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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교회 - (04). 깊이 있는 사귐

고린도후서 13:13, 요한복음 17:21-23, 요한복음 13:34-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2-28

말씀내용
우리는 교회에 대한 주의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교회] 시리즈의 네번째이자 마지막 말씀으로, 오늘은 ‘깊이 있는 사귐’이라는 제목으로 주의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먼저 래리 크랩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영적 공동체가 아닌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비극이다. 아니, 그러한 공동체에서 살면서 거기에 만족하고 그곳이 영적 공동체라 생각하는 것은 훨씬 더 심각한 비극이다.”(래리 크랩, 『영혼을 세우는 관계의 공동체』 김명희 옮김, ivp, p.75). 여러분은 래리 크랩의 말에 동의하십니까? 혹시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저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사실, 제가 [깊이 있는 교회] 시리즈 설교를 요한계시록 강해 중간에 갑자기 전하게 된 것은, 제 안에 목까지 차오르는 갈망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서 세우신 교회가 고작 이건가?”하는 질문을 더 이상 미루거나 묻어둘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벧샬롬 교우들과 같이 공감하고 싶었고 함께 갈망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이 좀 불편할지라도 교회에 대한 주의 말씀들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 가슴 깊은 곳에 새기시고 감동케 하사 이 말씀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은 갈망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1. 성령의 코이노니아 (고후 13:13; 요 17:1,5,21-23; 잠 8:30-31)
성경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린도후서 13:13).”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예배 축도에서 우리는 매주일 이 말씀을 듣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고, 삼위 하나님께서 각각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을 베푸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축복하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교회의 소망은 다양하고 유익한 프로그램들에 있지 않고 바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교회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자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그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입니다. 여기서 특히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교통하심은 헬라어로 나눔, 교제, 사귐을 의미하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입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이 편지를 쓰는 바울 사도는 왜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이라고 하지 않고 교통하심이라고 썼을까요? 교제, 사귐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임하는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성령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영적 친교, 영적 교제와 사귐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영적 친교가 없다면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교회는 그저 육적인 관계 맺음으로 가득한 세상의 단체나 진배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교회를 세상의 모든 단체나 조직과 다르게 하는 본질적 차이를 만드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개념은 본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생생한 사귐과 연합 속에서 경험되는 사랑의 관계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입니다. 본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서로를 영화롭게 하며 존재하셨는데(요 17:1,5)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서로를 무한히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거룩하고 영적인 교제를 보여줍니다(잠 8:30-31).
바울 사도는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런 성부와 성자 하나님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교제가 바로 교회 안에서 성도들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던 내용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21–23).”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되심이 교회 안에서 경험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고 바울 사도가 성령의 교통하심을 말했을 때,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축복하는 이 내용은 너무나 영광스럽고 놀라워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세상에서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 보다 더 친밀한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지 육적인 관계만의 하나됨이 아니라, 온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그 사귐의 깊이와 동질의 교제를 누리도록 창조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영원토록 그리고 날마다 기뻐하셨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 앞에서 항상 기뻐하셨듯이,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런 관계들로 맺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려졌고, 성령님께서는 오순절에 강림하여 교회에 부어지셨던 것입니다.


2. 구속과 새 계명 (요 13:34-35)
이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은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깨어져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되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깨어져 서로를 비난하는 관계가 되었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창세기의 앞부분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 깨어진 관계들을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관계로 회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게 할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너진 관계도 회복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계명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이제 나의 죽음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세우시겠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이런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새로운 공동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새계명의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 사이에 높이 세워져 있는 죄의 장벽들을 헐고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성령의 은혜를 주실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주신 새계명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몇 점 정도 될까요?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이런 공동체는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죄인의 본성으로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을 쌓아서 그 누구도 내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죄인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힘으로 세우자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거듭난 성도들에게 주신 새 본성은 형제가 형제를 깊이 사랑하고 깊이 있는 사귐을 나누는 영적 공동체를 깊이 갈망합니다. 이갈망은 모든 거듭난 성도의 심령 안에 심어주신 거룩한 본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저절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연결되고 결속되며 영적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는 성도들 스스로가 성령님을 따라 걸으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인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은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영적 친구들과 영적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3. 영적 친구들과 영적 지도자들
영적 우정, 여러분에게는 영적 우정이라고 할만한 관계가 있습니까? 자신의 성문을 열고 들어오도록 초청할 수 있는 영적 친구가 있습니까?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보면서도, 나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나를 용납해주면서 나를 더 깊은 거룩의 자리로 함께 가자고 말해줄 수 있는 친구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책감과 수치심과 실망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깊은 속을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나 자신을 판단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이런 속 마음의 아픔과 갈등을 드러낼 때 우리는 더 없이 깊이 결속될 수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 정직한 대화를 하게 되고, 복음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면서 성숙하고 깊은 영적 우정으로 빚어져 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적 우정과 육적 우정을 분별하고 계십니까? 교회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관계가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눔으로써 정서적 외로움을 달랠 친구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서로를 더 친밀하게 알아가고 만남으로써 서로를 위해서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기도해주면서 거룩함을 향해 가고자 하는 친구들입니까? 영적 우정의 관계는 반드시 나이가 비슷해야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10살이 어리거나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천로역정을 걸어가는 친구로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목적지를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서로를 깊이 알고, 서로를 향해 아플지라도 깊은 이야기를 사랑으로 말해줄 수 있는 친구입니다. 영적 친구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와 갈망들을 나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거룩이라는 방향을 향할 수 있게 해주는 친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그런 영적 친구여야 하고 또 누군가는 우리에게 그런 영적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정말 영적 친구가 있습니까?
또 하나, 우리가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은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여기서 영적 지도자라고 하면, 그것은 반드시 목사나 장로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적 지도자들은 소위 ‘경건한 어른’입니다. 저는 제 책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에서 경건한 어른에 대한 정의를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분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웃어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사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자기 자신보다 그리스도께 푹 빠지는 법을 아는 사람, 자아를 찾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 거룩함에서 자라가는 사람, 사람들에게 열심과 뜨거움의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의 차이를 깨뜨리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 얄팍한 프로그램이나 어떤 행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존재감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는 인생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 번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경건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입니다.”
이제 한 번 둘러보십시오. 우리 교회에는 여러분의 시각에서 볼 때 경건한 어른이 계십니까? 얼마나 계십니까? 많습니까, 적습니까?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은, 여러분은 경건한 어른입니까, 아니면 경건한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까? 우리가 깊이 있는 신앙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교회 안에 경건한 어른의 존재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영적 친구들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영적 친구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찾아갈 수 있는 경건한 어른이 필요합니다. 그저 자기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들을 통해서 나오는 지혜로운 조언을 제시해줄 뿐 아니라,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주고 나와 함께 해줄 수 있는 지도자들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스스로 열지 못하는 내 마음의 깊은 방들을 부드럽게 열고 들어와줄 수 있는 경건한 어른들이 필요합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벧샬롬 교회는 이런 경건한 어른들의 존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려분 모두가 현재 경건한 어른으로 혹은 장래의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져가는 그런 은혜를 주께서 우리 교회에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바로 이런 영적 우정의 관계들과 경건한 어른들의 영적 지도를 포함하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교훈과 적용 (갈 6:9; 엡 2:19; 5:27)
이런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는 한 순간에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순수한 노력으로만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몇 가지 적용적 교훈을 가슴에 새기면서 [깊이 있는 교회] 시리즈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첫째로 깊이 있는 사귐의 공동체는 우리 모두에게 인내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한동안 수고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신속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수고한 자리에서 쓰디 쓴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해야 하는 일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일하신 결과를 나타내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선한 일을 그만 두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피를 흘려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인내는 단순히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 인내로써 하나님은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의 영적 친구로, 누군가의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 가고 계시는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두번째로, 인내하는 동안, 여러분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인내의 시간은 사실 기도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인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깊이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우리 자신의 과업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일임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인내하는 동안, 깊이 있는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점점 더 깊어져 가게 될 것이고 이것은 참된 공동체, 깊이 있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기도로 이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내가 더 깊은 갈망이 되게 하고 그 갈망이 깊은 기도로 이어지게 하십시오.
세번째로, 위험을 무릅쓰십시오. 계속해서 여러분은 여러분 내면의 성문을 열어 형제들이 여러분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그들을 초청하십시오. 때로는 이것이 여러분 자신에게 상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을 수 없이 반복하지만, 어떤 반응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시라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 우리는 종종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의 가장 깊은 속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안전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혈육의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상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가족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족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가장 많은 상처를 경험하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 상처들을 통해서, 상처들을 치유 받으면서 정말 가정이 되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가 그러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이고 영적 가족입니다(엡 2:19). 교회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동체입니다. “상처 좀 받아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상처는 결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지고 성령 안에서 연결된 관계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위험을 무릅쓰되, 여러분 내면의 성문을 열어 누군가를 초청하는데서 점점 더 나아가십시오. 성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성벽 자체를 헐어버리십시오. 이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래리 크랩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선택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래리 크랩, p.198).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은 그저 외로운 인생길에 좋은 친구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신 백성을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엡 5:27). 거룩을 추구하는 것은 목사와 같은 특정인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거룩함을 위해 부름을 받아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만의 거룩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서로 서로를 향하여 책임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의 거룩을 추구하는 일보다 더 여러분의 옆에 있는 형제들을 거룩의 길로 인도하고 그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나 홀로 간다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내가 거룩함을 추구한다는 생각으로 그 선한 길을 신실하게 믿음으로 걸어가십시오. 그렇게 성령의 교통하심이 충만한 교회가 되도록 교회를 축복하고 또 축복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주님의 교회를 더 진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나 한 사람이 말씀 듣고 은혜 받고 신앙이 성장하면 된다는 생각을 거두어 들이십시오. 우리는 개인주의가 진리로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이 세상의 정신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시대 정신의 세례를 받고 교육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우리 기성 세대 보다 더 심각하게 개인주의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그 위에 신앙을 세우려는 헛된 시도를 할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 세대들에게 가르치고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공고한 개인주의의 정신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깊이 있는 공동체를 경험하고 맛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자녀들의 세대에 깊이 있는 교회를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경멸하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모든 입을 닫게 할 수 있는, 신앙 공동체, 깊이 있는 교회를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은 결코 흉내 낼 수도 없고, 발견할 수도 없는 그런 진정한 교회 공동체, 깊이 있는 교회를 여기에 세워 주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사귐, 성령의 교통하심이 충만한 공동체의 은혜를 우리가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목사 한 사람의 갈망으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왜 벧샬롬교회에 오셨습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간절히 원했지만, 교회의 리더십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좌절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모두 주님이 바라시는 깊이 있는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함께 수고하며 주의 은혜를 구합시다. 언젠가 세상이 볼 수 없는 깊은 회심과 깊은 성화와 깊은 교제가 있는 깊이 있는 교회를 보게 되는 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런 교회에서 행복하게 주님을 섬기게 되는 날을 바라봅시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더 진지하게 여기십시오.