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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81). 신실하고 참된 말씀

요한계시록 22:6-9, 요한계시록 1:1-3, 디모데후서 3:14-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8-01

말씀내용
오늘부터 살펴볼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는 하나의 주제로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매우 산발적이라는 느낌이 들고, 많은 주제들을 단편적으로 다루기 때문이고 반복도 많습니다.


1. 에필로그의 특징(계 1:1-3)
그러나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이 에필로그가 프롤로그와 너무나 닮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22:6-7과 1:1-3만 비교해 보더라도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 1:1–3).”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22:6–7).”
두 말씀은 동일하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라고 계시의 주체를 분명히 합니다. 또 하나님의 종들에게 보이신 계시라는 언급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요한계시록의 독자인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 내용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되어질) 일’입니다. 또 복의 선언이 나옵니다. 1:3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선언하고, 22:7에서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선언합니다. 때의 임박함도 1:3에서는 ‘때가 가까움이라’는 말씀으로, 22:7에서는 “내가 속히 오리니”라는 말씀으로 강조합니다.
좀더 넓혀서 1:1-8과 22:6-21를 전체적으로 보면 더 많은 공통점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의식적으로 이 책을 시작한 방식으로 마무리하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들어가는 말과 나가는 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공히 강조하는 내용들은 사실, 요한계시록 전체의 강조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가 많은 강조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에필로그가 다루는 두드러진 두 가지 주제는 분명합니다. 첫째는 이 예언의 말씀의 진정성이고(6,8,16,18-19) 둘째는 재림의 임박성입니다(7,10,12,20). 특히 이 본문에서 주님은 세 번이나 속히 오리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2.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6,8; 21:5; 딤후 3:14-17; 시 19:7-9; 계 1:19)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마치면서 이 예언의 말씀이 얼마나 신실하고 참된 말씀인지를 처음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에필로그를 여는 6절을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라고 시작합니다. 신앙의 모든 것이 결국 여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요한이 전하는 이 메시지의 진정성, 즉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이고 이 말씀에는 조금의 오류도 없으며 이것은 신실하고 참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 메시지에 담긴 모든 권고와 명령과 교훈들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거기에 약속된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맞나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면, 그 사람이 이 메시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은 자명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이 동일합니다. 6절에서 요한이 ‘이 말은’이라고 할 때, 일차적으로는 앞에서 진술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을 가리킬 수 있으나(21:1-22:5), 21:5에서 그랬듯이, ‘이 말은’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메시지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2-3장), 하나님 보좌의 환상(4-5,7장)에 대한 말씀, 일곱 인과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 심판에 관한 모든 말씀입니다(6-16장). 그리고 교회를 대적하는 옛 뱀인 붉은 용 곧 사탄과, 그와 함께 악한 거짓 삼위일체를 형성하는 전제적 권력을 가진 짐승(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거짓 선지자(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한 말씀(12-14), 그리고 이들의 조종을 받는 음녀 큰 성 바벨론(17-18장)에 대한 말씀,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말씀(19장), 마지막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과 신천신지에 관한 말씀(20-22:5)이 모두 해당됩니다. 우리는 취사선택하여 믿을만한 하나님의 말씀과 아닌 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믿을 수 있고 믿을 만 하다는 뜻이고, 참되다는 것은 거짓이 없는 진리임을 의미합니다. 신실하고 참되다는 것은 사실 이 모든 계시의 원천이고 주체이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신실하고(1:5; 3:14; 19:11, ‘충성된’ 또는 ‘충신’으로 번역) 참되다(3:7,14; 19:11, ‘참된’으로도 번역)고 여러 차례 증거하였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성격은 다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은 믿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저는 종종 이런 문제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또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믿는다는 증거를 삶에서 조금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바울 사도는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15–17).”
바울 사도는 왜 이 말씀을 썼을까요? 말씀의 진정성에 대한 확신이 디모데의 목회를 좌우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바로 앞에서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a)”고 썼습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목회자요 설교자인 디모데에게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결국 사도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디모데야, 네가 목회를 하지만 네 목회를 좌우하는 것은 네 실력이나 네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임을 명심해라.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말씀을 설교하는 목사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디모데후서에서 말씀한 모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슬프게도 저는 이런 현실이 오늘날 강단에서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먼저 성경이 성경 자체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성경이 예수님과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내용, 즉 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내용은 어디서 연유합니까? 그 모든 것이 성경에서 연유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에,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R.C.스프로울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해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믿어야 하는 것이다…교회 역사를 시종일관하여 세상, 육신 그리고 마귀가 경건에 대해 가하는 궁극적 공격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한 공격이었다…성경의 권위는 어떤 인간이나 교회의 증언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성경의 궁극적 저자이신 하나님께 의존하고 근거한다…인간 이성의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부족함이 없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인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의 가슴 안에서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인 역사로 말미암는다. 이것이 내적 증거의 교리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의 가슴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가 없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완전히 설복당하거나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성령은 완고한 의지에 역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본성적인 반감을 극복하게 하신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녹여 이미 존재하는 객관적인 진리에 기꺼이 항복하게 하신다…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녹여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인 권위에 충분하게 설득되고 확신하게 하신다.”
자연인은 결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중생하게 하시면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게 됩니다. 성경이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믿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모든 반감들이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성경이 계시하는 성 삼위 하나님과 그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믿게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경험하셨습니까? 성경이 가지는 능력,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에게 일하시는 능력을 경험하셨습니까?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시편 19:7–9).”
여러분도 시편 기자와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셔서”라고 함으로써 이 말씀이 신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좀 더 부연합니다.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좀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벤 위더링턴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에 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원천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주사 성경을 쓰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요한에게 영감을 주어 성경을 쓰게 하셨다는 뉘앙스로 요한 자신을 구약의 선지자들의 반열에 세우는 느낌이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요한계시록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의 신실하고 참됨을 더 강조하기 위해 8절에서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이신 모든 환상을 자기가 직접 보았고 그 모든 말씀을 직접 들었으며, 그것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요한계시록 1:19).”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라고 요한은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을 따라,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비단 요한계시록만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사 오류가 없도록 쓰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합니다.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 자녀의 신앙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3.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6; 벧후 3:8-9)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도는 이 예언의 말씀이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6). 7,12,20절에서 주님은 친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은 1세기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900년 이상 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속히 되어질 일들은 얼마나 진행이 되었습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하는 심판의 현상들이 이미 교회 역사 속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속히 오신다고 하신 주님의 재림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이 신실하고 참되다면 어떻게 주님은 1900년 이상이 지나도록 오시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3:8-9절에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어 말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8–9).”
우리가 이 이상의 생각과 판단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사도 베드로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천년이나 만년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없이 신자들을 기다림에 지치게 만드시려는 의도가 아님은 명백합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 속에서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갔던 신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언제나 임박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말합니다. “구원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오순절 사건 이후에 일어날 다음 종말론적 사건은 재림이다. 따라서 내년에 일어나든 도는 2천년 후에 일어나든 간에 구원 역사 속에서 그 사건은 항상 ‘가까이’ 있다.” 그래서 성도들은 여전히 ‘마라나다’(주여 오시옵소서)라고 서로 격려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4.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다(7; 1:3; 마 7:20-27; 약 1:23-25; 빌 4:5)
이제 이 말씀이 신실하고 참되다는 것에 근거하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22:7).” 제가 지금까지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번에 걸쳐 ‘복이 있도다’라는 선언이 나옵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14). 요한계시록의 칠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은 그 여섯번째에 해당합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 선언은 첫번째 복 선언과 차이가 있습니다. 1:3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였으나, 본문에서는 단지 ‘지키는 자’만을 언급합니다. 그 이유는 누군가 이미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을 회중 앞에서 읽었을 것이고, 회중은 그 말씀을 다 들었을 것이기에, 이제 남은 것은 읽은 자나 듣는 자들 모두가 이 말씀의 권위 아래서 이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임을 강조하려고 ‘지키는 자’만을 언급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하는 모든 신자의 의무가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열매로 분별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나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7:20-27). 또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야고보서도 동일한 것을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야고보서 1:23–25).”
사도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바로 앞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중요합니다. 주님의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성도의 의식은 모든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선한 동기가 됩니다. 종말론과 성도의 윤리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종말론적 선언은 성도들에게 이 두루마리의 예언을 지키고 사는 윤리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패턴입니다. 한 예만 든다면, 저는 주저없이 빌립보서 4:5을 소개하겠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립보서 4:5).”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종말론적 안목으로 살아가야 함을 지난 주일 말씀의 적용에서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종말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구분이 선명하게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영화의 “뭣이 중헌디?”라는 대사가 유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종말론적 관점은 우리 인생의 크나큰 실패, 우리를 죽을 만큼 괴롭게 하는 질병의 문제, 우리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아픔들이 우리 인생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없고, 심지어 우리의 행복도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성도가 종말론적 관점, 이 안목을 놓치게 되면, 그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 의미에서 종말론적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는 게으르거나 나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에 치중하여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는 영원히 쇠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단순히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면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22:7).”고 말씀한 것입니다.


5. 하나님만 경배하라(8-9; 19:10)
요한은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 요한이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요한계시록 22:8).”
요한은 다시 한 번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19:10에서 요한은 자기에게 계시의 말씀을 전해주는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천사는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요한계시록 19:10).”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요한이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합니다. 천사는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요한계시록 22:9).”
사실 조금은 이해도 됩니다. 요한이 받은 계시가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종종 엄청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거나 대단한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추종하는 현상들이 있지 않습니까? 목사를 대단하다고 여겨 예수님처럼 따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분별력을 잃어버릴 정도라면, 천사 앞에 경배하려고 했던 요한 만큼이나 합당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처사들입니다. 천사의 말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근본 메시지입니다. 인간의 경배의 대상은 로마 황제도 아니고,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도, 어떤 천사도 아닙니다. 짐승도 인간의 경배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1세기 말 성도들을 괴롭혔던 것은 바로 이런 경배의 대상의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근본 메시지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요한이 왜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기록하고 있는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를 경배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황제와 짐승, 돈을 경배하는 자는 모두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자는 영원토록 신천신지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6. 교훈과 적용(창 3:1)
사탄이 우리 첫 조상을 범죄하게 하였을 때, 처음으로 한 말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라고 (말씀)하시더냐?”하는 것이었습니다(창 3:1).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게 함으로써 아담과 하와를 범죄하게 할 수 있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믿지 않게 미혹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자기 권세 아래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고(믿을 만 하고) 참되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에덴에서 지금까지 마귀의 전략입니다. 여기에서 승패가 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십시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하는 태도로 주일마다 날마다 주의 말씀 앞에 나아가십시오. 이 태도는 공예배와 기도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통해서 나타날 것이고,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듣고 읽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머물고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히 거하게 하십시오. 그 말씀을 지켜 행하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7).”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으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애당초 종말론적이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신자들을 유혹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는 음녀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동안, 신자가 마음을 지키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종말론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실하고 참되신 주님이 주시는 신실하고 참된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