하여 더 낫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님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것이 그들의 능력에 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무가치한 존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기에 그들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그리스도인은 이 복음의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인정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족을 말씀하시는 근거는, 이미 자족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복음 안에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시 23:1). 자족은 복음이 신자 안에서 맺는 열매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딤전 6;6).
하나님께서 거대하고 아름다운 드라마를 기획하고 연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이 드라마의 배역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인생 전체를 통해서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배역을 잘 소화하고 마음을 다해 연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작품이 아름답게 연출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배우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배우는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씩 받습니다. 자신의 배역을 감당할 뿐입니다. 각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상이 있습니다. 만일 한 배우가 이 배역 말고 다른 배역을 하겠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망가뜨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역할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자족은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을 믿는 신앙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시기가 일단 마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손이 다른 사람에게서 일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임을 알면서도 그를 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사울처럼 말입니다. 사울도 요나단처럼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았고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다윗을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자족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위가 그를 만족하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왕위나 재물이나 성공만으로 자족할 수 없습니다. 그 옆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는 다윗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기보다 나은 칭송을 받는다는 것을 그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시기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복음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당신의 선하심을 온전하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사람은 결코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어가지 않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그 하나님을 최고로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는 것은 내 삶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내 형제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나단이 다윗을 향해 보여주었던 태도입니다. 사울이 다윗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았으나 자기 인생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은 알지 못했다면, 요나단의 태도는 그가 다윗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만이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람은 자족할 수 있고 편안합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진심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우리 안에 시기라는 죄를 조성하고 발생하게 하는 비교라는 우상을 찾아내고 깨뜨립니다. 그 우상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서 누구를 보십니까? 사울입니까, 요나단입니까? 요나단은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이라면, 사울은 오랜 세월을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보냈을지라도 결코 성장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기는 신자의 성장을 저해합니다. 시기는 세월과 함께 고약하고 못된 사람을 만들어 내고 맙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이기를 바라십니까?
시기의 죄는 개인의 영역을 넘어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요나단은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배가하여 공동체가 누릴 은혜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공동체 안에 사울이 많다면 공동체는 결코 세워질 수 없습니다. 사울처럼 시기하는 사람들은 공동체가 세워질 만 하면 무너뜨리는 역할을 거세게 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눈으로 여러분의 형제들을 바라보십니까?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던 그 악한 눈으로 형제들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악한 눈이 바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시기라는 죄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누군가 우리 중에서 은혜를 누리고 복된 일을 경험하고 있을 때, 온 교회가 그를 알아주고 같이 기뻐해줄 때, 괜히 마음 속에서 외로움이 일어나면서, “왜 하나님은 나에게는 이런 것을 주시지 않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늘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그 비교 의식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존재 의미를 찾는 습관에 묶여 있지는 않습니까? 아담의 후손이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매일 혹은 자주 이 악한 눈의 유혹 속에서 살아갑니다. “왜 내게 없는 은혜를 저 사람이 누리는가?” 이런 악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기의 죄를 우리는 날마다 회개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회개합니까? 복음 안에서 증명해 주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믿지 않은 불신, 그 사랑을 믿지 못하여 누리지 못한 완고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 불신앙이 우리를 시기라는 악한 눈으로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 그리고 그 주권을 온전히 믿는 믿음 안에서 자족하는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4세기의 교부였던 요한 크리소스톰은 “시기는 의복을 갉아먹는 좀벌레처럼, 사람을 갉아 먹는다.”고 말했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인생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심지어 공동체까지도 무너뜨리는 이 시기의 죄를 결코 허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 앞에 있는 다윗을 사랑하고 축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행하신 선하신 은혜를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다윗을 적이 아닌 친구로 누리십시오. 주의 은혜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