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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의 영광과 긴장

에베소서 4:11-12, 고린도후서 4:1-2, 디모데전서 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0-24

말씀내용
우리는 아킵보가 골로새 교회의 책임 있는 직분자였다는 사실 외에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골로새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요, 감독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빌레몬에게 쓴 빌레몬서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아킵보는 복음을 위해 기꺼이 생명도 내어놓을 만한 사역자였으리라 짐작됩니다(몬 1:2). 빌레몬서의 문안 인사 부분에서 바울 사도가 빌레몬과 그의 아내 압비아에게 문안을 하고 이어서 아킵보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아킵보에 대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전부입니다. 이 내용과 함께, 골로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보아, 아킵보가 교회의 직분자였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직분이,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를 가리키는지, 다스리는 장로를 말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므로, 단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그가 직분자였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여기서 우리는 직분에 관한 주의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1. 직분에 대한 오해 (딤전 3:1)
직분이라는 말처럼 오늘날 교회에서 오해되고 오용되는 개념도 없습니다. 직분을 계급이나 벼슬로 이해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성경은 직분을 계급이나 벼슬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의 세 직분 사이에는 높고 낮음의 서열이 없고 모두 동등합니다. 집사가 승진하면 장로가 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세 직분이 동등하다는 것은 세 직분이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세 직분이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목사(직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직분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직분의 동등성과 중요성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데, 목사들이 지나치게 자신들을 높여왔던 관행도 스스로 주의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직분에 대한 오해는 또 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의 직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 직분들은 각각 하는 일, 구별된 직무가 있습니다.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직무를, 장로는 말씀으로써 성도들을 다스리는 직무를, 집사는 성도들의 육적, 경제적 필요를 돌보아 주의 말씀을 빛나게 하는 직무를 감당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2016년 10월에 [교회와 직분]이라는 주제로 전한 네 차례의 설교를 다시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직분의 개혁이 곧 교회의 개혁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맞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교회에 이 직분들을 주심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평안히 세워가게 하셨습니다. 이 직분을 맡은 분들이 직분에 맞는 직무를 잘 수행한다면, 교회는 평안한 가운데 자라갈 것입니다. 슬프게도 많은 경우, 직분이 계급이거나 유명무실한 타이틀이 되어 버리고 실제로 주 안에서 받은 직무를 삼가 이루는 일이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직분은 직무와 직위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무 보다 직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실을 봅니다. 이것은 의미 보다 형식을, 내용보다 껍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지만, 제사 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 더 와 닿을지 모르겠습니다. 직무 보다 직위에 관심을 갖는 것은 타락한 교회가 드러내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사도 바울이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디모데전서 3:1).”라고 했을 때, 그는 직위에 관심을 가지라는 게 아니라 ‘선한 일’ 곧 직무를 감당하기를 사모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직분에 대한 오해는 더 있습니다. 교인 투표를 통하여 직분자를 세우게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해입니다. 마치 민주주의의 제도인 투표를 통해 다수 표를 얻은 사람이 민의에 의해 직분자로 세워진다는 오해입니다. 이것은 직분을 받는 사람이나 투표를 하는 교인이나 모두가 직분을 오해하게 만드는 지점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직분자를 선출하는 투표는 백성 혹은 회원의 뜻을 묻는 것이라기 보다, 모든 회원이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이라는 전제에서, 각자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기쁘신 뜻이라고 여기는 것에 투표를 함으로써, 전체 교인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절차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투표는 형식은 구분되지 않아 보이지만, 민주주의의 방식을 100%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2. 주 안에서 받은 직분(벧전 2:9; 엡 4:7-8; 11-12; 행 11:28; 21:10; 딛 1:5-9; 딤전 3:1-13)
아주 간단하게 직분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짚어봤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직분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직분이라는 말은 대부분, ‘섬김, 봉사, 사역, 직무’를 의미하는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이 말에서 집사를 의미하는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분’을 다 집사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또 직분이 섬김이라는 의미이므로 모든 성도가 다 직분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모든 성도는 다 왕 같은 제사장인 직분자들입니다(벧전 2:9). 하지만 모두가 다 목사이고 장로이며 집사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신약 교회에 목사, 장로, 집사의 세 직분을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은 이런 직분을 승천하신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엡 4:7-8). 교회가 교회답게 운영되고 자라라고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주님의 선물이 부족할 리가 없으니, 사실상 교회는 이 세 직분만 바르게 세워지고 역할을 감당한다면 충분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은 주님이 주신 직분이 가지는 목적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에베소서 4:11–12).” 아마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읽을 때, “여기는 직분이 다섯 개가 아닌가?”하면서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드리지요. 여기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는 교회의 태생기에 한시적으로 주어졌던 직분들입니다. 이것들을 특정 시기에 존재하는 직분이라는 의미에서 특정직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세웠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는 사도들을 도와 복음서를 기록하거나 한 사람들, 즉 마가나 누가와 같은 이들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말하는 사람들로 사도들의 시대에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에 아가보와 같은 사람입니다(행 11:28; 21:10). 그러면 목사와 교사가 남게 되는데, 이는 모든 시대에 교회에 항상 존재하는 직분이라는 점에서 항존직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도 목사와 교사가 두 직분을 가리키는지, 한 직분을 가르키는지는 이견이 있습니다. 여기서 교사라는 것은 주일학교 교사를 가리키는 말은 적어도 아닙니다. 주일학교 개념은 근대 이후에나 생겼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신학교 교수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신학교도 사실상 후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은 떨어집니다. 그래서 이것은 ‘목사-교사’라는 한 직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목사 직분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타당합니다. 물론 에베소서 4장이 직분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디도서 1:5-9과 디모데전서 3:1-13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에 항존직으로 목사, 장로, 집사의 세 직분이 있음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에베소서 4장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에 직분을 선물로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읽은 에베서소 4:11-12은 그 목적이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밝힙니다. 직분자들은 이 목적을 언제나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은 목사가 바른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함으로써, 장로가 심방을 통해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도움으로써, 그리고 집사가 경제적 문제들이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일을 막지 않도록 살피고 도움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온전하게 되어갈 때, 그들은 바르게 교회를 섬기고 봉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은 직분자들이 아니라, 직분자들의 섬김을 통해 온전하게 된 모든 성도들이 하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 모든 직분자가 주님이 주신 직분,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직무를 감당할 때, 교회는 평안히 세워져 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킵보를 향해,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는 말씀도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직분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게 아닙니다. 주 안에서 받은 것이고 주님이 맡겨주신 직분입니다. 이것을 알 때, 직분자는 주의 뜻대로 합당하게 그 직무를 감당함으로써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3. 장로의 직분(벧전 5:1-4; 요이 1; 요삼 1; 행 14:23; 딛 1:5; 행 20:28; 딤전 5:17; 딛 1:9)
우리 교회는 지난 4월에 피택된 김태호 집사님을 오늘 안수하여 교회의 장로로 세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세우시는 분이 주님이시며, 이 직분이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선물로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장로 임직에 앞서, 교회의 직분 중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장로 직분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장로는 구약시대부터 존재했습니다(출 3:16-18; 4:29-31). 그들은 다스리고 재판을 수행했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출 12:21). 신약 교회의 장로 직분은 구약 시대와의 연속성을 가지고 주어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이 직접 세우신 사도였지만, 스스로를 장로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벧전 5:1; 요이 1; 요삼 1).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로서의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한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장로 직분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뒤에 회중이 장로를 택하여 세우게 했으며(행 14:23), 장로를 세울 목적으로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두기도 했습니다(딛 1:5). 또한 밀레도에서 만난 에베소 장로들을 향해 바울 사도는 장로 직분은 “성령이…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한 직분이라고 말합니다(사도행전 20:28).” 이점에서 장로는 디모데전서 3장에서 언급한 감독 직분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라이트풋(J. B. Lightfoot)은 초기 교회가 유대지역에서는 장로로, 그외 지역에서는 감독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회의 감독자의 역할을 하는 직분이기에, 책임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권면했습니다(행 20:28). 오늘 본문에서 아킵보에게 주어지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달리, 다스리는 장로(ruling elder) 직분의 본질은 다스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디모데전서 5:17).”고 썼을 때, 그는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가르치는 장로)을 구분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말하는 장로의 자격 요건들은 모두 다스리기 위한 조건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장에서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말씀도 다 다스리는 태도와 관련된 말씀들입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베드로전서 5:1–4).”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장로가 교회를 다스릴 때, 그의 손에 들린 도구는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베드로전서 5:2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장로 직분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도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디도서 1:9).” 장로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할 이유는, 그 말씀, 곧 바른 교훈으로 성도들을 권면하고 때로는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권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장로가 말씀으로 다스린다 함은, 교회의 행정과 권징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운영, 시행되는지 관리 감독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성도들이 선포된 말씀대로 잘 살고 있는지 성도들을 심방하며 살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 장로는 말씀의 원리에 정통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무거운 장로 직분을 잘 감당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을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베드로전서 5:4).” 직분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4. 삼가 지키는 일—긴장 (고후 4:1-2; 딤전 1:12)
장로의 직분에 영광이 있는 만큼, 여기에는 긴장이 존재합니다. 저는 디모데전서 3장에서 감독 직분의 자격을 읽을 때마다, 아니 주의 모든 말씀을 대할 때마다 제가 목사의 자격이 없다고 느낍니다. 한편, 직분자로서 저의 두려움은 이 긴장이 어느 순간에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평생 이 싸움을 해야할 것입니다. 아무도 자격이 충분해서 직분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는 자기가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이 자기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주의 긍휼하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고린도후서 4:1).” 하나님이 맡기시는 직분과 그 직분을 받는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이런 긴장이 존재합니다. 이 긴장이 세월이라는 익숙함 속에 녹아 없어지는 것이 위기입니다. 긴장이 사라진다는 것은 은혜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저 뿐이 아닙니다. 저와 함께 목사의 직분으로 교회를 섬기는 서 목사님과 오늘 장로의 직분을 받게 되는 김태호 집사님이 다 긍휼하심을 입어 직분을 주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집사와 권사로 임직한 분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자들은 이 긴장 속에서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실력이 모자라니 늘 두렵습니다. 하지만 여기 은혜의 약속이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디모데전서 1:12).” 직분을 맡기시는 주님은 감당할 능력도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감히 목사와 장로와 집사로 섬기겠습니까? 직분이 동등하다면, 나는 집사나 권사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직분을 받았지만, 은혜로운 약속이 있기에, 이 긴장 속에서 직분을 감당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직분을 맡은 자에게 요구하시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신실함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린도전서 4:2).” 만일 주님이 나를 긍휼히 보시고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충성은 필연 따라올 것입니다. 어찌 충성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비로소 오늘 본문에서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말에 ‘삼가’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는 ‘주의하여 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성취하도록 신중하게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은혜로 직분자가 직분을 능히 감당할 힘을 주시겠지만, 직분자는 자신이 충성과 신실함으로 이 영광의 직분을 주의 뜻을 따라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 늘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살펴보지 않으면서 성도들을 다스리고 살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이 긴장 속에서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교인이 직분자를 대하여 (벧전 5:5; 딤전 5:17)
마치기 전에, 모든 교우들이 세움을 받는 장로 직분을 삼가 이루도록 하기 위해 들어야 할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회중의 존경과 사랑이 없이는 장로 직분을 삼가 이룰 수 없습니다. 물론 존경과 사랑 없이도 장로의 직무를 수행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들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장로의 다스림과 그의 권면에 순종해야 하는데, 존경과 사랑이 없이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젊은 자들로 대표되는 교회의 회중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 5:5).” 바울 사도도 동일한 권면을 줍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디모데전서 5:17).” 이것은 모두 주님 자신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은 주님의 이 말씀을 순종하면서 또한,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직분자들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에게 “(너희는)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골로새서 4:17).”고 말하십시오.
이것을 아십시오. 주님은 우리들 가운데 가장 똑똑한 사람을 목사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 가운데 가장 믿음이 좋고 성실한 사람을 장로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집사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내가 목사보다 똑똑하고, 내가 장로보다 성실하고, 집사 보다 지혜롭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께서 세우신 직분을 존중하십시오. 그리고 주의 말씀대로 마땅한 존경과 사랑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직분자는 영광스러움과 긴장 속에서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세워가는 길입니다.


6. 교훈과 적용 (행 6:1-7)
이 설교를 마치면, 우리는 장로 임직식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선물을 받을 생각에 제 마음은 기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 급성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고 서로 물질을 나누는 깊은 코이노니아가 있었고, 마음을 같이 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행 2:42-47). 제자의 수가 많아졌지만, 이것은 일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문제도 터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위선자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구제를 받는 과부들 가운데 원망과 불평이 교회를 어렵게 했습니다. 사도들은 교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사도행전 6:2–4).” 이것은 정말 지혜로운 판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지혜로써 자신들이 가진 말씀의 직분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지혜로웠던 것은 사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온 교회가 이 제안을 기뻐했습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사도행전 6:5–6).” 그래서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7명을 선택했고 사도들은 선택된 이들을 안수하여 이들에게 구제의 사역을 맡겼습니다. 이들이 맡은 직무가 구제의 사역이었기에, 이들을 보통 일곱 집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택된 일곱 사람의 이름을 보면 그들은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로 보입니다. 이곳은 본토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지배적인 예루살렘 교회인데 말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출신의 본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 후에 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사도행전 6:7).”
사도들이 주 안에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말씀의 직분을 집중하여 감당하게 되었고, 집사들이 집사 고유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고 제자의 수는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복음에 복종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장로 직분을 받으시는 분이나 이미 집사와 권사와 목사로 직분을 받은 분들에게 직분을 주신 주님의 권위로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성취하도록 늘 자기 자신을 신중하게 살펴보십시오.” 교회의 직분자들이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직분자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복된 역사를 벧샬롬교회에서도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 그런 은혜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