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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6A). 주님, 제가 신자입니다.

시편 86:1-17, 누가복음 18:10-14, 시편 90:14-1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9-15

말씀내용
기도를 잘 하고 싶은 것은 모든 신자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들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랐기에 주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시자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b)”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소위 ‘주기도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솔직하고 깊게 소통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신자의 당연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한편 우리가 얼마나 기도 생활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사실, 시편은 신자가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편이자 풍성한 원천입니다. 시편은 인생이 겪는 다양한 경험들 그리고 그 속에서 드렸던 구약 성도들의 기도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모든 말씀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더욱 시편을 통해서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려고 엎드렸지만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시편을 읽으면서 시편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시편을 익숙하게 알고 이해하는 것은 여러분의 기도 생활을 더욱 풍성하고 깊게 해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제3권에 나오는 유일한 다윗의 시편(기도)인 86편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의 교훈적 기도의 모범이라고 리처드 필립스는 말합니다. 왜 시편 86편이 기도의 모범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기도의 본질적 요소들을 균형 있고 깊이 있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1-7절의 내용입니다. 둘째로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알고 주목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8-13절입니다. 마지막이자 셋째는 신중함의 요소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특별히 14-17절에서 볼 것입니다. 두 차례에 나누어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1-7절입니다.


1. 겸비함, 상한 심령(1; 눅 18:10-14)
먼저 기도의 첫번째 요소입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의 처지를 바르게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전제입니다. 이것을 겸비함 그리고 상한 심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편 86:1).” 다윗은 백전백승의 장수였고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인정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고백은 형식적 인사치레가 아닙니다. 공동번역은 “불쌍하고 가련한 이 몸이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이 고백은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우심이 없이는 제 앞에 있는 어려움들을 하나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13-14절에 가서야 지금 다윗이 직면하는 상황을 조금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작년에 개봉되었고 아카데미상을 3개나 받았던 [1917]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차대전을 배경으로, 일개 대대 1600명의 사활이 걸려있는 메시지를 24시간 내에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두 영국 병사의 이야기입니다. 한 병사는 죽고 남은 병사가 임무를 완수하게 됩니다. 그들은 산전수전을 겪으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달리고 또 달립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노래가 기막히게 적절하게 흘러나옵니다. 자신의 생사를 마주하는 전장으로 가기 전 병사들이 부르는 노래인데, 이 전령들의 임무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오 나는 약한 나그네요”(I Am A Poor Wayfaring Stranger)입니다. 가사가 이러합니다.
(1절)
오 나는 약한 나그네요 이 슬픈 세상을 살며
수고도 병도 위험도 없는 내가 가는 저 밝은 곳
(후렴)
나는 가네 내 아버지께 더 이상 방황 없는 곳
나는 가네 십자가 앞에 주님 품에 돌아가네
(2절)
오 나는 약한 나그네요 애닯은 세상을 살며
비바람 불고 폭풍도 없는 내가 가는 저 밝은 곳
(3절)
오 나는 약한 나그네요 이 이짧은 세상을 살며
미움도 없고 괴롬도 없는 내가 가는 저 밝은 곳

저는 본문 1절을 묵상하면서 이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곳으로 가고 있는 약한 나그네입니다. 종종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합니다. 주의 도우심과 은혜가 없이는 이 슬픈 세상, 수고와 병과 위험이 난무하고, 비바람과 폭풍이 쉬지 않으며 미움과 괴로움이 가득한 곳을 결코 안전하게 지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기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신의 처지와 상황, 그리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가지지 않고서는 결코 기도하지 않으며, 진정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도 비유로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이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심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눅 18:10-14). 기도는 바리새인이 보여준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는 겸비함 그리고 상한 심령이 필요합니다.


2.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나—신자 (2)
그런데 2절에서 반전이라고 느껴질 만한 고백이 나옵니다. “나는 경건하오니”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1절의 겸비함을 버린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교만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이 고백은 다윗이 자기의 경건이나 의로움을 의지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2절 하반절에서 ‘주를 의지하는 종’이라고 자신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경건하오니’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 [주님 제가 신자입니다]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경건하다는 히브리 말은 ‘하시드’인데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일컫는 단어 ‘헤세드’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번역성경들은 ‘경건하다’고 번역하는 것 외에도, ‘신실하다(faithful)’고 많이 번역을 했습니다(NIV, NLT, 새번역, 우리말성경).
주전 2세기에는 유대교와 유대인들이 심각한 헬라화(세속화)의 위협 속에서 살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세속을 멀리하고 엄격한 율법주의를 표명하고 메시아를 대망하는 그룹이 일어났는데, 이들의 이름이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시드’의 복수형입니다. 이들에게서 나중에 바리새인과 에세네파가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시딤의 경우, 이 단어는 다윗이 썼던 의미라기 보다는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자신들의 종교적 의로움을 의식하는 측면이 점점 더 강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어쨌든 다윗은 이 고백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고백으로서 자신과 하나님을 언약의 관계 속에 묶을 뿐 아니라, 그 연합된 관계를 상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절과 함께, 기도하는 자의 필수적인 자기 인식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사실 외에도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 속에 묶여 있는, 그리고 그 누구도,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주님, 제가 신자입니다”라고 여러분도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야 합니다. 또 다윗은 ‘주를 의지하는 종’이라고 자신을 부름으로써,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종과 주인의 관계로 다시 한 번 묶고 있습니다. 이런 언약 관계에 근거한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인식, 그래서 이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인식이 없다면 신자는 확신 가운데서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자신이 죄악 가운데 넘어져 있을 때에라도,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자신의 행위의 당당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맺어주신 은혜의 언약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3. 기쁨을 구함 (3-4; 90:14-15; 51:12)
3절에서 다윗이 은혜를 구하되, 종일 주께 부르짖는다고 하는 말은 그 상황이 절박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윗은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구합니다(4). 여러분은 이런 기도를 아십니까? 이런 기도를 드려 보셨습니까? 시편 90편은 시편에 유일한 모세의 기도인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시편 90:14–15).” 심지어 참회시로 유명한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편 51:12).”
많은 성도들의 사랑을 받는 찬송,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484장)는 그 곡조와 가사가 고대 아일랜드에서부터 내려오는 찬송인데, 4절 가사가 이러합니다.
영원한 주님 내 승리의 주 하늘의 기쁨을
주옵소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만유의 주여 소망되소서
왜 이들은 그토록 마음을 쏟아 기쁨을 구했을까요? 기쁨이 신자의 바로미터라는 사실을 알았고, 기쁨이 신자의 모든 선한 능력의 원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풀러가 말하듯이, 기쁨은 신자의 믿음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절박한 상황에서 그저 건져주시기만을 구하지 않고 기쁨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기쁨을 구할 수 있었던 두 가지 근거가 이 기도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A. ‘주를 우러러보오니’(4a, 11; 약 1:7-8; 마 6:22-23)
첫째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기 때문입니다. 4절은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라고 말하고 “(그러니)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사실 이 표현에는 이 기도 시 전체에서 강조되는, ‘나뉘지 않은 마음, 전심으로, 일심으로’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시편 86편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 시편의 중심 구절은 11절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편 86:11).”
여기서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는 말, 특히 ‘일심으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나뉘지 않은 마음입니다. 성경은 신자들의 삶과 경건에서 이 요소를 크게 강조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8).” 기도를 하면서도 이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는 가운데 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심리적으로도 그러하고 영적으로는 물론입니다. 그래서 그 앞 절에서 먼저 말씀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야고보서 1:7).”
또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을 교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태복음 6:22–23).” 여기서 마음을 눈에 비유하셨는데, ‘(눈이) 성하다’는 말은 ‘순전하다, 둘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착시 현상처럼 마음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보고 있다면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 아무 것도 얻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나뉘지 않은 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렇게 주님을 우러르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확신으로 기쁨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성품(5; 34:8; 57:2)
둘째로, 다윗이 기쁨을 달라고 구하는 근거는 5절에서 말하는 바,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편 86:5).”
다윗은 우리가 알다시피 자신의 생애에서 특히 사울에게 쫓기던 젊은 날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맛보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시 34:8).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웠고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5절은 15절과 함께 출애굽기 34:6-7에 근거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성경으로도 알고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 함께 할 때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다윗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시 34:8).
다윗은 먼저 ‘주는 선하사’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배우고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첫번째 고백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시 57:2).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지식은 기도하는 자에게 얼마나 큰 확신을 주는 요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편 86편의 기도의 두번째 요소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8-13절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다윗의 두번째 고백은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계시는(ready to forgive)’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단 한 번 여기서만 사용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 하면, 오직 언약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합니다. 신자가 기도에서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은 구원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심, 그리고 은혜와 자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를 드릴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격려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 성품을 아는 우리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도우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확신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들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알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유익이 되겠습니까? 또 믿음으로 산다는 것,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함이 후하다고 말합니다.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말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여기 ‘인자함’은 언약의 사랑 헤세드입니다. 모라자는 헤세드가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는 후하고 가득 넘치는 사랑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궁핍하여 완전히 고갈될 수 있는 빈약한 창고에서 자비를 베푸시지 않고 풍요로움에서 무한한 자비의 부요함을 부어 주신다. 그의 선하심은 기도하는 자들과 경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향해 넘쳐흐르는 시내로 흘러나온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어, 자신에게 기쁨을 달라고 구합니다. 삼위 하나님은 영원히 기쁨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기쁨을 부어주시려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신 분이시니,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뜻을 따라,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우리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기도는 그것을 구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4. 교훈과 적용 (6-7, 17; 51:17; 전 10:19; 요 15:11; 17:13)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윗은 제일 먼저 자신의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를 고백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신자임을 담대히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단지 이 위험의 상황에서 건져주시기만을 구하는 대신 그는 자신에게서 어느 새 사라져버린 기쁨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6-7절에서는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피력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편 86:6–7).”
이런 확신은 어디선가 아무 근거없이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드러난, 확신의 근거는 다윗이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바르게 인식했고 인정한 데서 기인합니다. 그는 범죄함으로 넘어지기도 하는 연약하고 가련한 인생이지만,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 그리고 신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만일 그가 1절의 고백만으로 자신을 알았다면, 그는 확신과 담대함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자—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했고 확신 속에서 기쁨을 구하게 한 것입니다. 17절에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한 것도 다윗의 기도가 이런 확신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신자—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이기 때문에 나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원수들도 보고 부끄러워할 수 있도록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달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보지요. 기도의 첫번째 중요한 요소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겸비함과 담대함의 요소가 함께 있습니다. 먼저 겸비함은 상한 심령과 통합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상한 심령’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말로만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존 번연은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하여, The Acceptable Sacrifice : The Excellency of a broken heart (한국어 번역본은, 이태복 역,『상한 심령으로 서라』지평서원)을 썼습니다. 이 제목에서 존 번연이 말했듯이, 상한 심령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탁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그 영혼을 하늘의 기쁨으로 다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행하신 첫번째 표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일이라고 소개합니다. 왜 주님은 허구 많은 일 중에서 물을 술(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표적을 행하셨을까요?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첫번째 표적은 메시아가 오신 목적을 보여준 것입니다. 주님은 기쁨이 떨어져버린 인간 세상에 오셔서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전도서의 말씀대로,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전 10:19). 그래서 주님은 친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11).”라고 말씀하기도 하셨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3).”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기쁨은 신자의 삶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돈이 쇠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영원히 누리시는 그 기쁨, 하늘의 기쁨이라고 표현한 그 기쁨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구했습니다. 우리도 그 기쁨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돈이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쁨이 아닌가요? 주님은 이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성육신하여 이 땅에 가난하고 궁핌한 우리들에게로 찾아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기쁨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기쁨을 사라지게 한 죄악들을 자백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상한 마음이고 겸비함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이 신자임을 기억하고 주장하십시오. 여러분이 언약관계 안에 있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에 기쁨을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가 깊이 하나님과 소통하고 마음을 정직하게 쏟아 내기를 원하십니까? 겸비함과 상한 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제가 신자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주장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며 용서할 준비를 하고 계시고 인자함이 후하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하셨다면, 이제 여러분은 자신이 겪는 환난에서 건져 주실 뿐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을 기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멸시치 않으시고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다음 수요기도회에서 시편 86편의 남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