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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 (1). 게임체인저

골로새서 2:15, 마가복음 12:29-31, 로마서 14:7-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9-05

말씀내용
지난 주일, 84회에 걸친 요한계시록 강해를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정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으셨습니까?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그 명령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까? 저는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작은 시리즈로 네 차례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게임체인저]입니다.
먼저 게임체인저라는 말을 모든 분들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게임체인저(Game Changer)’는 말 그대로 게임을 바꾸는(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가령, 축구경기에서 전반전에 3:0으로 지고 있다가 후반전에 교체 멤버로 들어온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3:4로 뒤집어 승리했을 때, 이 사람을 게임체인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을 넘어, 시장의 흐름을 통째로 바꾸거나 판도를 뒤집어 놓을 만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 사건, 서비스, 제품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 확장되어 사용됩니다. 그러니 경제, 경영, IT 분야를 망라한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셈이지요. 특히 경영 분야에서는 기존의 시장에 충격을 가할 정도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그 예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구글의 창업자 래리 페이지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스마트폰 없이 생활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고, 페이스북과 같은 SNS가 우리 세상에 가져온 변화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구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전과 그 후의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변화시킨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게임체인저라고 불립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독보적이고 유일한 게임체인저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이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기에 조심스럽습니마는,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의 짧은 삶을 사셨고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아 죽으셨지만, 온 세상을 뒤집어 놓으시는 게임체인저가 되셨습니다. 형식이기는 하지만, 세상 역사가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주님의 해)로 구분되는 것을 통해서도 보여지지 않습니까? 우리말로는 주전(主前)과 주후(主後)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 예수님이 게임체인저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이런 형식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깊은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서의 복음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에서 독보적이고 유일한 게임체인저가 되셨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예수님께서 주신 다른 게임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이 시리즈를 통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1.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복음
복음은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일종의 메타내러티브 혹은 거대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타내러티브 혹은 거대서사라는 말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인간 역사의 의미와 운명을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사회는 보편적 가치를 뒤로 하고 개별성과 특수성이 만들어내는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보편성을 전제하는 거대서사를 부정하는 경향이 농후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더 복음을 거대서사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은 우리 개인의 인생사에 도움이 되는 충고가 아닙니다. 복음은 너희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다면 열심히 이렇게 살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복음은 인류가 처한 보편의 난제에 대한 설명이고 그 난제를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얼마 전, 제가 밴드에서 여러분과 공유한 팀 켈러 목사님의 설교영상에서 그가 언급한 내용입니다. 충고나 명령은 전쟁에서 지고 있는 왕이 “이제 너희가 살려면 목숨을 걸고 싸워라. 이 방법 밖에는 살 길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언은 전쟁을 이긴 왕이 “전쟁은 끝났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기쁨과 평화 속에서 너희의 삶을 살아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 갇혀서 하나님을 그저 자기 인생의 도우미 정도로 삼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특성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구원의 복된 선언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만나면, 그는 두려움과 염려와 초조함 속에서 살아가던 삶을 뒤로 하고 전에 알지 못하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게임체인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거대서사로 보느냐, 아니면 그저 나 개인의 삶의 이야기로 이해하느냐는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만일 복음을 개인의 이야기에 한정된 충고라고 이해한다면 당장 편하긴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내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당장의 해법을 제공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청년 세대에게 복음은 더 밝은 미래를 약속하고 제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그런 식의 즉각적인 문제 해결 방식을 넘어서는 근본적이고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거대서사로서의 복음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봅시다.


2. 세상의 게임의 법칙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게임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명문화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이든 미국이든, 아프리카나 중동의 어느 나라이든 그리고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작동하는 법칙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류는 나라와 민족, 피부색과 언어, 그리고 문화는 다를지라도 동일한 게임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게임의 법칙은 근본적으로 자기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게임은 경쟁을 유발하고 결국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냅니다. 역사의 이상주의자들은 인류가 이런 게임을 떠나, 경쟁하지 않고 모두가 더불어 평등한 사회를 꿈꾸기도 했지만, 그 꿈이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르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경쟁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좋은 성적, 좋은 대학, 높은 연봉, 멋진 결혼식, 괜찮은 평수에서 신혼 시작하기, 멋진 차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은퇴 플랜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일평생 경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이런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신자들이 더 잘 살아가도록 도움을 줍니까?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라면 복음은 그다지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믿는 자에게 좋은 대학, 높은 연봉의 직장, 멋진 가정, 소위 ‘성공적인’ 삶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죽어서 가는 천국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면, 이 복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 특히 좁아진 기회로 인해 암울한 시대적 환경에 서 있는 기독청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작금에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주택과 부동산 문제를 보십시오. 정부 정책의 실패는 부인할 수 없겠지만, 이것이 문제의 원인의 전부입니까? 인간의 만족할 수 없는 탐욕에 대해서는 누가 말하고 있습니까? 물론, 이건 어떤 정치인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정치는 인간의 탐욕을 전제한 채 법과 제도를 다루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 정치에 그리스도인이 목을 맬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모두가 불만입니다. 더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라도 자기 집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주택과 부동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전 영역이 다 이 경쟁의 게임 속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혹은 최소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세상의 게임의 법칙을 따라 살아갑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이런 세상이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삼위 안에 흘러 넘치는 영광—선하심과 사랑—을 부어주시려고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이 가르쳐주듯이,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창조 목적을 따라 살 때, 최고의 행복을 경험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이 서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거듭 말씀하셨던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이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기 판단을 따라 살기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베풀어주신 모든 것들이 인간을 대적하게 되었고, 인간은 서로 간에도 소외와 갈등을 지니고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첫 조상 이래, 모든 인간은 죄의 유전인자(DNA)를 안고 태어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인 우상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고 추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인간이 오직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그룹(가족, 민족, 국가 등)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자연을 끊임 없이 파괴하는 저주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때까지 말입니다. 슬픈 것은, 이런 게임의 법칙과 운명을 바꾸어줄 수 있는 어떤 난세(亂世)의 영웅, 게임체인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노예로, 하나님의 정죄의 대상으로 이 게임의 법칙에 묶여 살아갑니다. 이것이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처해있는 죄인의 딜레마입니다.


3. 게임체인저, 예수 그리스도 (막 1;15; 시 2:12)
이런 세상에서 판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게임체인저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완전한 사람이 되셨고, 또한 죄가 없으셔야 했기에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다는 선포요, 천지개벽의 선언입니다. 이 일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로새서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이라는 말은 다양하게 사용된 용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단순히어떤 정치 제도나 세상 구조만을 가리키기 보다 악한 권세, 즉 요한계시록에서 읽은 사탄과 짐승의 권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국가, 경제, 미디어, 이념, 제도들은 사실 우주적 권세를 가진 마귀가 이용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단순히 도구들만을 무력화하신 것이 아니라, 그 머리인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꺾으사 그들을 완전히 무장해제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라는 말은 로마의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무장해제시킨 적장과 원수들을 줄지어 묶어서 끌고 가는 모습에 비유한 표현입니다. 이 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제 충성의 대상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맞추어 충성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시 2:12). 계속해서 이전에 살던 세상의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살다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더 이상 그 전에 살던 방식대로 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죄인 개개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새로운 시민권과 새로운 생활양식을 따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로써 이 새로운 백성을 낳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그 나라의 백성들은, 이전에 그들이 하고 살던 게임을 그치고 이제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승리를 성취하심으로써 마귀에게 묶여있는 세상의 판을 뒤집으셨습니다. 이것을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심판의 영원한 형벌인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게임체인저로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은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찬탈하고 ‘이 세상 임금’으로 행세하던 사탄을 멸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4.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 (롬 6:14; 8:1; 14:7-8)
그러나 문제는 그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시작되었지만 완성이 되기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그 나라가 어떻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은 재림하실 것이고, 그때 음녀 바벨론은 멸망당하고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이시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교회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지만 여전히 이 땅, 요한계시록이 음녀 바벨론이라고 묘사하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은, 황제 숭배와 짐승의 표를 받아야 먹고 살 수 있었던 1세기 말의 성도들처럼 외부적 압박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살아가는 곳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여전히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롬 12:2).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의 게임을 하며 세상의 게임의 법칙에 순응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깨어졌고,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과업이 되는 것입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무력화된 것은 결국 그것들이 완전한 멸망을 받을 것임을 보여주고 그것을 경축하는 곳이 또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거대서사로서의 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야기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인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계획이 주도하고 지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새로운 삶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삶의 모든 영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지 않고(롬 6:14) 정죄 아래서 살지 않을 자유를 얻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롬 8:1). 바울 사도는 그래서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 또는 교회의 전제를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7–8).


5. 그리스도인은 다른 게임을 하라고 부름을 받았다. (고후 5:7; 롬 8:35,37)
이제 정리를 좀 해보지요. 복음은 성공이라는 지상목표를 향하여 경쟁하는 세상 속에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몰두하는 그 ‘게임’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합니다. 말하자면, 거듭난 신자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비록 이 땅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이전에 하던 그 게임을 지속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게임체인저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회심 이전과 이후, 신자들은 여전히 그전에 살아가던 그 그라운드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 그라운드에서 이전에 하던 그 게임을 계속 해야한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심지어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게임을 더 잘 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가지게 됩니다. 내게는 믿음이 있고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위 ‘고지점령론’같은 비성경적인 주장들에 열광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의 고지(高地)에 올라 멋지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생각들을 승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이 세상의 게임의 법칙에 매여 이 세상의 게임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신자의 삶의 목적을 바꾸고 삶의 내용도 바꿉니다. 이전의 삶의 목적은 성공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음으로써가 아니라, 기꺼이 패자가 되고 약자가 되는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게임이 달라졌으니, 당연히 그리스도인을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도 바뀌었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 중첩된 시대를 살고 있고,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사이에서 살고 있지만, 신자는 눈에 보이는 그 게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인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믿음이라는 그 나라의 게임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고후 5:7). 그러니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는 그리스도인의 힘듦은 모두가 축구를 하는 경기장에서 럭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살아가는 위치가 이렇다 보니, 때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을 적당한 선에서 살아가려는 유혹을 받기가 쉽습니다. 적당히 심령이 가난하고, 적당히 최소한의 선에서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살아가자는 유혹 뿐 아니라, 심지어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무시를 당하면 당하고, 짓눌리면 짓눌림을 당하고, 바보나 이상한 사회부적응자로 여겨지면 기꺼이 그렇게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자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바,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의 모든 상황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 됩니다(롬 8:35,37). 그리스도께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기(골 2:15).”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이 세상의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승패의 기준을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주님은 진정하고 유일한 의미에서 이 세상의 게임체인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이 세상에서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게임체인저들이 되도록 말입니다.


6. 그리스도인은 게임체인저들이다. (막 12:29-31; 눅 6:38; 계 14:4)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세례를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게임과는 다른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이 세상의 게임의 법칙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게임의 법칙의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자기 신뢰가 아닌 하나님을 신뢰함이며, 경쟁 대신 사랑입니다. 가령, 주님이 주신 대계명은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더 이상 경쟁에서 싸워 살아남고 승자가 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제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게임의 법칙이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누가복음 6:38).”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세상은 이런 사람을 바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이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따라 다른 게임을 하는 자들로 살아가는데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곧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전에 하던 그 게임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는 것이며, 이전의 게임의 법칙이 아니라 다른 게임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여 구경거리로 삼으심”으로써 온 세상의 게임체인저가 되신 것처럼, 이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사람들(계 14:4)—이것은 얼마나 멋지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칭호입니까?—도 그들의 주를 따라 세상의 게임체인저들로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어떻게 그 새로운 게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살펴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