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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죄 - (1). 죽음에 이르는 죄

로마서 3:23, 로마서 5:20, 로마서 5: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0-31

말씀내용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본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의도되었고 창조된 인간은 모두가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데 실패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결핍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영광스러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으로부터 분리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죄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고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죄가 가져온 가장 비참한 결과가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리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오늘 시작하는 설교시리즈의 제목 [죽음에 이르는 죄]도 이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은 단순히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넘어 둘째 사망, 즉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가, 죽음에 이르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죄의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고 죄와 싸워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1. 죄 개념을 상실한 시대
데이비드 웰즈가 “우리는 도덕적 나침반을 상실했다”고 진단하는 이 시대에,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죄의 절대적 정의는 실종되었고 세상은 도적적 진공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죄는 심리적 관점에서 이해되기 시작했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진노와 상관없이 우리의 정신 건강에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해롭다고 설명됩니다. 정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여기에 신자와 비신자의 구분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미국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는 “미국의 도덕적 특징이 붕괴한 것은 그 특징을 받쳐주던 교의적 신조들이 폐기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도덕적 특징을 고양시켜 왔던 신학적 기반, 신앙적 세계관이 더 이상 미국 문화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치는 절대성을 상실했고 주관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신분석학자 칼 메닝거의 지적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죄라는 단어가 미국사회에서 급속히 사라졌고 그 결과 죄나 악과 같은 도덕적, 신학적 용어는 아예 법률적, 심리학적 용어로 대체되어 버렸다.”
이것은 우리의 실생활에서 충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두려움과 증오, 그리고 짜증과 분노를 유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내면에서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유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2세는 현대인들이 그 지식을 잃어버렸다고 한탄합니다. 바로 죄에 대한 지식을 말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을 잃거나 제껴놓으면 기분은 좋아질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플랜팅가의 말입니다. “죄와 관련한 자기 기만은 우리의 영적 중추 신경계를 마취시키고 진정시키며 방향 감각을 잃게 하면서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우리 삶에서 틀린 음이 들릴 때 이를 듣는 귀가 없으면 옳은 음을 제대로 연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주에서도 옳은 음이나 틀린 음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신앙적으로 음치가 되어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통해 연주하시는 주요 주제의 제시부와 재현부를 둘 다 놓치고 만다. 창조라는 음악, 그리고 은혜라는 더 위대한 음악이 우리의 두개골 사이로 쉿 소리를 내고 지나가며 한 순간 호흡이 멈추게 만들지도 못하고 아무런 여운도 남기지 못한다. 도덕적인 아름다움이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인간에게 구주가 필요하다는 말이 별나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죄는 우리에게서 모든 아름다움을 앗아갔습니다. 사실 이것이 로마서 3:23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 안에 인간의 모든 행복과 즐거움과 낭만과 여유가 있습니다. 죄는 이 아름다움의 자리에 두려움과 증오, 분노와 짜증 등을 잔뜩 심어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개념을 내던져버렸고 결코 심판자일 수 없는 인간 스스로가 죄를 정의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재판장이 아닌 범죄자가 스스로 죄를 정의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로서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개념을 알고, 죄를 인식하고, 나아가서 죄와 싸워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죄의 교리와 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더 있습니다. 레베카 드영은 죄의 교리를 아는 것이 성화에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죄를 알고 점검하는 것은 죄에 얽매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제대로 이해할 때, 덕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기에 이 주제는 중요하다고 드영은 말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삶에서 덕과 성품, 인격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죄에 대한 무지 그리고 성화에 대한 오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삶에서 이런 열매를 맺으려면, 죄를 아는 것을 넘어서 죄를 떠나고 덕을 함양하는 ‘덕성의 습관화(habituation of virtue),’ 즉 은혜가 이끌어가는 훈련(graced discipline)이 필요합니다. 이것들이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죄] 시리즈를 통해 성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들입니다.


2. 성경이 가르치는 죄
먼저 성경이 가르치는 죄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죄에 대한 정의는 신학자의 수만큼이나 많을 것입니다. 저는 플랜팅가가 설명하는 포괄적인 죄의 개념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는 죄를 ‘한 인격이 인격적인 하나님께 저지르는 유책성 있는 모욕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또 죄는 ‘유책성 있는 샬롬의 파괴 혹은 훼방’이라고도 말합니다. 보통 샬롬은 평화라고 번역이 되지만,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의 올바름과 온전함, 그리고 앞서 인용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통해 연주하는 창조와 은혜의 음악입니다. 십게명의 금령들은 모두 샬롬을 깨뜨리지 말라는 명령들입니다. 샬롬은 하나의 흠이나 티도 없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는 이 샬롬을 파괴합니다. 죄는 모든 진정한 아름다움을 더럽고 추한 쓰레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합니다. 이점에서 죄는 반샬롬(anti-shalom)입니다. 죄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둠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고 다시 도미노처럼 모든 관계와 모든 완전한 상태를 무너뜨립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도 죄가 샬롬을 깨뜨린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죄는 세상이 이해하고 말하는 죄의 개념과는 절대적인 차이를 가집니다. 가령, 죄는 범죄와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모든 죄가 다 민형사상의 범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나태나 폭식, 정욕..). 뿐만 아니라, 죄는 다 부도덕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부도덕의 이름표를 가지지 않고서도 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범하거나 요나의 불순종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또 죄는 심리적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질병도 아닙니다. 질병은 죄를 범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지만, 죄는 죄책이 있는 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소위 ‘7대죄’ 혹은 죽음에 이르는 죄의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3. ‘7대죄’의 유래
이전에 ‘죽음에 이르는 죄’ 혹은 ‘7대죄’라는 말을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사실, 이 용어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대죄와 소죄를 구분하는 것과 깊이 연관됩니다. 가톨릭 교회는 대죄와 소죄를 구분한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의 설명을 교리화하였는데, 대죄는 영혼 속에 있는 은혜를 소멸하는 죄로서 고해성사를 통하여 새롭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으며, 소죄는 덜 심각한 종류의 죄로서 구원의 은혜를 말살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 대죄/소죄의 개념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죄에 순위를 매기는 일은 모든 죄가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라는 본질을 흐린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 성격이나 형벌이 심각한 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히 6:4-6; 고전 6:9-10). 가령, 율법에 안식일을 범하면 그를 돌로 쳐서 죽이는 형벌이 부과됩니다. 안식일 법이 심각하게 여겨졌다는 것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또 주님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성령을 모독하는 것—를 언급하기도 하셨고(마 12:31), 사도 요한은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요일 5:16). 성경에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의 목록들이 나옵니다. 가령, 잠언에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언 6:16–19).”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종교개혁자들이 경계했던 바를 받아들이면서도, 이 구분 자체가 성경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우리의 죄를 진단하는데 유용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7대죄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이 목록에 들어있는 7-8개의 죄만이 치명적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것들이 모든 죄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사용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7대죄라는 말은 보통 영어로 seven deadly sins 라고 하는데, 본래는 seven capital sins 입니다. capital 이라는 말의 라틴 어원 caput 은 머리, 원천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7대죄는 7개의 머리-원천이 되는 죄라는 뜻입니다. ‘대죄’라는 용어는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등 초기 교부들도 사용하였으나, 지금의 목록과 유사한 대죄의 목록을 처음으로 작성한 사람은 4세기 이집트의 사막 수도사였던 에바그리우스(345-399)였습니다. 그의 고민은 행위로 드러나는 죄의 표면 아래 숨겨진 죄, 우상 숭배의 진정한 뿌리로서의 죄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만을 섬기려고 경건에 삶을 바치던 사막 수도사들의 수도생활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유혹의 목록을 8개로 만들었습니다. 탐식, 불순(정욕), 탐리(탐욕), 슬픔(우울), 분노, 게으름(나태), 자만심(허영), 교만입니다. 이후 교황 그레고리우스(540-604)는 이것을 수도사들을 넘어 일상을 사는 성도들 모두에게 적용하여 ‘7대죄’로 정리했습니다. 교만이라는 뿌리에서 시작하여(뿌리는 제외하고), 자만심(허영), 시기, 분노, 우울(나태가 여기 포함), 탐욕, 탐식, 정욕입니다.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목록을 그래도 수용하고 대죄와 소죄의 구분을 결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지난 100년 어간에 이 죄의 목록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허영의 자리를 교만이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죄] 시리즈에서 모두 8개의 죄를 다룰 것입니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허영.
소위 이 7대죄는 사실 본의 아니게 짓는 죄들입니다. 플랜팅가는 “7대죄는 사람이 거의 통제할 수 없는, 혹은 때와 장소에 따라 통제의 수준이 일정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욕구와 믿음과 태도다. 그래서 이 죄와 맞서 싸우는 사람은 익숙한 패배, 약간의 발전, 퇴보, 고통스럽게 정복당하는 것, 상처뿐인 승리, 깨어진 협정, 굴욕 스러운 타협 등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이 지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죄들의 정체를 알기만 하면,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와 함께 패배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 싸움을 싸우는 신자는 외부의 간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는 자리입니다.


4. 죄를 이기는 은혜
기독교 신앙에서 죄와 은혜는 뗄려야 뗄 수 없이 깊이 연결된 주제입니다. 바울 사도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합니다(롬 5:20b). 교리에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죄에게 패배함으로써 우리의 패배를 덮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에 감격하고, 때로는 죄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사실, 우리는 승리함으로써 보다 패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합니다. 이렇게 죄와 은혜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읽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존 파이퍼와 몇 사람이 쓴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에 나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단란했던 조의 결혼생활은 아내 해나의 거듭되는 불륜으로 악몽으로 변합니다. 아내는 남편과 두 자녀를 팽개치고 떠났고 조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돌아오게 된다면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하겠다고 하나님께 다짐합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습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오후, 단정치 못한 차림에 자포자기한 듯한 어느 여자가 공공 음수대에서 물을 절박하게 빨아들이는 모습이 조의 눈에 들어옵니다. 조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해나…당신이에요?” 자기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했고 온 가정을 고통스럽게 한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누가 알아보기라도 할까 두려운 듯 불편한 시선을 보냅니다. 그녀는 작은 것을 얻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좋은 남편의 공급과 안전과 친밀함을 내팽개치고 잠깐의 쾌락에 자기 몸을 맡기는 선택을 했습니다. 멋져 보이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뭘해요?”라고 묻는 조에게 해나가 대답합니다. “달리 갈 데가 없어서요. 그 사람한테서 도망쳐야 했어요… 피곤하고 무섭고 목이 말라요.”
“집으로 가요. 필요한 건 뭐든 내가 챙겨줄게요. 내가 당신을 보호해줄게요. 다시는 목마를 일이 없을거에요.”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조를 올려다 보는 그녀는 당황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조의 얼굴의 미소는 처음 데이트 때 보았던 것과 비할 수 없는 더 깊고 정제되고 든든한 미소였습니다. 조는 “사랑해요, 여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과 귀에 들리는 소리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몰라요…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아뇨, 알아요. 그 남자들을 다 알아요. 지금 당신 아파트에 사는 남자와 그전에 있었던 여섯 명도요. 그 사람들 이름도 다 알죠. 여보, 이제 집으로 갑시다.”
“싫어요. 당신은 몰라요. 저는 자격이 없어요.”
“여보, 당신이 자격이 있어서 사랑한 게 아니에요. 당신이 내 아내라서 사랑했소. 당신이 집을 나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당신을 정의와 공평으로 대할 거에요. 당신이 우리의 사랑과 가족을 떠났다고 해도 나는 당신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 줄 거에요. 당신이 우리의 서약을 더럽히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도 나는 당신과 맺은 결혼에 신실할 거에요.”
선지자 호세아의 메시지를 현대적으로 패러디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쓴 마셜 시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해나다. 그리고 우리의 일곱 정부(情夫)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이다. 배신을 당하고도 신실함을 잃지 않는 남편은 바로 예수님, 우리의 첫사랑이자 잃어버린 사랑, 우리의 새로운 사랑이시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로 맺은 언약에 영원히 신실하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시리즈를 들으시는 동안, 죄의 이야기가 바로 은혜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험하고 전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죄의 이야기가 은혜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고통스럽고 비참한 시간은 없을 것입니다.


5. 다시 갈망!
또 하나, 저는 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안에 거룩한 갈망이 더 깊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시작하면서, 죄는 유책성 있는 샬롬의 파괴 혹은 훼방이라는 플랜팅가의 정의를 소개했습니다. 죄는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죄가 우리에게서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복과 즐거움과 낭만과 여유는 죄로 인하여 두려움과 증오, 분노와 짜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이것들을 다시 갈망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플랜팅가의 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갈망하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닮기를 갈망하며 성령과 영적 성숙함을 갈망한다. 이 갈망은 시시때때로 그 강도가 약해지지만, 그럴 때면 이 사람은 다시 갈망하기를 갈망한다. 그의 행동 동기에는 신앙이 있다.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자기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퍼져 나오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잠잠한 확신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에만 매달린다. 믿음은 은혜를 아는 마음을 낳고 은혜를 아는 사람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을 섬기게 된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마음이 풍요롭다. 이 사람의 마음은 특히 감사로 흘러 넘치며 자기가 친절히 대접받은 만큼 남을 친절히 대접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갈망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삶, 더 안정적이고 더 편하고 안락한 삶을 갈망하십니까? 우리가 신자로서 정말 간절하고 절박하게 갈망해야 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갈망하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닮기를 갈망하며 성령과 영적 성숙함’을 갈망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 갈망이 없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죄를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 결코 우리를 더 거룩하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존 오웬은 말합니다. “사는 동안 항상 죄를 죽이라. 하루도 쉬지 말라.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인생에서 이 씨름을 하는 동안, 우리는 더 많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들은 우리 안에 있는 영적 즐거움과 기쁨들을 죽임으로써 자기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상태로 시작했을지라도,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로마서 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