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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마음

히브리서 4:15; 5:2, 로마서 8:34, 요한복음 14: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4-25

말씀내용
두 가지 이유로 오늘 요한계시록강해를 쉬고 히브리서 4장 15절과 5장 2절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첫째 이유는 주중에 청교도 목사 토머스 굿윈(1600-1680)의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마음』(복있는사람)을 읽으면서, 여러분과 이 말씀을 나누고 싶은 열망을 누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부차적인 것이지만, 오늘 저녁부터 서울에서 며칠간 말씀을 전하는 일정 때문에, 1부 예배에서만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유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은 주님께서 이땅에 계시던 당시의 신자들보다 지금의 신자들이 더 불리한 입장에 서 있다고 느끼는데, 그 이유는 지금 영광 중에 계시는 주님께서 육체의 연약함과 고난 속에서 계시던 당시에 신자들을 동정하셨던 것과 같은 정도로 우리를 동정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증명되지 않은 오해 때문입니다. 토머스 굿윈은 이런 오해를 가진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영국에서 만큼이나 21세기의 한국의 교인들도 가지는 오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가 ‘이땅의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이 주제를 여러분과 나눠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에 관해 설교하면서도 주님께서 성도들을 향하여 어떤 사랑으로 지금도 사모하시는지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너무나 적게 말했고,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설교의 중심 내용은 토머스 굿윈의 『마음』에서 많은 부분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분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 믿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의 대상을 향한 사랑을 전제합니다. 신앙이 인격적 관계를 넘어, 부부의 사랑 어린 관계로 설명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는 주님을 사랑하라고 늘 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깊고 뜨거워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포기할 수 있을만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람을 자극하고 뜨겁게 발화시키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1서 4:19).”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는 중요한 주제를 상고했습니다. 신부인 교회는 그날을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만 그날을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신랑이신 주님께서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을 현저하게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토머스 굿윈의 『마음』은 본래 긴 제목을 가진 책입니다. 그 긴 제목이 책이 다루는 내용을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죄인들을 향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마음, 즉 지금 영광 중에 인성을 입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죄 혹은 비참이라는 모든 종류의 연약함 아래 있는 자신의 지체들을 향해 품으신 은혜로운 성향과 다정한 애정을 증명하는 논문』이 그 제목입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눈치를 채셨습니까? 이제 이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주님의 고별 메시지 (요 13:1; 14:2-3; 17:13,24)
주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시기 전, 마지막 저녁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피조물인 인간의 형상을 입고 비천하게 낮아지신 주님은 이제 그 낮아짐의 절정인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른 것을 아셨습니다. 곧 아버지께로 돌아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당신이 곧 누리실 영광이 아니라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이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은 영원히 사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그 사랑을 표현하신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2). 토머스 굿윈은 주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그것이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떠나서 거기 있다 해도 너희는 나의 사랑을 절대 의심하지 말아라. 그곳의 모든 영광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절대 잊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주님은 이어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3).”고 말씀하셨습니다. 굿윈은 이 말씀을 또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너희들 없이는 살 수 없구나. 내가 있는 곳에 너희들도 함께 있어서 우리가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때까지 내 마음은 절대 진정되지 않는구나. 이것이 진실이다. 내 마음이 진정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늘도 나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내가 아버지와 나누는 교제도 나를 진정시키지 못한다. 너희들이 나와 함께 있도록 하지 못하면, 내 마음은 온통 너희들에게 고정될 것이며, 내가 어떤 영광을 가졌다면 너희들도 그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여러분은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에서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주님은 대제사장 기도라고 알려진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에서도 그 마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긴 기도에서 당신 자신에 관한 그리고 당신 자신을 위한 간구는 한 두 마디에 불과하지만(1-5절), 거의 다섯 배 이상의 기도가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기도하셨고(13절), 그들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24절). 주님의 마음은 당신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사랑하신 성도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었고, 주님은 성도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주님의 대제사장 기도에는 자기 사람들을 위하고 그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시며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 절절히 배어져 있습니다.


2. 배신을 책망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사 43:25; 눅 24:25; 막 16:14)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시는 장면에서도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배신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의 배신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일에 대해서도 주님은 일절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는 말씀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제자들의 배신이 아니었고, 그들의 불신이었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누가복음 24:25).” 마가복음은 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마가복음 16:14).” 배신을 책망조차 하지 않으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불신을 책망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마음을 괴로워하시며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배신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지 않으셨으나 불신을 책망하신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3. 주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히 4:15; 9:24-26; 롬 8:34; 히 7:25; 요일 2:1; 히 5:2; 마 11:28-29)
이제 주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히 4:15).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영단번의 제사를 드리심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흘리신 피로써 영단번의 제사를 완수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용서를 위하여 더 이상의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속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브리서 9:24–26).”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대제사장의 직분을 완수하셨기 때문에, 지금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후로는 더 이상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광을 입으신 지금도 택한 백성의 구원이 완성되기 까지 쉬지 않으시는 신자들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로마서 8:34).” 히브리서 기자도 이 말씀을 확증하여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브리서 7:25).” 사도 요한은 어떻게 썼습니까?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1서 2:1).” 이 말씀들이 거듭 확증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지금 성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실지라도 여전히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고 중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도 성도들의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직분은 전적으로 은혜와 긍휼의 직분입니다. 대제사장은 죄 없는 의로운 자들을 상대하는 직분이 아닙니다. 그가 직분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다 죄인들 뿐이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서야 하기에 죄인에 대한 은혜와 긍휼을 갖지 않고서는 이 직분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라고 이중부정으로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란, 우리가 지난 모든 종류의 고통과 핍박 뿐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포함하여 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동정하십니다. ‘동정하다(συμπαθέω)’라는 말은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히브리서 5:2).” 거룩하고 완전하신 주님께서는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가혹하게 다루시거나 모질게 내쫓지 않으십니다. 무식하고 미혹된 그들을 용납하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28–29).” 세상은 차별하겠지만, 주님은 비천하고 별 볼일 없는 자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주님의 본성과 성품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본성과 성품이 그러하시다는 것은, 그것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변치 않는 성자 하나님의 본성은 이 땅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 분명합니다. 히브리서는 주님께서 비천한 우리를 용납하실 뿐 아니라, 자애로운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으신다(“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심”)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연약하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동정하실 ‘능력’, 큰 힘을 가지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능력이 없는 분이 아니요”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4. 주님의 마음은 삼위 하나님의 마음이다 (요 6:38; 요 10:15-18; 눅 4:1-2,14,18-19)
그러나 이것은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마음만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삼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의 모든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기인합니다. 주님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6:38).”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도록(요 6:39-40)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버려 그들을 양의 우리에 들게 하는 것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5-18). 죄인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성자 하나님의 본성이지만, 또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속에 원래 자리 잡고 있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굿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한 방울의 사랑을 더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그 사랑을 떨어뜨리신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또한 성령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인성을 가득 채운 모든 은혜는 주님 안에서 행하신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십시오. 1-2절에서는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절은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성경 이사야 61:1-2을 찾아 읽으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18–19).” 메시아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메시아의 사역을 감당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이와 같이 주님께서 죄인들을 향한 자비의 통로가 되도록 그리스도의 인성에 능력을 베푸신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히 5:2)
성도가 죄인인 자신들을 향하시는 주님의 애정 어린 마음을 아는 게 왜 중요합니까? 성경이 모든 연약함에 붙잡혀 살아가는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그토록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영광의 보좌에 계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얼마나 깊은 동정의 마음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지 그 마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그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생각하며 사십니까?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고 헤아리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당신은 나를 얼마나 사랑해?”라고 묻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주님께 물으십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신 것을 성경을 통해 매일 거듭해서 듣고 있습니까?
사랑받는다는 확신은 우리를 자유 하게 합니다. 자유 하게 한다는 것은, 의무나 규칙에 매여서 사랑하는 대상을 대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사랑, 나아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우리의 행위 여부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죄의 값을 완전하게 치르셨고, 우리 죄인이 성취할 수 없는 율법의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심으로써 율법 곧 하나님의 기준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를 대신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을 받을 일이 전혀 없고,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합니다. 사랑받는다는 확신은 사랑하는 대상인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간 본연의 목적을 이루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자극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은 순종의 자극제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다고 해도, 우리는 늘 범죄함으로 넘어지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느끼고 경험해야 하는 죄의 비통함과 쓰라림을 우리보다 더 깊이 맛보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범하는 죄는 주님을 진노하게 하기 보다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기도록 주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것이 모든 연약에 쌓여있는 성도가 누리는 위로입니다. 마치 혐오스러운 질병을 가진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자애로운 마음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범죄하는 자녀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굿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 모두를 대적하는 우리의 죄악마저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더욱 불쌍히 여기게 하는 동기로 사용된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비참함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그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 처한 비참함이 클수록 그를 향한 연민도 더해집니다. 모든 비참함 중에 죄만큼 비참한 것도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 역시 당신 안에 있는 죄를 그렇게 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분의 증오는 모두 사라지고 그분의 증오는 오직 죄만 향합니다. 죄를 파괴하고 멸함으로써 죄에서 당신을 자유 하게 합니다.” (『마음』pp.175-176).
이런 주님이시라면,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히 5;2).” 주님은 여전히 지금도 인성을 입으시고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무식과 미혹됨을 용납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와 넘어짐을 책망하시기 보다 괴로워하시고 도리어 우리의 믿음 없음과 마음의 완악함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주님의 기쁨과 위로와 영광은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아주 연약할 때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위로하면서 그분의 은혜와 자비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더 증가하고 더 커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굿윈은 그가 평생에 전했던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자애로운 마음,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확신하며 살다가 주님께로 갔습니다. 80세에 열병에 걸려 임종을 앞둔 굿윈은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지금까지 교제하던 성삼위께 나는 지금 갑니다…나는 그리스도의 전적인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가졌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지금보다 더 사랑할 수 없을 만큼 그분은 지금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도 그분을 사랑합니다. 지금보다 더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나도 그분을 사랑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이제 나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 그 사랑을 확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행복한 것입니까? 영광 속에서 영원히 주님을 사랑하고 연합되기 위해 죽는 죽음은 또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죄인을 향한 주님의 자애로운 마음, 그 사랑을 여러분이 더 깊이 더 굳게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넘어지고 쓰러질 때에도 주저함 없이 그 자비로운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의 삶이 그분의 변함 없는 사랑을 알고 확신하기에,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복과 은혜가 주님이 사랑하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온전하게 경험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