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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 (3B).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 B

히브리서 11:38a, 히브리서 11:9-16, 히브리서 11:32-4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10-10

말씀내용
지난 주일에 이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더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 믿음의 첫번째 본질은 모세의 삶에서 보듯이 상 주심을 바라보는 믿음이라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그 믿음의 본질, 두번째와 세번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나그네로 사는 믿음 (히 11:9-10,13-15; 창 23:4; 고후 5:1; 히 12:28; 계 21; 빌 3:20)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는 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가지는 믿음의 본질, 두번째는 이 땅을 나그네로 살게 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나그네로 산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13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브리서 11:13).”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외국인’은 말 그대로 외국인입니다.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말입니다. 극진한 환대를 받는 손님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낯선 곳, 낯선 문화, 낯선 언어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외국인입니다. 또 ‘나그네’는 임시 거류자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단기 비자를 받고 일정 기간을 체류하는 외국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1년, 인도네시아로 가서 만 4년 간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신학교 교수 비자는 1년 거주 비자인데, 해마다 갱신해야 했습니다. 갱신할 때마다 애를 먹여서 1년 짜리 비자를 얻는데 3개월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비자를 기다리며 싱가폴 한인교회의 교육관 한 켠에 부속된 방에서 한 살, 두 살 짜리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살이를 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것은 외국인 생활 중에서 겪은 거류민 생활이었습니다. 또 미국에서 만 12년간 나그네로도 살아보았습니다. 물리적 환경이야 인도네시아와 비교할 수 없지만, 미국에서 외국인이자 소수 인종, 특별히 동양인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물론 합법적 비자를 갖지 않은 ‘서류미비자’로 살아가는 분들이나 영주권을 얻기 위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살아가는 분들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나라, 자기 고향을 떠나서 산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비자 연장의 어려움, 외국인이기에 당할 수도 있는 각종 불이익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어디를 가든지 쉽게 만날 수 있는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소수의 주재원은 물론 원어민 교사, 유학생, 노동자, 그리고 최근에는 정치적 난민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외국인이며 나그네입니다.
히브리서 11:13에서, “이 사람들은…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고 한 말씀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과 야곱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9절입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브리서 11:9).”
여기서 ‘거류하여’라는 단어는 ‘더부살이를 한다’는 뉘앙스를 가지는 말입니다. 아마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쓸 때,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고 매장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헷 족속과 협상을 했던 일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23:4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세기 23:4).” 아브라함이 헷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로부터 아내의 매장지로 막벨라 굴을 매입하게 됩니다.
또 아브라함이 이삭,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는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 말은 외국인과 나그네로서의 아브라함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삶의 양식입니다. 이 말씀은 어쩌다 보니 아브라함 일가가 가나안에서 벌인 사업에 실패를 하게 되어 정착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윌리암 레인(William Lane)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장막에 거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문화 속에서 영구적인 정착을 이루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 아니었습니까? 그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브라함은 이렇게 불편을 감수하면서 장막에 거하였을까요? 9절의 시작에 그 답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기로 선택했고 결정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세상의 게임의 법칙으로 살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육신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장막 집에 거한다’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고후 5:1). 신자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가기 전에 잠시 임시 거처에 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10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브리서 11:10).”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이 놀랍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이 가나안이었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지만, 그는 가나안이 영원한 기업의 그림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그것을 기대했습니다. 그가 기대했던 성을 히브리서 기자는 12장에서 ‘흔들리지 않는 나라’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브리서 12:28).”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보았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계 21). 세상에 모든 것은 흔들리고 망하는 것들 뿐입니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역사의 제국들이 다 망했습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나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는 믿음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기꺼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장막에 거하며 살아가게 했습니다. 14절도 이것을 부연합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브리서 11:14).”
“나는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산다”고 고백하고 인정함으로써, 아브라함은 나그네의 정체성 즉, 자기가 찾고 기다리는, 가야 할 본향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바란 것은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히 11:15). 아브라함은 말로만이 아니라,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장막에 사는 삶의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이 땅에서 나그네의 정체성을 증언하며 보여주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 나아가서 사라와 이삭, 야곱의 믿음을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보여주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게 합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은 불편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불편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외국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이 땅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 제1조는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천명하지 않습니까? 신자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립보서 3:20).” 여러분이 성령으로 거듭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여러분의 우선적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잠시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나그네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성경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큰 음녀요 큰 성 바벨론인 세상에 순응하면서 슬기롭게 사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문화를 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세상이고, 온갖 것으로 믿음을 타협하고 저버리도록 성도들을 유혹하는 허영의 시장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레인의 말대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사회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토머스 슈라이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주류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 이방인, 그리고 자주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히브리서가 쓰여지던 당시에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사회의 주류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욕을 먹고 차별을 당했다. 그보다 더한 고난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 소유가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누리고 싶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시고 하늘 도성으로 데려가실 것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촉구한다.”
이 일은 결심과 각오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이렇게 살게 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늘 본향을 바라보는 믿음이 이 땅을 나그네의 정체성으로 살게 합니다. 조금만 타협하고 순응하면 바벨론에서 성공하여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잘 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신자들은 믿음으로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사람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들은 장막에 거하는 삶의 방식으로 이 땅에서 자신들의 나그네 정체성을 증언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식이 여러분의 정체성을 바깥 세상에 증거하고 보여준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이 말은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인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복음과 믿음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신자는 삶의 방식을 통해 세상이 볼 수 있도록 가시적 삶의 형태로 우리의 나그네 정체성을 세상 앞에 증언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2.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히 11:32-40; 단 3,6; 딤후 1:8b)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의 믿음의 본질, 그 세번째이자 마지막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이 요소를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과 요게벳, 또는 모세 자신이나 라합에게서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여러분을 히브리서 11장 32-40절에 기록된 바, 믿음으로 살았던 무명의 사람들에게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구약 인물들의 이야기를 죽 열거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독자들을 히브리서 11장의 절정으로 데리고 갑니다. 33-38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브리서 11:33–38).”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는 말에서(33) 우리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기도 시간과 방식을 타협하지 않고 사자굴로 들어간 다니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단 6).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라는 말에서는(34) 바벨론 제국의 절대 통치자 느부갓네살 앞에서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하다가 7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에 들어갔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생각하게 됩니다(단 3).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35)”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감금과 고문으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등지기를 거절했다는 말입니다. 즉 그들은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해서 복음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삶이기도 하지만, 교회 역사 속에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에게는 바로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요,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6,37).” 유대 전승에 의하면,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한 사람은 이사야 선지자였습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히브리서 기자는 참지 못하고 가슴으로부터 탄성을 터뜨립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38).”
다시 토머스 슈라이너의 말입니다. “믿음은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할 만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믿음은 위험을 감수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다. 인정을 받기 위해 사회나 문화를 바라보지 않는다.” 바울 사도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b).”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1세기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던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장래의 상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3. 교훈과 적용 (히 11:1,16)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 중 일신의 영달과 성공을 위해 산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믿음의 요소는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고, 이 땅에서 나그네의 정체성으로 살며, 고난 중에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2년째 지속되어온 코로나 팬데믹은 그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세대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 청년들 MZ 세대가 많이 힘들다고 합니다. 이들을 ‘N포 세대’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가진 절망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포기하는 대상은 연애, 결혼, 출산에서 시작해서 집과 경력을 넘어 희망/취미와 인간 관계까지 점점 확대되어 왔습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기독청년들에게 복음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또 여러분 모두에게 여러분의 삶의 정황에서 복음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만일 이 질문이,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그분의 은혜로, 좋은 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졸업 후에는 안정적이고 연봉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멋진 결혼도 하여 평수 넓은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할 수 있나요?” 라는 의미라면, 성경은 어떤 답도 줄 수 없습니다. 질문이 틀린 것입니다. 이 질문은 이 세상의 게임의 법칙을 따라 이 세상의 게임에서 승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좋은 대학이나 원하는 성적, 혹은 꿈의 직장이나 가정을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 영원한 나라를 약속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 현실을 천상의 시각으로 보면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다른 게임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고 약속하고 계시며 그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감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본향을 찾고 기다리는 나그네임을 세상 앞에 증거할 수 있는 것도 이 믿음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편안해 지는 것과 나그네 되는 것 사이의 실존적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실제로 2세기에 익명으로 쓰여진 문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의 나라들에서 살지만 단지 거주 외국인(protokoi)으로서 그럴뿐이다.” 제럴드 싯처는 초기 교회의 성도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들은 자기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산다. 시민으로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외국인으로서 모든 것을 견딘다. 모든 외국 땅이 이들의 조국이지만, 모든 조국이 이들에게는 외국 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나그네의 정체성으로 살면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 사람들을 위하여 약속대로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합니다(히 11:16).
우리가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땅에서 장막에 거하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가옥의 형태나 크기로 쉽게 판단될 수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 자체를 정죄하고 가난을 칭송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지금 여러분이 삶에서 가진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의 내용을 결정합니다. 그 목적이 말뿐이 아닌 진정한 목적이라면, 그것은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 세상에 보이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우리의 정체성을 세상에 증거하는 설득력 있는 수단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까?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할지 아시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 각자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점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할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구하십시오.
우리는 히브리서 11:1에서 말한 믿음의 본질을 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세상의 약속들에 좌우되어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게임의 법칙에 매인 삶입니다. 믿는 자들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천상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고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붙들고, 일견 답 없어 보이는 인생의 현실 속에서도 더 많이 사랑하고 인애를 베풀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주신 다른 게임의 법칙입니다. 전능하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게임의 법칙을 따라 온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믿음을 더하여 주시도록 은혜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